무슨 바람이 불었나

미련이 남지 않도록

by 지오바니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아침 8시에도 일어나기 힘든 요즘인데 오늘은 새벽 3시 반에 퍼뜩 눈이 떠졌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다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아예 불을 켜고 자리를 잡는다.


뭐라도 써볼까 하며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 이 곳에 있는 나의 첫 글부터 순서대로 읽기 시작했다. 휴직을 시작하기 전 설렘과 불안이 공존하는 초반의 글들을 보니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금의 나는 이전 보다 확실히 편안해진 것 느껴진다. 그저 하던 대로, 살던 방식밖에 몰라 주어진 시간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던 그때의 나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하루를 대하는 마음가짐부터 다르다.


이젠 더 이상 하루의 스케줄을 짜서 그에 맞춰 살려하지 않는다.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난지도 오래다. 쉬는 동안 아르바이트라도 해보겠다며 구직사이트를 매일 같이 뒤지던 것도 이제 그만두었다. 어제만 해도 벌써 6월 이라며 휴직을 시작한 1월에서 현재로 훌쩍 시간을 뛰어넘은 듯 '도대체 1년의 반이 지나갈 동안 뭘 했나' 황망한 기분이었는데 글을 통해 비추어 본 나의 과거가 '너 그 시간 동안 꽤 긍정적고 여유로운 사람이 되었다'며 안심시켜준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천천히 나의 삶에 스며든 시간의 여유가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쉬지 않고 나를 변화시켰나 보다. 그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되는 것이 바로 내 글이니 역시 쉼을 기록하기로 한 건 헛된 일이 아니었. 항상 눈 앞에 보이는 확실한 것이 아니면 결코 안심할 수 없던 단적인 현실주의자에서 약간의 망과 긍정적인 소망에 한 발을 슬쩍 걸친 보 이상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조금 풀어진 김에 벨트를 한 칸 앞으로 밀어 채워 헐렁해지는 기분을 만끽하려 오랜만에 와인을 하나 사 왔다. 와인맛을 모르니 딱히 비싼 걸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가성비 좋다는 칠레산 레드와인을 하나 담고 같이 먹을 치즈와 감자칩도 하나 집었다. 꼼군은 의아한 눈으로 술도 못 먹는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었느냐며 갸우뚱이고 난 쉬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 조금이라도 더 지금의 여유를 만끽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내일 아침 만일의 늦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늦게 먹은 와인과 주전부리 탓에 얼굴이 팅팅 부어도 상관없고 불편한 자리에서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장단을 맞추어야 할 필요도 없는 완벽히 편한 순간들을 할 수 있을 때, 더 늦기 전에 즐겨보자며 덜그럭 덜그럭 먼지 뽀얀 와인잔을 꺼내어 씻 이런저런 안주들과 함께 술상을 내어 온다. 아이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생경한 광경에 어색해하면서도 엄마 아빠 사이에 끼여 앉아 열심히 안주로 내온 과자를 집어 먹느라 정신이 없다. 평소라면 늦은 시간이라고 못 먹게 했을 텐데 오늘은 아이한테도 한없이 너그러워지고 싶다. 그렇 각자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며 우리만의 작은 주말 파티를 즐긴다.


하지만 무리 최선을 다해 재를 충실히 산다 해도 세월이 흘러 과거를 되돌아보면 늘 후회되는 지점이 생기는 게 인생이다. 언제 또 우리가 재택근무에 휴직에 원격수업으로 온 식구가 하루 종일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또 언제 우리가 이렇게 마음껏 풀어진 상태로 내일을 맞을 수 있는 날이 올까? 무엇이든 지나가야 그 가치를 알게 된다. 그러니 지금이 아니면 못 할 일, 나중에 돌아보며 하지 못했다며 후회할 일이 더 생기기 전에, 이 순간이 사라지기 전에, 미련이 남지 않게 마음껏 해보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지만 현재의 고마움을 일깨워주는 오늘과 같은 바람이라면 언제나 고맙게 맞이할 준비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