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주마등은 무엇이었을까
안녕하세요 김승민입니다
아버지가 떠난 후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글로 써보고 있습니다
돈을 훔치다
국민학교 1학년 시절
냉장고를 덮고 있던 천주머니에서 지폐 1장을 훔친 적이 있습니다
새벽에 몰래 훔쳐서 어떤 지폐 인지도 모르고 아침에 학교에 와보니
제가 생각했던 1천 원이 아니라 1만 원이었습니다
1만 원을 제가 직접 만진 적은 없었지만
1천 원 10개가 1만 원인 건 알았기 때문에
두근두근하며 평소 하고 싶었던 것을 다 flex 해버렸습니다
일단 닳아버린 리코더를 3,000원을 주고 새 리코더로 바꾸고
친구들이 가지고 놀던 것과 똑같은 RC카와 건전지를 4,000원에 사고
재믹스 게임팩을 2,000원에 교환하고
마지막으로 문구점 앞 뽑기에서 스트리트 파이터 게임 장난감을 1,000원에 뽑고...
그렇게 물건들로 가득한 가방을 메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지폐 1장 없어진 건데 어떻게 아시겠어? 하고
약간은 조마조마하며 들어갔는데
아버지의 첫마디가 기억납니다
가방 열어봐라
평소와 달리 불룩한 제 가방에서
제 범죄의 결과물들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반짝반짝한 리코더
박스도 열지 못한 RC카
몰래 넣어 놓으려고 했던 게임팩
승룡권을 하고 있는 켄 장난감까지...
그렇게 저는 순순히 방으로 이끌려가
아버지에게 회초리로 흠칫 맞았습니다
(혹시 요즘은 과잉체벌 등 논란이 될까 말씀드리면...
당시 저에게 적절한 훈육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빨갛게 멍든 제 종아리에
어머니는 약을 발라주셨습니다...
다행히 그때 잘 맞은 덕분에
그 뒤로는 큰일 없이 잘 자란 것 같습니다^^
주마등
20대의 어느 시절
수영도 못했던 놈이
여름날의 바다를 맞이한 기쁨에
바닷물에서 의식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 한 두 모금의 짠물이 들어왔을 때는
큰일이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3, 4모금 이상을 먹게 되니
겁이라는 감정이 머리를 지배해버려서인지
살려달라는 말도 나오지가 않고
허우적거리는 동작조차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의식이 옅어졌던 것 같습니다
죽음의 직전에서
인생의 어떤 부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하던데
물속으로 잠기는 제게 스쳐 지나간 것은
국민학교 시절 집안의 돈을 훔쳐 혼이 난 저에게
약을 발라주셨던 어머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손이 따스해서였는지
그 시절이 죄송해서인지
알 수 없지만
다행히 저는 무사히 구조되어
약간의 병원신세를 지고
감사하게도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눈빛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2~3일 전에는
암세포가 거의 전신을 덮어버렸습니다
혀 등의 기관도 마비가 되어
안타깝게도 더 이상 음성으로 말씀을 하시지 못했습니다
그때부터는 눈빛으로 교감하였으나
아버지의 생에 대한 아쉬운 마음 제가 헤아릴 수 없어
그저 제가 하고 싶은 말들 아버지 귀에 속삭였습니다
"아버지
국민학교 1학년 때 집안 돈을 훔친 저 타이르신 거 기억나시죠?
그렇게 올바르게 잘 키워주신 덕분에 잘 자랐습니다
그때의 기억들은
잠깐이나마 죽음을 맞이했던 제게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정도로
아버지에게 미안하고 고맙고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무엇이 보이시나요
무엇을 말하고 싶으신가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당신의 죽음 앞에서
당신에게 스쳐 지나가고 있는 장면들은 무엇인가요"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이었지만
저는 바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장면들 중 일부에
저의 어떤 모습이라도 있기를...
약 2년 전
제가 노트에 기록한
주마등이라는 단어를 보며
아버지에게 주마등처럼 스쳐간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