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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 Jan 21. 2020

본직의 소관임

구형은 제 소관입니다.  

제가 수사관 초임 시절에 있었던 일이니 근 30여년이 지난 일입니다. Y검사라고 강단 있는 검사가 있었습니다. 초임검사도 아니었으나 고참도 아니었습니다. Y검사는 어느 날 한 사건을 수사하여 구약식(벌금) 처분으로 결재를 올렸습니다. 올라온 기록을 확인한 부장은 처분을 변경하라는 부전지를 붙여 다시 Y검사에게 결재를 반려 했습니다. 벌금 액수를 줄이라는 지시였습니다. 반려한 부장이 누군가에게 사건을 부탁을 받아서였는지 아니면 순수하게 사안을 달리 판단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Y검사의 판단으로는 부장의 처분 변경 지시가 사안과 맞지 않고 부당하다고 여겼나 봅니다. Y검사는 부전지를 작성하여 기록에 붙이고, 처분을 변경하지 않은 채로 다시 결재를 올렸습니다. 부전지에 적힌 내용은 ‘구형은 본직의 소관임’ 이었습니다.    


이 같은 내용은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니나 그 실에 근무했던 수사관이 말해주었던 것이고, 그 당시 청 직원들에게 회자되었던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 당시 분위기에는 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제가 기억하기에도 그때 검사들이 지금의 검사들보다 강단도 있었고, 사명감 그리고 검사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히 강했던 것 같습니다. 경력이 짧은 평검사라 하더라도 결재권자가 임의로 구형량을 변경하라는 지시를 하거나 처분을 변경하라는 지시를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독립관청으로서의 검사 개개의 의견을 그렇게 존중했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이런 부전지를 붙여 결재권자에게 올리는 검사가 있다면 당장에 사단이 나겠지요. 전국 검찰청의 메신저가 부리나케 날라 다닐 것이고, 그 검사는 검사적격심사에 시기에 조직 부적응자로 특정 감찰대상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부장검사의 결재권한이 강해졌습니다. 상명 하복이라는 게 없어졌다고 해도, 부장검사 주임검사제라는 것도 생겼고, 지휘 감독이라는 규정이 생겨 오히려 예전 보다 부장이 업무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넓어진 것 같습니다. 요즘은 부장의 처분 변경지시를 거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검사를 본적이 없습니다.


물론 수사한 검사가 사안에 맞지 않거나 잘못된 처분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경험이 일천한 평검사가 판단의 실수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는 당연히 결재권자인 부장이 이를 바로 잡아야 주어야 하고, 결재단계가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판단이 아닌 경우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수사를 담당한 검사는 피의자의 성향이나 전력 그리고 기록상 볼 수 없는 부분까지 수사하는 동안 보아왔을 테고, 그 때문에 적절히 판단하여 구형량을 결정했을 수 있음에도 기록만 보고 판단한 부장의 처분 변경지시를 아무런 이의제기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요즘의 결재 분위기입니다.


저는 검사가 아니니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하면 할 말이 없겠으나 근 30년을 검찰에서 일한 사람이 분위기를 모르겠습니까. ‘퍽’ 하면 호박 깨지는 소리고, ‘빡’ 하면 머리 깨지는 소리 정도는 구분합니다. 분위기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나 검사들의 소신 처분이 너무 무뎌졌습니다. 부장의 반려가 있으면 혼자 궁시렁 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이의제기 없이 그대로 따릅니다. 수사관이 한마디 거들어도 부장님이 바꾸라는데요 라며 씁쓸하게 웃을 뿐입니다. 잘못된 내용이나 고쳐야 할 부분 등은 당연히 따라야 하겠으나 검사의 소신과 맞지 않는 처분 변경지시까지 초등학생이 엄마 말 따르듯이 따라서야 검사 체면이 서겠습니까.    


부장의 지시가 순수하게 사안판단의 차이라면 사실 별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는 예상했겠지만, 외부의 부탁을 받았거나 부장 위의 또 다른 부당한 지시가 있었을 경우입니다. 평상시 아무런 이의제기 없이 이루어지는 처분 변경지시가 반복되고 무뎌지면 결국 부당한 지시까지도 당연시 되는 현실로 정착되고 맙니다. 처분 변경을 지시하는 숨어 있는 이유는 처분검사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요즘 검찰개혁을 이야기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저의 생각으로는 과오가 없는 검사의 처분은 결재권자가 변경 할 수 없는 규정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결재권자의 변경지시 사실을 기록에 그대로 남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수 있겠습니다. 부당한 압력이나 윗선의 지시로 이루어지는 체계가 아니라면 모든 책임은 처분한 검사가 질 것 아니겠습니까. 30여 년 전의 검찰과 요즘 검찰 세상을 모두 겪어본 저의 생각으로는 ‘본직의 소관임’이라는 부전지를 올릴 수 있는 검사가 요즘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요즘 하도 검찰개혁이니 뭐니 해서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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