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발을 들여놓고 나서 벌써 만 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한국어와 한국문화, 한국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딸아이를 위한 결정이었지만, 시골 마을에 땅을 사고 집을 짓고, 북카페까지 만들었다.
처음에는 잠시 머물며 숲 속 작은 초등학교 졸업만 시키자고 계획했다가 이곳이 좋아서 중학교도 보내고, 눌러앉아 그리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오래오래 자연 친환경적인 환경 속에서 북카페를 운영하며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천년만년 살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슴에 구겨 넣었다. 그렇게 실현되기를 바라면서.
그때는 딸아이의 진학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을뿐더러, 육체적인 노동의 강도와 재정적인 부분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핑크빛 사랑에 푹 빠져있었으니 말이다. 모든 게 달콤했고, 희망으로 온갖 어려움을 포장해서 그럴싸한 모습이었다. 거기에다 쓸데없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꿈을 이루어가는 그 모든 순간에 감격하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 모든 것으로 인해 가슴이 뜨겁다. 그래서 그것을 내려놓을 용기와 힘이 내게 더욱 필요했다.
마침내 나는 이곳 시골 북카페를 정리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서서히 내려놓는 연습을 진행 중이다. 작별의 시간을 미리 정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떠나보내기 싫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애달픈 이별이 내게 손짓한다.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보지 않으려 해도 흔들흔들 이별이 내게로 온다. 이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하여 머리를 싸매 궁리하며, 밤잠을 설치던 날들도 이제 소용이 없어 보인다. 자존심이 상처받지 않도록 나를 토닥였다.
내가 시골 북카페를 오래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길게 가면서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싶었는데, 정리를 해야만 하는 현실적인 이유를 찾아본다면 크게 두 가지로 좁혀지는 듯하다. 여러 다른 이유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첫 번째 이유는 딸아이다. 결국 아이를 위해 시골로 들어왔다가 아이 때문에 다시 시골을 떠나게 된다. 떠날 계획이다. 생애에 한 번뿐인 고교생활을 위한 선택이다. 결국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 주고픈 부모의 결정이기도 하고, 아이의 바람을 존중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후론 성인이 되어버릴 테니까.
즉, 시골 북카페를 오래 유지하기 어려운 데에는 아이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가 크다. 자녀가 성인이 되어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기숙학교에 갈 수도 있다고, 아니면 근처 시골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은 이제 물거품이 되어 서서히 하늘로 흩날리는 중이다. 아이에게 부모의 손길과 도움이 필요하면 당연히 곁에 있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사라진 물거품이라고 너무 상심하지 않기로 하자.
그다음으로 시골 북카페를 운영하면서 느낀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수익을 내기에는 힘든 구조라는 것이다. 나름대로 힘쓰며 노력도 해 본 경험으로는 재정적인 든든한 뒷받침이 없이 오래도록 유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다시 말해, 젊은 날에 자산을 많이 쌓은 후에 직원도 채용해서 시간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누리면서 즐겁게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처럼 얼마 되지 않은 자산을 계속 쏟아붓고, 육체의 에너지까지 노동에 땀을 흘려야 하는 상황이라면 결코 녹록지 못한 현실에 심신이 지쳐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몸에 지닌 두 손과 두 발만으로는 정원과 텃밭 가꾸는 일부터 커피를 내리고 샌드위치를 만들며, 청소를 하고, 재료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겹겹이 쌓인 일들을 감당해 내기에 심히 어렵지 않겠는가? 마지막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리게 되리라고 자연스레 예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풀을 뽑고, 커피를 내리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독서모임을 하고, 샌드위치를 만들며, 꽃들과 채소를 돌보고, 중국 여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그 모든 일은 내게 말할 수 없는 행복을 주었다. 그러한 모든 소소한 기쁨들을 선물로 받았으니, 이 모든 시간들이 결코 실패로 끝나는 여정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해두고 싶다.
단지 나는 내가 이 시골북카페의 삶과 오래오래 동행할 수 없는 이유, 어쩌면 피치 못할 핑계를 풀어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내가 어디로 가든 꿈꾸는 정원은 나와 함께 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지니고 있다. 독서모임이든 한국어 수업이든, 커피를 내리고 샌드위치를 만드는 일, 그리고 꽃을 가꾸는 일들 까지도.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가르쳐달라는 중국 여성들이 줄을 서고 있다. 내 한 몸으로 여러 수업을 감당하기 어려워 그저 기다리라는 미안한 말을 남길 뿐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그 여성들이 사랑스럽고 예쁘다. 중국어 기초만 겨우 구사하는 내가 중국 여성들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서로가 중국어와 한국어를 번역기로 돌려가면서.
인도 사람들이나 방글라데시, 파키스탄과 스리랑카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될 거라는 나의 예상은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힌디어를 그런대로 구사할 수 있고, 영어로도 가르칠 수 있으니 훨씬 효과적으로 한국어 수업을 하게 되리라 여겼던 나의 생각과 아주 먼, 중국 여성들이 내 제자가 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꿈에서 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길을 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나는 그녀들이 좋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듯 신묘막측하기만 한 것을, 그래서 때론 두려움과 불안감을 몰고 오기도 하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오늘을 살아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