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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Feb 15. 2024

사랑은 돌고 돌아

명절이야기

까치설날, 즉 설 전날엔 시가에 간다.

어머님댁 근처에 도착하여 은행 ATM에서 현금을 인출해 준비한 봉투에 담다. 내가 은행에 간 사이에 남편은 근처 마트에서 과일을 샀다. 실하고 탐스러운 레드향 3박스. 설날 선물답게 보자기에 묶인 과일 박스를 차에 착착 싣고 시골집으로 향한다.


남편 나와 결혼하기 전까지 원가족과 30년 넘게 살아온 집이다. 그 집의 낡은 주방에서 어머님은 분주하다. 나물을 네댓 가지 만들어놓으시고 조기를 굽고 소고기뭇국을 끓여놓고 우리를 기다리신다. 아버님이 손녀들을 양쪽 무릎에 앉히고 행복에 겨워하시는 동안 나는 어머님에 계신 주방으로 가서 기웃거린다. 결혼하고 나서부터 명절은 결코 마냥 행복하지 않다. 대단한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피할 수 없는 의무감과 불편함, 미안함과 감사함 공기 중에 피로하게 떠다는 걸 감지한다.

-뭘 이렇게 많이 하셨어요 어머님.. 제가 밥 풀까요? 아, 국을 먼저 뜰까요?


밥솥 뚜껑을 열어 따뜻한 김을 맞으며 고슬고슬 지어진 밥을 그릇에 담는다. 남편은 거실에 차려놓은 상 위에 불판을 올리고 고기를 굽고 있다. 선홍색의 마블링이 훌륭한 소고기 갈빗살이다. 기실 서울사는 남편의 누나가 보내온 소고기 선물세트일 것이다. 시누이 연휴에 친정을 방문하는 일드물다. 우리는 일 년에 두 번 정도 - 아버님 생신, 어머님 생신 - 보는 사이랄까. 명절에 딸 대신 꼬박꼬박 배달되는 소고기를 부모님은 아들 내외에게 다 나눠주신다. 때마침 어머님이 우리가 가져온 과일을 열어보시고는 뭘 이런 걸 또 가져왔냐며, 정말 신선하고 맛있어 보인다며 약간 과장되게 기뻐하신다. 사위는 매번 소고기인데 며느리는 매번 과일이라 내 실망하신 건 아닐까. 뭔가 진 것 같은 이 기분.. 이 상황에 패배감이라니 난 가끔 내 자신이 어이가 없다.


아버님, 어머님, 그들의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 둘. 우리 여섯 식구는 밥상에 둘러앉아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식사를 한다. 제사도 안 지내는데 명절이라고 전 굽고 그러지 말자고 몇 년 전 어머님이 선언하셨다. 평생 자식만 바라보며 인내와 헌신의 삶을 살아온 그녀는 식사는 먹는 둥 마는 둥 손녀들에게 온통 시선을 집중하신다. 아이고 이쁘기도 하지 우리 공주들. 누굴 닮아서 요래요래 오목조목 안 이쁜 데가 없을까나. 어서 이리 와서 할미한테 뽀뽀 한번 더 해줘, 아이고 이렇게 좀 더 안고 있자, 우리 이쁜 손주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우리 공주들... 아이들을 보는 어머님의 눈은 말 그대로 하트뿅뿅이다. 나로서는 가히 신기할 정도이다. 자식에게 모든 걸 내어준 삶을 통과해 이제는 그 사랑이 손녀들에게로 건너왔다. 나는 받아본 적 없는 저 순순한 사랑을 남편은 온전히 받고 자랐을 테다. 음 그렇다고 내가 사랑을 못 받았다는 것은 아니고, 단지 어머님의 사랑 표현이 우주적 강도라면 내 엄마 아빠의 사랑 표현 방식은 어머님의 그것과 크게 달랐던 것일 뿐.


저녁상을 정리하고 나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집에 돌아온다. 내 집에서 자고 다음 날인 설날 아침에 다시 시가에 가는 것이다. 차로 25분 거리에 있는 이 집에 나는 하룻밤도 머문 적이 없다. 오래된 주택은 겨울에 웃풍이 심해 춥다며 어머님 우리를 굳이 집으로 돌려보내시는 까닭이다. 겨울 캠핑도 가는 마당에 하룻밤쯤 조금 춥게 자는 게 대수냐고 괜찮다고 너스레를 떨어도 어머님은 완강하시다. 화장실도 특히 추워서 며느리랑 공주들 힘들다고, 집에서 편하게 자고 내일 다시 오라신다. 우리 차로 1시간 30분 떨어진 나의 친정에서 한 달에 한 번 이상 2박 3일씩 머무는 걸 상기하면, 남편에게 왠지 모를 부채감이 든다.


설날 아침, 눈뜨자마자 아이들에게 한복을 입히고 조신하게 댕기머리를 땋아서 어머님댁에 갔다. 예상대로 어머님은 어제보다 한 톤 더 높은 목소리로 기뻐하며 손녀들을 반기셨다. 내 자식들을 이토록 귀여워할 사람은 이 세상에 유일무이하게 어머님일 것이. 나와 남편이 먼저 부모님께 세배를 하고, 아이들이 이어서 할머니 할아버지께 세배를 했다. 한복을 차려입은 손주들이 천진난만하게 절을 하는 것을 보는 조모부는 하염없이 흐뭇해했다.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쥐여주며 덕담을 하는 할아버지의 눈에서 선선한 기쁨을 본다. 나는 전날 두 분께 봉투를 드렸고 두 분은 다음 날 내 아이에게 돈을 주신다. 사랑은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인가 보다.





남편이 아버님과 함께 집 근처 산소에 다녀오고 나서, 우리는 친정으로 출발한다.

내 부모님은 이혼하여 따로 살고 있으므로 나는 친정이 두 곳이다. 예의 레드향을 3박스 구매한 이유이다. 우리는 거리가 가까운 아빠집으로 먼저 갔다. 차로 40분을 달려 그곳에 도착하니 남동생 가족이 이미 와 있. 아빠가 혼자 사는 적막한 집에 졸지에 9명이 북적거렸다. 암 투병 이후 염색을 그만둔 아빠의 머리는 눈을 맞은 듯 하얗다. 백발의 칠순인 아빠는 시골 큰집에서 모시는 제사에 참석했다가 이제 막 돌아왔노라며 양복을 입고 있었다. 자식 손주들이 우르르 세배를 하고 할아버지는 손주들에게 차례로 세뱃돈을 준다. 나이 순으로 차감되는 돈을 받자 철없는 담이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응? 엄마? 왜 언니는 두 개고 나는 한 개야!? 나는 어금니를 살짝 깨물며 세뱃돈은 어른이 주는 대로 받는 거란다 고 말해줬다. 염둥이의 끄러움은 언제나 내 몫이다.

  

좁은 주방에서 올케가 가져온 냉동 사골 국물과 내가 가져온 떡국떡을 콜라보로 떡국을 뚝딱 끓여냈다. 떡국이라는 걸 처음 만들어 본 우리 국물 맛을 보고는 오호라 하며 회심의 미소를 주고받았다. 사골 국물만 있으면 떡국이 되는구나. 사촌과 상봉한 아이들은 복층 다락을 우다다다 뛰어다녔고 노부와 그의 마흔에 접어든 딸, 사위, 그리고 삼십 대의 아들, 며느리는 아래층에서 무심히 과일을 먹으며 티브이를 보았다. 뉴스 채널에서는 어찌 저리 매년 똑같을까 싶은 설날 아침 풍경을 전했고, 우리는 노곤해각자의 피곤함을 감당했다. 엄마가 기다리고 있을 같아서 곧장 엄마집으로 가려고 했지만, 아빠가 손주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며 내일 아침에는 다 같이 공원에 산책을 가자 해서 결국 하루 머물기로 했다. 섭섭해할 엄마 얼굴이 떠올라서 내내 마음이 쓰였다.


다음날 아침 산책 후, 엄마집으로 이동했다.

시끌벅적한 연휴가 아직 이틀이나 남아있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충전이 되는 사람인지라 많은 사람들과 오랜 시간 함께 있으면 쉽게 피로감을 느낀다. 그게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어쨌거나 마지막 방문지가 엄마집이라 다행이다. 내게 가장 편하게 느껴지는 곳이니까. 역시나 엄마는 우리 두 식구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나물에 탕국, 조기구이, 갈비찜으로 상을 차렸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좋아하는 강원도식 김치 만두도 이미 다 빚어놓은 채였다. 어릴 적부터 먹어 온 익숙한 손맛에 미각세포들이 깨어나 말했다. 그래, 이 맛이야. 공깃밥을 두 그릇 해치우고 가장 조용한 방에 들어가서 낮잠을 잤다. 네 명의 어린이들이 와글거리는 덕분에 조용한 순간은 없었지만, 비로소 몸도 마음도 조금 내려놓고 쉴 수 있었다. 엄마가 빨래해 놓은 이부자리에서 좋은 냄새가 나서 향기로운 꿈을 꾸었다.


8명의 자식 손주를 먹여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힌 엄마를 혼자 일하게 둘 순 없었으므로 잠깐의 충전 후에 나도 주방에서 일을 거들었다. 사위는 설거지를 하고, 아들은 쌈채소를 씻어 다듬고, 며느리는 밑반찬을 세팅하고, 손주들 중 첫째인 보리는 밥상에 수저를 놓았다. 그렇게 우리는 이틀 동안 김치 만둣국, 갈비구이, 모둠 생선회(수산 시장에 가서 장만해 ), 삼겹살 김치찌개로 이어지는 메뉴를 부지런히 섭취했다. 역시 엄마집에 가면 배고플 틈이 없다. 평소에도 그러하지만 명절에는 조금 더 다채롭게 사육당하는 기분. 분명 평소보다 과식을 하는데, 희한하게도 엄마 음식은 소화가 잘돼서 다음 끼니를 또 가열하게 먹게 된다. 한 끼 정도는 나가서 외식하자고도 권유했지만 엄마는 단칼에 거절했다. 저 어린것들 다 데리고 식당가 봐야 눈치만 보인다며, 괜히 돈 내고 불편하게 먹지 말고 그저 집에서 더 맛있고 더 편하게 먹자며.


우리가 돌아갈 때 엄마는 남은 갈비와 나물과 다음날 아침에 후루룩 먹고 출근하라며 남은 국까지 바리바리 싸주었다. 내가 아는 한 엄마는 젊은 시절에 결코 요리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삼 남매를 키우며 매일 아침 도시락을 다섯 개씩 싸던 엄마는 늘 지쳐 보였다. 그땐 엄마도 직접 만두를 빚지 않았. 외할머니가 만들어 준 만두를 고스란히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만둣국을 끓여 줬었.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이 나이에 이렇게 요리하면 힘들지 않으냐고, 무리하지 마시라고. 엄마는 옛날엔 맨날 하니 힘들었는데 요즘엔 가끔 하니 재밌다며 활짝 웃었다. 나와 올케에게 애 키우느라 나날이 고생이 많다며, 여기 오면 그냥 해주는 것 맛있게 먹기만 하라고 했다.




나흘간의 연휴는 나를 소진시켰고 동시에 채웠다. 몸도 마음도 골고루 살찐 기분.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했지만 혼자 있었다면 필연적으로 겪었을 외로움은 느낄 새가 없었다. 살가운 며느리도 아니고 친구 같은 딸내미도 아닌 나는 부모님을 뵈러 가야 한다는 의무감에 짓눌리면서 막상 차려주는 음식을 넙죽 받아먹었다. 나도 부모가 되었지만 내 부모 앞에서는 자식으로서의 자아가 먼저 반응한다. 자식을 낳은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한 대代를 건너 다시 한 대로. 서로를 향한 복합적인 감정과 그 중심에 있는 사랑. 그 사랑 사무치게 애틋하다. 내 딸들도 나중에 이런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될까. 사랑은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 다시 스며든다는 이 기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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