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데뷔 서바이벌 <프로듀스 101>부터 힙합 서바이벌 <쇼미더머니>, 댄스 서바이벌 <스트릿 우먼 파이터>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수많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성공시켜 온 Mnet(이하 ‘엠넷’)이 지난 3월 1일부터 차세대 글로벌 밴드 결성을 위한 새로운 서바이벌 프로그램 <BAND PROJECT (가제)>의 지원자 모집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소식은 곧바로 국내 락 팬덤 사이에서 이목을 끌며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는데요. 이유는 바로 자격 요건 때문이었습니다. 지원 자격 항목의 첫 줄에 적힌 “2011년 1월 1일 이전에 출생한 남자”라는 항목이 여성 뮤지션을 정당한 근거 없이 배제하여 기회를 박탈한다는 것이죠.
그동안 엠넷에서 방영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중 참가자 성별 제한을 두지 않았던 <슈퍼스타 K>, <쇼미더머니>, <고등래퍼>, <그레이트 서울 인베이전>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개인전 포맷이거나, 처음부터 함께 지원한 팀이 최종 라운드까지 유지되어 '우승'으로 이어지는 구조였죠.
예외도 있었습니다. 2021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경우 방영 전 자체적으로 팀을 구성한, 혹은 이미 팀이나 레이블 형태로 집합해 있던 크루가 최종 라운드까지 유지되는 형태였습니다. 하지만 앞선 사례들과 달리 경연진의 성별이 여성으로 제한되었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으나 이는 앞서 TV조선에서 방영해 크게 흥행한 <미스트롯 시즌1>, <미스터트롯 시즌1>의 영향이거나, 또는 개성 강한 여성 댄서들의 ‘걸 크러쉬’와 ‘기싸움’ 요소를 기대하며 프로그램의 화제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이었을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여기서도 최종 목적지는 '우승'이었습니다.
한편 이번 논란을 부른 <밴드 프로젝트>처럼 처음부터 성별 제한을 설정하고 참가자를 모집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아이돌 데뷔 서바이벌의 원조, <프로듀스 101> 시리즈가 있는데요. 해당 시리즈의 신드롬급 흥행에 이어 줄지어 제작되었던 모든 아이돌 데뷔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이 참가 자격을 동성으로 제한한 바 있습니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우승'이 아닌 '데뷔'이며, 종영 이후 "엠넷 출신"이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을 일정 기간 이어가게 됩니다. 결국 엠넷은 앞으로 자신들이 단순 방송사 역할을 넘어 일종의 제작사 역할을 겸한 프로그램에 한해 성별 제한을 둔 것이라는 정리가 가능합니다. 성별을 제한했을 때 제작적 이점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그렇다면 이들의 판단에 작용한 바로 그 "제작적 이점"은 무엇이었을까요? <프로듀스 101>은 엠넷의 다른 서바이벌과 달리, 개인 단위로 지원한 참가자들 중 최종 라운드까지 생존한 이들을 모아 하나의 새로운 아이돌 팀을 결성하는 포맷입니다. 이때 멤버 전원을 동성으로 구성하는 것은 아이돌 업계의 일반적인 관행이고, 정확히는 코어 팬덤 결집에 유리한 전략입니다. '유사 연애'나 '커플링(Coupling)' 같은 아이돌 팬덤의 보편적 감정선을 공유함에 있어 동성 구성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은, 이제 업계는 물론 대중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만일 엠넷이 애당초 해당 프로그램을 기획한 목적이 데이식스(DAY6), QWER처럼 아이돌 양식을 따른 글로벌 밴드를 결성하려는 것이었다면 성별 제한 조건은 지금처럼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이돌 시장의 오랜 공식을 그저 따랐을 뿐이니까요. 실제 이 그룹들을 모티프로 기획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공개된 모집 공고 상의 정보만으로는 그러한 의도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습니다.
논란을 가속화한 부분은 엠넷이 해당 프로그램을 홍보하며 사용한 “밴드 붐은 온다”라는 문구입니다. 독특한 시제 사용으로 고유성을 갖는 이 문장의 출처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밴드의 음악을 플레이리스트 형식으로 구성해 업로드하는 한 유튜브 채널이었습니다. 이후 개설된 동명의 인스타그램 계정 '밴붐온(AoB)'이 2024년 4분기 진행한 ‘밴붐컵’을 통해 국내 락 팬덤을 결집시켰고, 그 결과 웬만한 인디 뮤지션을 뛰어넘는 8만 팔로워 규모의 몸집으로 성장하면서, 계정명인 “밴드 붐은 온다” 문장 자체가 ‘붐’이 된 것이죠.
2022년 무렵부터 인디 밴드 팬들 사이에서 소소히 주문처럼 외워지던 이 문구는 머지않아 현실이 되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집합 금지 조치의 완화 이후 여러 락 페스티벌이 전국 각지에서 재개되었고, 오랜만에 공연을 찾은 관객들의 뜨거운 열기, 그에 부응한 아티스트의 폭발적인 에너지, 무엇보다 락 음악의 정수인 꽉 찬 라이브 사운드가 시너지를 이뤄 실제 ‘밴드 붐’ 현상을 이끈 것인데요. 인디 밴드로서는 흔치 않게 대중음악 시상식인 <2023 멜론 뮤직 어워드> 무대에 오른 실리카겔이 주역으로서 이 현상을 증명합니다.
‘밴드 붐’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찾아왔습니다. 유다빈밴드, 터치드, 윤지영, 한로로 등 여성 및 혼성 밴드의 부상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죠. 꼭 성별이 아니더라도, 인디 밴드 씬은 이미 그 이름(Independent)에서부터 드러나다시피 ‘다양성’을 뿌리로 지속되고 확장되는 음악적 갈래입니다. 이러한 씬에 대한 팬덤의 애정과 자부심이 담긴 문구를 차용하면서도 자격 요건에 제한을 두는 모순을 보이니, 오랜 시간 인디 문화를 지켜온 이들로부터 거센 반발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결국 엠넷의 성별 제한이 정당했는지 부당했는지는 이들이 최종적으로 제작하고자 했던 팀의 방향성에 달려 있습니다. 데이식스나 QWER 같은 아이돌 밴드가 본래의 이상향이었다면, 이들의 결정에는 최소한의 합당한 근거가 생깁니다. 하지만 이 경우 모집 공고에서부터 “글로벌 팝 보이밴드” 내지 “아이돌 밴드” 결성 프로젝트임을 명시하고, “밴드 붐은 온다”라는 문구를 홍보에 사용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국내 락 팬덤도 해당 프로그램에 대해 당사자성을 갖고 감정을 소모할 이유가 없었겠죠.
만약 단순히 “요즘 ‘밴드 붐은 온다’라는 말이 유행이라더라”는 얕은 이해로 인디 뮤지션과 팬덤이 함께 공들여 일군 진짜 ‘밴드 붐’에 편승하려는 것이었다면, 이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문구를 처음 만들고 확산시킨 팬덤, 문구가 가리키는 씬의 문화를 충분히 조사하고 존중하지 못한 것이니까요. 이 경우에는 <슈퍼밴드 시즌2>의 사례에서처럼 논란이 된 자격 요건을 폐기하는 것만이 해답입니다.
엠넷의 <밴드 프로젝트>는 오는 5월 31일까지 참가자를 모집하며, 올 하반기 방영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과연 엠넷이 이번 논란을 상쇄할 만한 강력한 기획을 내놓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