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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 최 사카모토 Feb 08. 2024

잔여 시간을 알 수 없는 타이머가 눌리고 말았다

서문

그날 오후 나는 이대역 근처 카페에 앉아 언니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언니가 일방적으로 내 연락을 피하기 시작한 지는 이년 반 정도 되었다. 마지막이 될 줄 미처 몰랐던 통화를 끝으로 안부를 묻기는커녕 얼굴도 볼 수 없었다. 명절에 청주 미원에 있는 부모님 집을 방문할 때도 언니는 내가 가는 날짜를 꼭 피해서 갔다. 언니가 내년에 결혼한다는 소식 역시 얼마 전 미원에 내려갔을 때  전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여태 마음이 수선했다.

언니가 편지를 받든 안 받든, 읽든 말든 일단 속에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아이패드를 꺼내 메모장에 편지의 서두를 열 즈음, 문득 이번 설 연휴에 언니가 언제 미원을 방문하는지 확인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연락처에서 “토로”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토로”는 어릴 때부터 언니와 내가 아빠를 부르던 별명이다. 한창 살이 쪄서 배가 불룩해진 아빠가 이웃집 토토로를 닮아서 그랬거나, 아빠가 좋아하는 참치 뱃살 부위인 오도로에서 시작됐거나, 혹은 둘 다이거나. 어쨌거나 아빠가 은퇴하기 전부터 쓰던 핸드폰 번호는 토로라는 이름으로 내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다. 엄마 아빠가 사는 미원 집에 집 전화는 없다. 원거리에서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인 토로 핸드폰에 전화를 걸면 엄마 아빠 둘 중 한 명이 랜덤으로 전화를 받는다. 그날은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안부 인사로 시작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아빠 이야기가 나왔다. 아빠는 그때 텃밭에 있었는데, 엄마는 아빠가 요새 이상하다고 했다. 우리 집 텃밭 옆 대추밭 주인에게 화났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끊임없이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최근 미원에 갔을 때 나도 내내 아빠에게 같은 얘기를 들었다. 아빠는 엄마 몰래 내게 일본어로 쓴 쪽지를 쥐여주었는데, 거기에는 대추밭 주인이 엄마 아빠에게 행한 무례와 횡포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아빠는 그걸 한국어로 번역해 달라고 했다. 대추밭 주인의 행실을 밝힌 내용을 인쇄물로 만들어 동네방네 뿌려, 대추밭 주인이 아주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게 해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갈등했다. 아빠가 쓴 쪽지를 읽었을 때는 당연히 너무 속상하고 괘씸했다. 대추밭 주인이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아 엄마에게 고함치고 윽박질렀다는 대목에서는 속에서 천불이 났다. 상황을 뒤늦게 알아챈 아빠가 한국말로 따지지도 못하고 씩씩거리기만 했을 걸 생각하면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놈 얼굴이라도 마주치는 날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쪽지에 적힌 대로 대추밭 주인이 막무가내에 고약한 성질머리라면, 아빠가 하려는 일이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에 하나 해코지하기라도 하면.... 아빠는 누구와 싸우기엔 작고 힘없고 몸이 아픈 노인이다. 나라고 해서 사정이 별반 다르지는 않다.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꼴로 시골집에 방문하는 왜소한 20대 여자일 뿐이다.


오히려 사건의 당사자인 엄마는 아빠를 극구 말렸다. 엄마는 갈등을 무조건적으로 피하고 싶고, 노년을 시골에서 조용히 보내다 가고 싶을 뿐인, 동일하게 작고 힘없고 마음을 앓는 노인이다. 엄마는 여태껏 웬만한 일을 당하더라도 혼자 속앓이 하고 삭힐 뿐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 엄마가 삶의 전반에 걸쳐 그러한 태도를 품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엄마의 태도는 결과적으로 엄마의 정신증을 악화시켰다. 십 년 넘게 약물을 장기 복용하며 증상을 누르고 있는 있는 지금도 종종 가장 만만한 상대인 가족에게로 불똥이 튄다.


완벽하게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알 수 없어진 나는 한동안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다. 결국 나는 아빠 편을 들기로 했다. 아빠가 건넨 일어 쪽지를 번역하고, 아빠가 보내준 사진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글자 크기와 굵기와 색깔을 중간중간 바꿔가며, 이걸 본 사람이라면 무조건 대추밭 주인이 천하의 개새끼라고 생각하게끔 최선을 다해 인쇄물을 만들었다.


아빠는 일본에서 수학과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을 운영하는 선생님이었다. 계획에 없이 한국으로 이민 왔던 처음에는 이모네 일을 돕고, 그다음엔 건축 일용직으로 근무하다가, 본래의 특기를 살려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학생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 일을 하게 됐다. 가족들도 일본어를 할 줄 알다 보니 자연스레 한국어를 배울 명분이나 기회가 줄었다. 한국으로 넘어왔을 때 이미 오십이 넘은 고령이었다는 점도, 아빠가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기에 걸림돌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빠는 한국에 거주한 지 이십 년이 되어가는 여태까지도 한국말을 듣기만 할 뿐 잘 말하지 못한다.

거주하는 국가의 주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은 삶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한다. 아빠는 지금까지 한국말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부당한 일을 숱하게 겪으며 한이 쌓였을 것이다. 오죽하면 한두 달에 한 번꼴로 만나는 딸을 볼 때마다 같은 얘기를 반복하겠는가. 아빠가 인쇄물을 정말로 동네에 뿌리든 뿌리지 않든, 아빠 편을 들어준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게 아빠의 마음을 풀어주는 유일한 방법 같았다.


나는 완성한 인쇄물을 아빠에게 쓴 편지인 척 봉투에 넣고, 꼭 아빠만 보라고 엄포를 놓은 뒤, 한 달에 한 번씩 보내는 견과류 세트와 함께 소포를 보냈다. 그런지 벌써 두 달이 되어가는데.... 엄마와 아빠는 여태 그 일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엄마는 아빠가 불같이 화를 내며 같은 얘길 반복하는 게 지겨워서, 최근에는 대화도 잘 안 했다고 한다. 엄마가 본인은 물론 다른 가족 구성원의 감정적 고통을 철저히 억압한다는 사실을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빠가 화내는 것도 싫고 대추밭 주인도 무서운 엄마 마음을 이해한다고 달래면서도 아빠의 심정도 조금은 이해해 주면 어떻겠냐는 식으로 권했다. 그때였다.


“어? 잠깐만. 아빠가 지금 쓰러진 것 같은데...!”


창문을 통해 아빠의 모습을 내다본 엄마가 말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2024년 2월 6일 화요일 오후 4시경, 아빠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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