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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 최 사카모토 Feb 12. 2024

지옥의 시작, 섬망증

두 번째 기록

아빠의 섬망 증세를 처음 목격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지금의 상태가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공감 능력이 높은 나에게 섬망 증세로 미칠 듯이 괴로워하는 아빠의 모습은 감당할 수 없는 자극이었기에,

이를 본 목요일 저녁부터 토요일까지 약 3일간 정신이 거의 붕괴되어 있었다.

그나마 나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여기까지 회복하게 된 것은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펴주고 버팀목이 되어준 절친한 친구인 O의 도움 덕분이다.

그리고 멀리서나마 진심 어린 위로와 응원, 도움을 준 H와 Y와 J에게도 이 글을 빌어 깊은 감사를 전한다.

다음은 끔찍했던 그날의 기록이다.

 

2월 8일 목요일. 오전 면회를 마치고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다 병원 근처 무인텔로 향했다. 약간의 꿉꿉함, 때때로 창문 혹은 화장실 환풍기로 흘러 들어오는 담배냄새, 갑 티슈에 민망하리만큼 대놓고 적힌 “출장 마사지”가 거슬렸던 것 빼고는 예상보다 넓고 쾌적한 방이었다. 전날 집에서 제대로 씻지도 편히 잠을 청하지도 못했기에 방에 들어서자마자 샤워를 하고 낮잠을 잤다.

병원에 들어갈 때는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아빠가 볼 수 있는 나의 모습이라곤 패딩으로 꽁꽁 싸맨 몸뚱이와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 그리고 머리카락. 저녁 면회를 가기 위해 비교적 여유롭게 준비 중이던 나는 비장의 무기인 “높게 묶은 똥머리” 카드를 꺼내 들었다.

나에게 높게 묶은 똥머리란 무엇인가. 묶는 과정이 조금 번거롭고 귀찮지만 그 효과는 굉장하다. 작은 나의 키가 살짝 연장된 듯한 착시를 주는 동시에 앞 뒷 옆머리 모두 피부에 닿지 않는다는 점이 묘하게 기분이 업되어 자신감마저 올라가게 하는 일종의 전투 복장인 것이다.(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전투 복장으로 무장하고 호기롭게 아빠의 병원으로 향한다. 숙소에서 병원까지는 걸어서 30분이 조금 안되었는데, 최소한의 짐만 챙겨 무심천을 바라보며 몸의 감각에 집중해 걷는 것이 퍽 기분 좋았다. 이 기세로 아빠에게 좋은 에너지를 많이 주고 와야지.

그런데 병원이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공허감에 휩싸였다. 역시 머리만 묶는다고 좋아질 일은 아닌가. 오늘은 면회를 마치고 분위기 좋은 바에서 술 한잔 할까. 아니면 방에서 하이볼 한 캔 마시며 좋아하는 영화나 볼까. 매점에서 핫팩을 사 중환자실 앞에서 대기하는데 극도의 불안감이 몰려왔다. 큰일 났다. 공황이 올 것 같아. 내 상황을 알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돌렸다. 나 지금 아빠 만나러 가야 되는데 불안해서 미치겠어. 다른 생각 들게 아무 얘기나 해줘. 약 10분간 J의 다이어트 이야기로 의식을 돌렸다. 이윽고 면회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27번 출입증을 목에 걸고 중환자실에 들어섰다. 아빠는 걸어오는 나를 보자 껌뻑이던 눈을 부릅 떴다. 입모양으로 힘주어 말했다.

「めし。」

밥.

뇌출혈 환자가 중환자실에서 어떤 치료를 받는지 무지했던 나는, 밥  못 먹었어? 물어볼게 기다려.라고 아빠를 안심시키고 간호사에게 아빠가 밥을 언제 드셨는지, 못 드셨다면 언제쯤 드실 수 있는지 물었다. 중환자실 치료는 기본이 금식이에요. 지금 연하작용이 잘 안 돼서 내일 급식 시도 해 보고 안되면 콧줄 꽂아야 돼요. 잘못하면 흡인성 폐렴이 올 수 있어요.

아빠가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조차 알아보지 않았던 나의 무지와 무신경에도 놀랐지만 다음 날까지 거의 3일을 굶어야 하는 아빠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를 보자마자 밥 이야기부터 꺼낼 정도로 배가 고플 텐데. 아빠. 지금은 치료 때문에 금식해야 한대. 오늘은 안되고 내일 밥 먹는 걸 시도해본대.

「おかしい。そんなのおかしい。」

이상해. 그런 건 이상해.

병원에서 봤던 모습 중 가장 힘 있게 아빠는 말하려고 애썼다. 나는 화가 난 듯한 아빠를 달랬다. 여태 아무것도 못 먹었구나. 배 고프지. 근데 지금은 안된대. 내일 먹을 수 있을 거야.

「おかしい。こいつら全部おかしい。何かする気だ。ここから出る。」

이상해. 이 녀석들 전부 이상해. 뭔가 할 셈이야. 여기서 나갈 거야.

어눌한 발음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아빠는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낙상 방지용으로 설치된 안전바를 붙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상해. 이상해. 그런 건 이상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아침까지는 내 말을 다 알아듣고 웃기까지 할 만큼 인지능력에 이상이 없었는데. 아침보다 에너지는 있어 보이지만 그 사이에 이렇게 변할 만큼 불합리한 일을 겪은 건가? 일본인이라서 다들 아빠의 말을 못 알아들어서 그랬나? 아니면 밥을 못 먹어서 인내력이 한계에 다한 걸까? 간호사에게 아빠의 상태를 설명하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데 날더러 진정하라고 한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빠를 안으며 진정시켰다. 아빠 무리하면 안 돼. 혈압 높아지잖아. 일단 진정하자. 혈압이 높아지면 위험해. 미안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미안해...

얼굴이 벌게질 때까지 힘을 주어도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자 잔뜩 찌푸린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눈 앞머리에는 고름인지 눈곱인지 모를 것이 꼈다. 휴지로 닦아내며 생각한다. 이게 맞는 거야? 아빠의 공포와 혼란과 고통이 너무도 생생하게 전해진다. 아는 얼굴을 볼 수 있는 면회 시간은 하루 24시간 중 고작 한 시간인데, 나머지 23시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며 홀로 견뎌야 한다고?

튀어나올 듯한 눈으로, 아빠는 유일하게 당신 편이 되어줄 나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아. 그때 나는 내가 한계를 넘어선 정신적 충격을 겪고 있음을 감지했다.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공포와 무력감과 죄책감이 몸을 휘감는다.

도망치고 싶다.

면회 종료까지 앞으로 10분. 견뎌야 해. 버텨야 해. 제풀에 지쳐 힘없이 누운 채 눈물 흘리는 아빠를 보니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붙잡은 손에 얼굴을 기댄 채 울었다. 미안해. 미안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미안해... 이제 곧 가야 해. 내일 또 올게. 미안해.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온갖 감정을 처리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다. 의식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은 나머지 자해충동이 미친 듯이 일었다. 중환자실을 나오자마자 O에게 전화를 걸었다. 횡설수설하며 주체할 수 없이 주저앉아 울었다. O는 서울에서 청주까지 오겠다고 했다. 이성을 붙잡고 티켓을 끊어 보냈다. 그래... O가 오면 나를 도와줄 거야. 그때까지만 견디자. 걸을 힘이 생긴 즉시 병원을 빠져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그 길에 과자 한 봉지를 사서 우걱우걱 집어먹었다. 정신적 충격에 매몰되어 있던 의식이 저작 운동과 치아의 감각으로 넘어갔다가 과자가 맛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즈음엔 이미 과자는 바닥을 보였다.

터미널 의자에 앉아 하이볼 한 캔과 다른(맛있는) 과자를 사서 먹으며 영화를 본다. 빠른 데이터 얼마 안 남았는데. 에이 몰라.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술기운 때문인지 영화가 재미있어서인지 다행히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나기 조금 전 O를 만날 수 있었고 택시를 타고 내가 묵는 방에 도착했다. 세수와 양치를 하고 영화를 마저 보다가 무슨 장면인지 기억도 안나는 대목에서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줄줄 눈물이 흘렀다. 소파에서 울다가 힘이 빠진 나는 침대로 자리를 옮겨 울었다. O가 말한다. 울어도 돼. 더 울어도 돼. 마음껏 울어도 돼. O의 말에 기대어 엉엉 울었다.

그만해. 제발 그만해. 위장에 쥐어짜는 통증이 느껴진다.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짓이겨지는 기분이 얼마만이더라. 나의 노력은 한낱 먼지처럼 휩쓸려 날아가고 우르르 산사태가 몰려온다. 와르르 쏟아진다. 덮친다. 비웃기라도 하듯. 너무나도 손쉽게. 나는 무너진다.

베갯잇이 눈물과 침으로 범벅이 되었고 높게 묶은 똥머리는 볼품없이 헝클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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