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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 최 사카모토 Feb 15. 2024

설 연휴에 생긴 일

세 번째 기록

2월 9일 새벽. 병원 근처의 무인텔.

울다 지쳐 선잠에 들었다가 악몽을 꾸며 깼다. 눈을 감으면 괴로워하는 아빠의 모습이 반복 재생되고 현실로 돌아오면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이 몰려온다. 내가 왜 그랬지. 아빠를 안심시켰어야 하는데. 나까지 감정적으로 동화되어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말았다. 내가 병실을 떠난 뒤 혼자 남겨진 시간 동안 얼마나 더 끔찍하게 무서웠을까. 지금도 뜬눈으로 지새우는 건 아닐까. 그렇게 자책의 쳇바퀴를 돌던 의식이 육체로 복귀해 <나>의 감정을 인지하는 순간 한계를 넘어선 스트레스에 숨이 턱 막힌다.

내일이 두렵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두렵다. 당분간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편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살리려고 서울에서 청주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절친한 친구 O가 자고 있는 옆에서 핸드폰 메모장에 유서 앞머리를 썼다.

O에게

내가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O,

동생 같기도 언니 같기도 엄마 같기도 한 O야.

미안해. 네가 너무 소중해서, 너에게 의존하고 감정적으로 쏟아내며 우리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도, 안 그래도 빠듯한 너의 삶을 더 힘들게 하고 싶지도 않아. ...

핸드폰을 붙들고 숨죽여 울고 있는데 O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유미야 자? 아니... 있잖아. 나 아침 면회 가기 무서워. 엄마 혼자 갔다 오라고 할까? 응, 그래도 되지. 힘들면 안 가도 돼. 근데 너는 뭐에 놀라 깬 거야? 아... 네가 자해하는 꿈을 꿨어. ...미안해. 네 앞에서는 그럴 일 없어. 절대로 안 그럴게. 내가 미안해...

그 뒤로 잠깐 눈을 붙였던가. 퉁퉁 부은 눈에 안경을 끼고 기어이 면회를 가기로 한다. 태양 경배 자세를 세 번 했다. 쪼그라들어있던 명치가 업독 자세에서 펼쳐지며 피가 조금 도는 것 같다.

이때까지도 <섬망증>에 대해 몰랐던 나는 아빠에게 치매가 온 것인지 의심했다. 검색해 보니 고혈압 환자 중에는 뇌출혈 이후 치매나 알츠하이머가 발병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래... 만약 치매라고 해도 뭐 어쩌겠어. 지금의 고통과 고민은 자연스러운 건지 몰라. 그냥 조금 일찍 겪는 것뿐이지. 가장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을 아빠가 버티고 있는데 내가 벌써 포기할 순 없어. 으스러질 때까지 버텨야지. 어제는 처음 보는 아빠의 모습에 너무 놀랐던 거야. 이제 알고 있으니까 오늘은 조금 나을 거야. 물론... 여전히 무섭지만 그래도 뭐 어떡해.

오늘 가면 아빠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나를 알아보는지 확인해야지. 3일 전 뇌출혈로 쓰러져 여기에 있는 거라고 알려줘야지. 낯선 환경이 두려울 테니 최대한 안심시켜 줘야지. 그리고 진정이 좀 되면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줘야지.

위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이 쿡쿡 쑤신다.

아침 9시. 중환자실 앞에서 엄마를 만났다. 어제 아빠의 상태가 이상했다고 알려주었다. 이런 증상을 보거나 설명을 들은 적 있는지 물었으나 그런 바 없다고 했다.

먼저 면회를 가겠다고 자처했다. 아빠의 이상 증세를 내가 먼저 봤으니 엄마를 만나기 전까지 조금 더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당황하지 말고 계획대로. 계획대로만 하자.

눈을 감고 호흡하며 요동치는 심장을 달래고 자꾸만 도망가려는 의식을 붙든다. 중환자실에 들어선다. 아빠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부라린다. 기세에 밀리면 안 돼.

あなたの名前は何ですか?私のことがわかりますか?

당신의 이름은 뭐예요? 나를 알아보겠어요?

わかる!わかる!

알아! 알아!

あなたの名前は?

당신의 이름은요?

わかる

알아!

あなたが坂本昇さんだって知ってます?

당신이 사카모토 노보루 씨인 거 알아요?

わかる!

알아!

私が娘たってわかるの?

내가 딸인 거 알아요?

わかるよ!

안다고!

あなたは脳出血で倒れてここえ…

당신은 뇌출혈로 쓰러져서 여기에...

おかしい!おかしいよ!

이상해! 이상하다고!

글렀다.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다. 주변을 배회하는 간호사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아빠가 어제저녁부터 상태가 이상해요.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인지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데. 갑자기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여기가 이상하다는 말을 반복해요. 혹시 치매가 온 건 아닐까요? 아아- 중환자실이 불도 안 꺼지고, 기계 소리도 계속 나고 해서 섬망증이 올 수 있어요. 섬망증이요? 네- 섬망 증세로 약간 헛소리 같은 말을 하기도 하거든요.


그런 건 왜 진작 말 안 해줬어요?ㅡ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이 사람이 이렇게 차분할 수 있는 건 일본어를 못 알아들어서인가.

이빠가 너무 힘들어하는데 어떡하죠? 여기서 나가고 싶어 하세요. 중환자실 말고 불이 꺼지는 병실로 옮길 순 없나요? 그러면 의사 선생님하고 면담해보시겠어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주치의 면담을 위해 엄마도 병실로 들어왔다. 나는 흥분한 아빠를 달래기 급급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은데 의사가 도통 이쪽으로 오질 않는다. 선생님. 여기요. 모니터 앞에 앉아 꿈쩍 않는 의사. 못 들은 건가? 잠시 뒤에 날더러 이쪽으로 오라 손짓한다.

아니 내가 다 설명하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조급하게 굴어요?

  

-라고,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다그친다.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아빠가 어제부터 저 지경이고, 일본 말이라 아무도 못 알아듣고, 섬망증에 대해서는 한 마디 들은 적도 없는데. 내가 좀 놀라고 당황해서 조급하게 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울컥 억울한 마음이 든다. 감정을 최대한 누르고 뱉은 한 마디.

선생님, 제 심정도 좀 이해해 주세요.

그러니까 내가 설명하려고 하잖아요 지금!

이번엔 거의 소리 지르다시피 하며 펜으로 모니터를 거세게 친다. 아. 머리에 피가 쏠린다. 테이블에 있는 뭐라도 집어던져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다. 엄마가 부드러운 말로 의사를 어르고 달래자 한껏 치솟았던 언성이 차츰 보통의 데시벨 범주로 돌아간다.

따님이 보시기에 아빠가 어떠신 거 같은데요. 아빠가 어제부터 여기가 이상하다고, 나가고 싶다고 반복해서 말하면서 너무 힘들어하세요. 일본인이라 말이 안 통하기도 하고, 중환자실에 있는 스트레스가 심한 것 같아요. 간호 병동이나 다른 병실로 옮길 수는 없나요?라고 엄마가 물었다. 그러면 보호자분이 환자 돌볼 거예요? 의사는 독특한 화법을 썼다.

 

의사가 입원 첫날과 3일 뒤인 당일 새벽에 찍은 CT 결과를 비교하며 설명한다. 지금 따님은 정신적인 부분을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보는 것은 그것보다는. 뇌 속 혈액이 흡수되고 있는지, 폐렴이 호전되고 있는지인데요. 첫째 날과 비교해 보면 출혈 부위 혈액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어요. 근데 지금 사진을 보면 폐렴이 심해요. 산소 수치도 낮아서 산소 호흡기를 하고 있는데. 자가호흡이 되니까 아직 인공호흡기까진 하지 않았지만,

호흡이 잘 안 되면 연휴 기간 내에 갑자기 돌아가실 수도 있는 거예요.

라는 말을 남기고 의사는 모니터 앞을 떠났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아휴- 신음 섞인 한숨을 내뱉고 엄마는 아빠의 병상으로 갔지만 나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빠는 두려움과 혼란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있다. 엄마가 아빠 몸을 힘 있게 두드리며 말한다. 당신 낫게 해 주려고 여기 있는 거야! 이상한 데 아니야! 걱정하지 마! 가족들이 있으니까! 괜찮아! 호흡 잘하고! 호흡 잘해야 낫는다잖아! 엄마 목소리가 너무 커서 놀란 건지,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해 단념한 건지 아빠는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조용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할 힘이 없었기에 차라리 엄마가 그렇게라도 해주는 게 고마웠다.

아버님이 일본분이세요? 간호사가 처음 듣는다는 듯이 묻는다. 네. 분명 실려왔을 때 다 설명했을 텐데요ㅡ라는 말은 역시 속으로 삼켰다. 아버님이 일본분이라 저희 말을 못 알아듣고 하셔서 더 그러셨을 수도 있겠어요. 다음부턴 될 수 있으면 파파고라도 써볼게요. 감사합니다.

-

O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강변역 근처 보리밥집을 갔다. 뚝배기에 끓인 청국장과 밑반찬으로 나온 마늘종 무침이 참 맛있다. 야 그래도 서울 오니까 마음이 좀 편하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니까 마음도 좀 괜찮은 거 같아. 여느 때처럼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대화를 주고받다 사뭇 O가 진지하게 말한다.

나는 네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차마 살아있어 달라는 말을 못 하겠어. 너에게 어떤 게 나은건지 모르겠어.

눈물을 닦는 O를 보며 생각한다. 나의 고난에 보상이 있다면 그건 너 아닐까. 이런 삶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우연히 만나 이토록 깊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고마운 마음과 동시에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게 만들어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든다. O 또한 나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되어, 얼마나 커다란 무력감과 죄책감에 짓눌리고 있을까. 간병인의 간병인. 나의 나약함이, 카르마가 주변에 아픔을 대물림하는구나.

다음 날 알바를 하다 위경련이 났다. 저혈당 쇼크로 쓰러진 지 일주일 만의 일이다. 아아. 일하는 곳에는 절대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웬만해선 먹지 않는 진정제와 진경제를 입안에 털어 넣는다.

부디 남은 연휴 기간 무탈하게 지나기를.

아빠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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