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기록
2024년 5월 28일 화요일
청년 주택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스마트키를 이용해 경적을 울리고 렌트 차량에 몸을 싣는 과정이 조금 익숙해졌다. 오늘로써 세 번째, 카셰어링 서비스를 이용해 차를 빌려 청주까지 왕복한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차츰 상태가 안정된 아빠는 청주 모 병원 공동 간병 6인실에 입원해 있다. 입원 기간은 어느덧 4개월 차.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뇌출혈로 인해 우측 편마비와 언어장애, 연하곤란을 겪는 아빠는 중환자실에서 섬망 증세를 겪으며 괴로워하다가, 조금 상태가 호전되어 일반실로 옮겨졌다가, 폐렴이 악화되어 고열을 내며 다시 중환자실에 갔다가, 또다시 일반 병실로 옮겨져, 당신이 누구이고 왜 여기 있는지 기억하는 날도 기억하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그동안 나는 아르바이트하고, 촬영하고, 아빠를 보러 가고. 또 아르바이트하고, 촬영하고, 아빠를 보러 갔다. 꾸준한 노력으로 관리해온 허리가 다시 아파지기 시작했다. 냉장고에는 식재료가 아닌 소주가 채워지고, 원룸 바닥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옷가지가 널브러져 있고, 밀린 빨래는 샤워 후 몸을 닦을 수건이 없어지면 등 떠밀려 겨우 했다. 살아있는 게 아니라 죽지 않고 있는 상태. 정신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있다는 것을 느끼는 날이 많았다.
아빠의 병세에 따라 나의 정신 상태도 오락가락하다 보니 아빠보다 오래 살기 위해서라도 삶을 잘 운영해야 함을 여실히 느꼈다. 이제부터의 간병은 장기전이다. 삶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죄책감에 괴로워하지 않을 만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주일에 꼭 한 번.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 아빠를 보러 가겠다는 다짐은 서울에서의 삶이 버겁다는 이유로 번번이 무너졌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채로 그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날이면 괴로움과 죄책감에 짓눌린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예민한 몸과 맘을 만 25년간 데리고 살다 보니 윽박지르고 채찍질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을 알았다. 자꾸만 무너지는 모래성 같은 나를 어르고 달래 일으켜 세워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았다.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 어디에서 에너지를 줄일 수 있을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래. 아빠의 병원에 가기까지의 장벽을 낮춰야겠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대중교통 이용에 수반되는 불편을 해소하는 일 같았다.
여태껏 병원으로 가는 방법은 이랬다. 먼저 최소 하루 전날 티머니 GO 앱을 통해 고속버스 티켓을 예매한다. 돌아오는 차편이 있어야 하기에 되도록 아침 시간이 좋다. 명절이나 연휴가 끼어 있거나 운이 나쁘면 수요가 많은 시간대는 일찍 매진되기도 한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센트럴시티 터미널에서 타는 버스의 좌석이 편안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센트럴 시티 터미널에서 병원과 가장 가까운 종착지인 청주대 정류소까지 가는 버스를 주로 탔다. 정류소에서 내려 조금 걸으면 병원까지 가는 시내버스를 탈 수 있다. 그렇게 집에서부터 병원까지 가는 데 편도 약 3시간. 차가 막히거나 버스를 놓치면 그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돌아오는 티켓은 미리 예매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시간에 맞춰서 구매하곤 했는데, 저녁 시간대 버스는 배차 간격이 더 길다. 까딱 잘못하면 한밤중이 되어서나 집에 돌아올 수 있다.
대중교통은 말 그대로 “대중” 교통이기에 키 155에 허리디스크 관리 8년 차에 멀미까지 심한 여자에게 맞추지 않는다. 조수석에라도 타지 않는 이상 차량으로 장시간 이동할 때 멀미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잠을 자야만 한다. 이때 키가 작은 나는 허리가 등받이에서 떨어지거나 발이 땅에 닿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데, 그렇게 약 2시간을 지나 보내고 나면 허리와 무릎과 발목이 쿡쿡 쑤시고 시큰거린다.
일정표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날이 하루 이틀 다가올수록 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날은 청주에 가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가기 전날 밤에는 가야 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빨리 지나 보내기 위해 술을 마신다. 발이 닿지 않는 버스에서 잠들기 위해서는 피곤한 편이 낫기도 하다. 운이 나쁘게 종착지 전에 잠에서 깨면, 내내 이어폰을 꽂고 음악으로 나를 달랜다. 아우성치는 몸과 마음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고막을 때리는 진동에 집중한다. 그러다 병실에 들어서 아빠 얼굴을 보는 순간 나를 속이게 된다. 웃으며 일상 얘길 재잘거리고, 손발을 닦아주고, 팩을 하고, 귓밥을 파거나 손톱을 깎아준다. 그러고는 병실을 나오자마자 이어폰을 꽂는다. 발이 닿지 않는 버스를 타고 억지로 잠을 청한다. 서울에 돌아오면 혼자라는 사실을 잊게 할 누군가를 찾는다. 술을 마신다.
그만. 다른 자원을 투자해서라도 나를 조금 더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 그렇게 생각해 낸 것이 운전이었다. 학원이 아닌 드라이빙 존에서 시뮬레이션으로 익힌 운전에 자신이 없어 2년간 지갑 속에만 고이 모시고 다니던 운전면허를 쓸 때가 온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10시간의 운전 연수를 채 마치기도 전에 차량을 빌려 혼자 청주로 떠났다.
처음 고속도로 위에 나를 내던졌을 때는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게도, 정말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 닥치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되는 게 있더라. 역시 나는 아직 살고 싶은 모양이다. 게다가 예상치도 못한 수확이 있었다. 운전이 상상 이상으로 즐거운 것이다. 차 문을 닫고 도로에 나가는 순간 나는 왜소한 동양인 여자가 아니라 한 대의 차량이다. 그 사실이 어떤 해방감을 주었다. 나는 도로 위 뻔뻔한 내 모습이 좋았다. 뒤에서 재촉하는 경적이 울려도, “꼬우면 앞질러 가시든가”를 시전하며 평정심을 잃지 않고 감당 가능한 만큼만 액셀을 밟았다. 아직은 초보이니만큼 어떻게 하면 더 일찍 도착할지 보다는 세부 사항을 고민한다. 이를테면 과속 방지턱을 넘거나 코너를 돌 때, 혹은 브레이크를 점진적으로 밟으며 정차할 때 매번 조금 더 신경 쓸 뿐이다. 다이소에서 산 천 원짜리 자석형 초보 운전 딱지를 차량 뒤편과 오른편에 각각 붙이고,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고(종종 따라 부르고), 내비게이션 화면과 안내 음성에 집중하며, 이따금 뻥 뚫린 정면 창으로 보이는 하늘과 꽃과 나무를 감상하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다.
아빠의 침대는 창가에 있다. 귓밥을 파고 손을 씻겨주느라 침대 양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데 왼편으로 갈 때마다 옆 침대에 누운 아저씨가 등허리 쪽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병상에 누워 말도 할 수 없이 가까스로 손만 움직일 수 있는 당신이 안쓰럽지만, 그게 원치 않는 접촉에 관대할 명분이 되진 않는데. 아빠를 앞에 두고도 신경이 곤두섰다. 아빠는 섬망이 왔을 때도 꼭 아는 얼굴이 보여야만 입을 열었고 제 코에 꽂힌 튜브와 침대 난간에만 손을 댔는데. 새삼스레 아빠의 성품과 인내력에 감탄했다. 내가 슥 자리를 피하자 그의 손은 허공을 맴돌았다. 개의치 않고 아빠의 침대와 창가 사이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서랍에서 노트와 볼펜을 꺼내 방명록을 적다 문득 고개를 들자 아빠의 손이 그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아. 아빠는 참 따뜻한 사람이구나. 나의 여유 없음이 조금 부끄러웠다.
아빠의 뇌를 어떻게 활성화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운전하며 떠올린 색깔 연상 퀴즈를 아빠에게 내기로 했다.
バナナ(바나나)
リンゴ(사과)
イチゴ(딸기)
レモン(레몬)
노트에 가타카나를 적고 아빠에게 보여주며 같은 색깔의 과일끼리 연결해 보라고 했다. 내가 생각한 정답은 같은 노란색인 바나나와 레몬, 같은 빨간 색인 사과와 딸기를 잇는 것이었다. 쉬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아빠는 한참을 고민했다. 아 참, 여기에서 사과는 아오리(초록색을 띠는 일본 품종의 풋사과)가 아니야. 하자 아오리가 아니야? 한다. 결국 아빠가 연결한 것은 사과와 딸기였다. 바나나와 레몬은 잇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 같은 노란색이라고 생각한 내가 어설펐는지도 모른다. 바나나는 바나나색이고 레몬은 레몬색이다. 사과는 사과색이고 딸기는 딸기색이다. 애초에 답이 없는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아빠는 여전히 나에게 선생님이구나.
다음번에는 어떤 문제를 내면 좋을지 고민하는 흰색 레이 차량이 고속도로를 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