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퍼즐
주민등록 초본을 떼면 한국에서의 출생 등록일이 2003년 11월 21일로 찍혀있다. 아마도 일본에서 태어난 내가 한국으로 이민 왔을 때, 국적 취득을 위해 출생 신고가 이루어진 모양이다. 신고는 그때 이루어졌지만 실제로 한국에 살았던 것은 조금 더 이전부터였다고 어렴풋이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나는 그 기록과 가족에게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일어난 엄마의 방화 사건을 2001년에서 2003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엄마가 집에 불을 질렀던 표면적인 원인은 엄마의 <정신병>이다. 한국인인 엄마가 일본에서 그런 일을 저질렀을 때 어떤 조치가 취해졌는지는 가족에게도 정확히 들은 바가 없다.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엄마는 한국의 모 정신병원에서 <조현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지만, 나는 엄마의 최초의 병은 훨씬 오래전에 시작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엄마는 방화 사건 직전의 기억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웃집에 중년 부부가 살았는데, 그 남편이 젊은 여자랑 바람을 피우는 것 같았어.
나도 참 왜 그랬는지, 그 바람의 증거를 잡아서 아내한테 알려주려고 아주 그냥 애를 썼다?
근데 그러다가 그 아내가 자기 집에다 불을 질러 버린 거야.
일이 그렇게 되니까, 나도 그만 정신이 없어져서…….
부부가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도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난다. 이웃집 방화 사건 이후 엄마의 병세는 급속도로 악화되어, 환청과 망상 등의 증세가 심각해지다가 엄마도 잇따라 방화했다고 한다. 아빠는 엄마가 이웃에게 이지메를 당한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지메를 당한 게 먼저인지, 아니면 이웃집 방화 사건 때문에 이지메를 당한 건지, 당시 엄마의 병을 악화시킨 주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원인이 뭐가 됐건 아빠는 일본으로 시집온 엄마가 병에 걸려 범죄를 저지른 데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다.
방화 사건 이후 엄마는 한동안 공동생활을 하는 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교도소는 아니었다고 했고,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 머무르는 구치소였거나 어떤 종류의 교정 시설이었던 것 같다. 나와 언니는 그동안 고아원에 있었다고 한다. 아빠가 우리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랬던 건지, 엄마와 우리와의 관계를 고민하느라 그랬던 건지 모르겠다.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흐르고 우리 가족은 한국으로 이민 오게 된다. 엄마의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아빠는 판단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일본에서 외국인 신분이었던 엄마가 방화 사건의 처벌로 추방당한 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엄마의 방화 사건으로부터 한국으로 이민 오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이 시기에 대한 정보는 가족에게 전해 들은 내용뿐이라, 내 안에서조차 통합되지 않고 뒤죽박죽 모호하기만 하다. 아빠는 엄마가 병 때문에 언니와 나에게까지 헛소리를 시작했을 무렵 한두 번, 엄마를 방 밖으로 내보낸 뒤 문을 닫고 조용히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줬고, 엄마는 나와 단둘이 있을 때 어느 시점인가의 기억을 더듬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이야기했다. 그게 전부였다. 엄마를 제외한 가족 구성원은 마치 불문율처럼 엄마의 병과 관련된 이야기를 엄마 앞에서 하는 걸 피해왔기에, 내가 충분히 자란 뒤에도 가족끼리 그 일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위 내용은 사실이라기보다 소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전해 들은 내용조차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흐릿해지는 가운데, 뭉게구름처럼 떠다니는 이야기의 조각을 엮어 추측과 상상이 난무하는 드라마를 머릿속에 그려볼 뿐이다.
결혼 전 엄마의 삶이 어땠는지는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야 엄마의 입을 통해 조금씩 들을 수 있었다. 그전까지 일반적인 대화가 이루어진 일은 거의 없었다. 약을 먹기 전까지는 주로 엄마가 일방적으로 헛소리하는 식이었고, 약을 먹고 나서부터 헛소리하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었지만 힘도 같이 쭉 빠진 엄마는 나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내 쪽에서도 엄마가 어색하고 불편했기에 형식적인 인사말고는 별다른 대화를 주고받지 않게 되었다. 모녀 사이가 조금 애틋해진 건 내가 집을 나와 따로 살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다. 아빠가 일을 나가신 뒤, 엄마 혼자 있는 집에 들르면 종종 옛날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엄마가 자랐던 원 가족의 역사는 순탄치 않았다. 2남 5녀 중 여섯 째인 엄마는 어릴 적 가족들과 서울에 살았다. 엄마의 어머니는 시장에서 야채를 팔았고, 아버지도 무슨 일인가 하는지 밖에 있을 때, 장남인 큰오빠가 종종 동생들을 줄 세워놓고 팼다고 한다. 그래서 큰이모는 자주 집을 나갔다. 작은오빠는 머리를 잘못 맞았는지 어느 날부턴가 조금 이상해졌는데, 병이 난 건지 어쩐 건지 일찍 죽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엄마는 나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던 엄마는 음반을 하나 낸 적이 있다고 했다. 커피숍에서 노래를 틀어주는 디제이를 했다가, 글방에 가서 소설을 쓰기도 하고, 이모들과 함께 버거 가게를 냈다가 말아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대학에 가고 싶어서 하루에 케이에프씨 비스킷을 하나씩 먹으며 돈을 모으다 폐결핵에 걸렸다는 말을 엄마는 웃으면서 했다. 심지어 모은 돈은 큰오빠에게 사기당해 몽땅 빼앗겼다. 그는 그 돈을 가지고 어떤 여자와 해외로 갔다고 한다. 하고 싶은 게 많았던 엄마는 이후 부모님을 모시며 조용히 살았다. 아빠와 선을 봐 결혼하게 된 것은 아픈 어머니를 모시다 여읜 뒤였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엄마의 태도에는 짙은 체념이 묻어났다. 화가 나고 억울할 만한 대목에서 잠시 목소리가 높아지다, 이내, 지난 일은 다 내 탓이오- 해야지 어쩌겠니, 했다. 엄마는 참는 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가난과 고통과 혼란과 배신을 엄마는 꾸역꾸역 참아냈다. 하지만 참아내고 지나 보냈다 여긴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사라지지 않고 켜켜이 쌓여 가슴속 꿀렁이는 검은 골짜기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당신 탓이 아닌 것을 당신 탓하며, 그 골짜기는 꾸준히 곯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더 이상 수용할 공간이 없어지자, 억압된 감정의 부산물이 울컥울컥 역류하여 <병>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