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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 최 사카모토 Oct 27. 2024

당신을 스친 어떤 여자(1)

여자가 남자를 처음 본 건 이년 전 가을이었다. 당일 자신의 착장을 기억하고 있던 여자는 핸드폰 앨범에서 그날 찍은 사진을 찾아 내, 그 날짜와 시간을 2022년 11월 27일 오전 열한 시 삼십 분경으로 추정했다. 네이비색 배경에 하얀 꽃과 알록달록한 새가 그려진 무릎 기장의 원피스를 입고 양갈래머리를 한 여자의 거울 셀카가 앨범에 남아있었다. 여자는 그날 자신의 방 전신거울 앞에 앉아 그 사진을 찍은 직후 애인과 데이트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는 걸어서 십오 분 거리의 솥밥집이었다. 핸드폰 앨범 속에 거울 셀카 이후 촬영된 버섯 솥밥 사진이 남아있었다.


집을 나선 여자가 집 앞 골목을 지나던 때였다. 여자의 몇 걸음 뒤에서 친구와 통화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통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친구와 만나기 위해 친구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야 하는 상황인 듯했다. 뭐라고? 거기가 어디라고? 하며 대화를 주고받던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혹시 천국버거가 어딘지 아세요?”


처음 듣는 상호이었지만, 여자는 낯선 남자에게 친절을 베풀고자 네이버 지도 앱을 켜 남자가 말한 상호를 검색했다. 검색 결과가 표시되지 않았다. 여자는 당황했다. 가게 이름을 잘못 들었나? 남자에게 상호를 다시 묻고 재시도했으나 역시 나오지 않았다.


“죄송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남자는 별 상관없다는 듯 그러냐고 한 뒤, 너무 자기 스타일이어서 그런데 전화번호를 알려줄 수 있냐고 했다. 아… 만나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래요? 그럼 그냥 친한 오빠 동생 사이하면 안 돼요? 죄송해요. 어려울 것 같아요. 여자는 최대한 예를 갖춰 인사한 뒤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에게는, 집 앞에서 번호 따였다는 사실에 대한 약간의 희열과 흥분감을 애인 앞에서 감추는 것 빼고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그로부터 약 일 년 후, 남자와의 만남이 두려움으로 각인되는 사건이 여자에게 벌어진다. 2023년 어느 여름날의 이른 오후였다. 집에 프린트기가 없는 여자는 아파트 삼층에 위치한 관리사무소에서 유료 인쇄 서비스를 이용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코너를 훅 돌아 건물 외부로 연결된 짧은 통로를 지나칠 때 어떤 이의 뒷모습이 시야를 스쳤으나 여자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아마 그대로 아무 일 없이 지나쳤더라면 기억조차 못 했을 테다. 그 뒷모습의 주인이 여자가 지나치는 찰나를 붙들고 다음의 문장을 속사포처럼 쏘아붙이지 않았더라면.


“뭐라고거기가어디라고저기요혹시행복한피자가어딘지아세요?”


화들짝 놀란 여자가 흠칫 뒤돌아봤다. 벽을 향해있던 몸을 어느샌가 이쪽으로 돌린 남자가 여자를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단발의 펌 헤어에 안경을 쓴 남자였다. 목소리는 다급함에 약간 상기되어 있었으나, 일 년 전 집 앞 골목에서 마주친 그 남자라는 사실을 여자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남자를 두 번째 마주쳤다는 사실보다도 여자를 놀라게 한 건 판에 박힌 듯 똑같은 멘트와 통화 중이라기엔 몹시 부자연스러운 남자의 말 속도였다. 정해진 문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뱉어야만 하는 자신만의 규율이 있는 것처럼, 통로를 스쳐 지나는 여자에게 다급하게 쏘아붙이는 남자의 모습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여자는 공포를 느꼈다.


“몰라요!”


라고, 비명에 가깝게 외친 여자는 재빨리 집으로 도망쳤다.


그 뒤로 여자는 한동안 그 일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남자의 목적은 무엇일까? 남자의 말에 대답하고 대화를 이어가거나, 남자를 따라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여자는 이 일을 아주 가까운 주변인에게만 이야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는 남자의 기이한 행동이 두려웠을 뿐, 남자가 자신을 표적 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첫 번째 만남과 두 번째 만남에는 자그마치 일 년에 가까운 간극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시간이 흘렀고 여자는 언제부턴가 남자에 대해 거의 잊고 지냈다. 그간 여자의 삶이 평화롭거나 행복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여자는 남자를 제외한 다른 위협에 맞닥뜨리기 바빴다. 이를테면 그만 만나자고 했다는 이유로 약 이십여 분에 걸친 통화 내내 씨발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던 남성이 현관문을 두드린다든지, 근무하던 카페 사장의 아버지가 금전적 지원을 해주겠다는 말과 애정표현을 아끼지 않으며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을 한다든지 등등……. 여자의 일상에서는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 일들이 굳이 따지자면 데이트 폭력이거나 성희롱이거나 성추행이거나, 어쨌거나 대개 “성”과 관련된 범죄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여자는 늘 한두 박자 뒤에 알았다. 일상에서 이토록 자연스럽고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 범죄라니 여자는 의아했다. 이것도 저것도 그것도 범죄라면…… 여자는 툭하면 피해자가 됐다. 여자는 그게 싫었다.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빈번히 감각할 때면 어쩐지 힘이 쭉 빠지고 죽고 싶어졌다. 여자는 경찰서나 법원이 아닌 정신과를 종종 방문했고, 자살하지 않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썼다.

이듬해 여름이 지날 무렵까지 여자는 자살이나 타살이나 사고사로 생을 마감하지 않고 생존했다. 어느새 여자는 만 이십오 세가 되었다. 자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 치고 자신은 꽤나 질긴 생명력을 지녔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여자보다 보름 늦게 태어난 여자의 친구 O와 여자는, 두 사람의 출생과 생존을 축하할 겸 두 사람이 태어난 달인 8월의 막바지를 장식하는 가평 여행을 계획했다.


2024년 8월 27일 밤 열 시 삼십칠 분 경, 다음 날 있을 여행에 대비해 여자의 집에 하룻밤 묵기로 한 O와 여자는 근처 편의점에서 감자칩을 산 뒤 귀가하는 길이었다. 두 사람이 아파트 입구 부근에 오토바이 출입 방지용으로 설치된,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주황 고깔 사이로 들어설 때였다. 여자의 등 뒤로 불쑥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인물은 여자의 오른쪽 뒤에서 나타나 거리를 좁혀왔다. 아마도 여자네와 같은 방향으로 들어설 모양이다. 설치된 고깔 사이 간격이 좁아 세명이 지나기엔 무리가 있을 듯한데, 배후의 인물은 걸음을 늦출 생각이 없는지 여자에게 점점 더 바짝 다가왔다. 이대로 가다간 아무래도 부딪힐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며, 여자는 자신의 왼쪽에 있는 O에게 몸을 붙여 가볍게 밀듯이 이동해 한 칸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배후의 인물 또한 여자를 바짝 따라붙으며 왼쪽으로 이동하는 게 아닌가.

순간 불길한 예감이 여자의 뇌리를 스쳤다. 동시에 등판을 촘촘하게 덮은 솜털이 일제히 섰다. 여자의 심장은 발 빠르게 박동수를 올려 혈류 속도를 높였다. 신속한 투쟁-도피 반응을 위해, 여자의 날 선 청각이 귓바퀴 바깥쪽을 은근하게 맴돌던 배후 인물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러나 곧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뭐라고? 거기가 어디라고? 저기요, 혹시 진미돈가스가 어딘지 아세요?”


아아…….

그 남자다. 잊고 지내던 바로 그 멘트다. 그 남자도, 그 멘트도 그대로 잊혀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여자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남자를 봤다. 비록 머리를 자르긴 했지만, 안경 뒤에 가려진 흐릿한 눈매 하며, 미세하게 달뜬 중저음 톤의 음성 하며, 능청스러운 표정 뒤로 잘금잘금 새어 나오는, 미처 숨기지 못한 어색함과 구린 기운까지 틀림없이 그 새끼였다.

여자는 남자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일이 초 가량 응시했다.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죠? 당신이 똑같은 방식으로 몇 번째 나한테 말 걸고 있는지 알기나 하나요? 이런 거 굉장히 소름 끼치고 불쾌하거든요. 제발 저한테 그만 말 거세요. 웃음기 없는 여자의 표정 뒤에는 그런 문장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여자는 당장이라도 그 문장들을 남자의 면상에 쏘아대고 싶었다. 그러나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 년 만에 예고 없이 마주한 남자 앞에 두려움이 앞섰으며, 혹여나 남자가 정말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해 매번 똑같은 수법으로 수작을 부리고 마는, 주변을 배회하는 흔한 여미새 나부랭이일지도 모른다고, 만일 그렇다면 자신이 너무 오버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여자는 떨쳐낼 수 없었다.


끝내 아무 말하지 못한 여자는 O의 손을 덥석 잡고 고개를 앞으로 돌려 성큼성큼 전방을 향해 걸어갔다. 여자의 반응을 통해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O가 물었다.


“저 사람이 혹시 그때 얘기했던 그 남자야? ”

“응. 맞는 거 같아. 일단 빨리 집에 들어가자. 혹시 그 새끼 아직 뒤에 있어?”

“아니… 없어졌어.”


여자는 퍼뜩 정신이 들어 뒤돌아봤다. 우르르 끓어올랐던 분노와 두려움이 푸쉭 푸슈욱 김빠지듯 내려앉은 자리에 곧장 허탈감과 후회가 몰려들었다. 역시 방금 전에 제대로 한마디 했어야 했는데. 만약에 모든 게 내 착각이거나 오해라고 하더라도, 미친 척 말했어야 하는데. 그만하라고. 가뜩이나 피곤한 내 인생에 침범할 생각 말고 제발 꺼지라고.


방으로 돌아온 O와 여자는 다음날 먹으려고 사 온 김 맛 감자칩 한 봉지를 까서 우적우적 씹으며 남자 얘기를 이어갔다. 그치? 이상하지?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쟤가 이상한 거 맞지? 이게 세 번째라니까. 미친 새끼. 근데… 매번 처음인 것처럼 물어봐. 그래서 찝찝해 죽겠는데도 뭘 못 하겠어. 진짜 기억 못 해서 저러나 싶고, 모든 여자한테 저러고 다니는 놈인데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아닐까 싶고…. 근데 첫 번째는 그렇다 쳐도 두 번째는 너무 이상해서, 혹시 무슨 인신매매 납치 수법 같은 건 아닐까 생각도 했어.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아. 아까도 너랑 나랑 있는데 나한테 말을 걸었잖아. 그리고 내가 피하려고 하는데 걔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분명히 느껴졌어. 평범한 번따남이라고 하기에도, 우리는 거길 지나칠 뿐이었고 나를 관찰할 시간도 없었는데. 집에서 편의점 완전 코앞이잖아. 근데 언제부터 나를 봤다고 쫓아와서 말을 거는 거야? 꼭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O는 육두문자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며 여자의 말에 맞장구쳤다. 자신이 옆에 있었는데도 여자가 이런 일을 겪었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목소리를 높이던 O는, 이윽고 무력감에 짓눌려 괴로운 신음이 섞인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근데 사실 나는… 생각보다 너무 멀쩡하게 생겨서 놀랐어.”


O의 말마따나 남자는 여성 범죄의 가해자를 상상할 때 흔히 떠올리고 마는, 연애 시장에서 완전히 낙오된 음침한 남성의 이미지와는 다소간 거리가 있었다. 남자와의 첫 만남에서 여자가 남자의 의도에 대한 한치의 의심 없이 묻는 말에 순순히 답한 것 또한 이 때문이었다. 외모도 말투도 특별히 위협적이거나 공격적인 느낌 없이 평범하달까,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온순해 보이는 축에 속했다. 체형 또한 아주 뚱뚱하지도 아주 홀쭉하지도 않고 적당히 건장했으며 키도 큰 편인 것 같다. 어쩌면 그 사실이 튀어나온 돌부리처럼 발에 채는 바람에 여자가 끝없이 자문하는지도 모른다. 네 착각이 아니라고 정말 장담할 수 있어? 저렇게 평범하고 멀쩡하게 생겼는데? 여자는 차라리 자신이 도끼병에 걸려 괜한 걱정을 하고 있기를 바랐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더 이상 귀찮은 일을 해결할 힘이 여자에게는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집 밖에 도사리는 위협이 두려워 방안에 스스로 가둔 채 자살할 이유와 자살하지 않을 이유를 세어보는 데에,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고작 밖에 나갈 용기를 내는 데에 여자는 지쳐있었다.

그 남자는 어쩌면 정말로 여자를 기억 못 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까 분명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봤을 터다. 이제는 여자를 기억하고 다시 똑같은 방식으로 말을 안 걸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여자는 그렇게 스스로 타일렀다.


그날 이후 여자는 혼자 밖을 걷는 게 어려워졌다. 모르는 남성의 시선이 스치기만 해도 몸이 바짝 굳고 호흡이 가빠졌다. 잔뜩 날 선 감각이 시도 때도 없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발작을 일으키려 했다. 여자는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 땅을 보고 걸었다. 외부 자극에 예민하다고 느낄 땐 앞을 보기 위한 안경도 콘택트렌즈도 착용하지 않았다. 시력검사표 맨 윗줄에 크게 적힌 “4 C 그”도 눈을 한껏 찡그려야 겨우 볼 수 있을 정도로 여자는 눈이 나빴다. 사실상 맨눈일 때는 시각 장애인에 가까웠다. 그러나 앞이 잘 보이는 상태로 여자는 사람이 많은 길 한복판에서 한 발짝 떼는 것조차 어려웠다. 최소한의 생계유지를 위해 아예 밖에 나가지 않을 수는 없었으므로, 여자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시각을 차단하는 쪽을 택했다.


그로부터 열흘 정도 지났을 무렵 여자는 슬슬 방심하고 있었다. 일 때문에 반강제로 바깥을 돌아다녔던 며칠간 생각보다 별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여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을 금세 잊을 수 있는 고기능의 안전 불감증을 탑재한 인간이었다. 지금에야 예쁘다는 소리를 흔하게 듣고 프리랜서 모델 일로 어느 정도 수입을 올리고 있지만, 여자에게는 안 예쁜 시절이 존재했다. 외모에 관심을 갖고 꾸밀 여력이 없던 학창 시절 오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여자는 타인으로부터의 철저한 무관심을 경험했다. 예쁜 상태와 안 예쁜 상태를 오갔던 여자에게는 약간의 부작용이 남아있는데, 타인의 눈에 자신이 예쁜 여성으로 비친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는 것이다. 한껏 멋부린 날에도 눈앞에 거울이 없거나 예쁘다는 말을 듣지 않는 순간, 여자는 그 누구도 티끌만큼의 관심조차 주지 않던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가곤 했다. 여자는 프리랜서 모델을 시작한 근 2년 동안 자신이 왜 갑자기 많은 성범죄를 겪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그러니까 그날, 촬영하면서 받은 메이크업이 마음에 쏙 들게 잘 됐음에도 한밤중에 마스크도 쓰지 않고 집 밖에 나간 것은 여자의 실수였다.


9월 9일 밤 열 시 사십오 분경, 알록달록한 파스텔 톤 실로 짜인 민소매 크롭 스웨터를 입은 여자는 대학 원서 접수를 위해 피시방에 가는 길이었다. 원서를 접수를 마치면 혼자 네 컷 사진을 찍을 심산이었다. 일층 공동현관 자동문을 나설 즈음에야 마스크를 깜빡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여자는 잠시 허둥댔지만, 집 근처를 잠깐 왔다 갔다 할 뿐이니까 괜찮겠지 하며 큰맘 먹고 노 마스크 외출을 감행했다. 아파트 입구에서 나온 여자는 고가도로를 건너기 위해 설치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입구로부터 고작 몇 걸음 뗐을 무렵 후방에서 익숙한 기척이 따라붙었다.

아. 설마. 아닐 거야. 여자는 자신의 감각을 애써 부인하며 기존 진행 방향에서 살짝 몸을 틀어 후방의 인물과 거리를 두려고 시도했으나 역시 곧바로 따라왔다. 뒤이어 들려오는 지긋지긋하고 경멸스러운 그 멘트.

 

“뭐라고? 거기가 어디라고? 저기요 혹시 뚝배기…”


남자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여자가 뒤돌아 남자를 째려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말을 멈췄다. 남자가 자신의 멘트를 끝맺지 않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자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채로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여자의 얼굴을, 이목구비 하나하나 유심히 뜯어보았다.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던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자는 혼란스러웠다. 남자의 표정과 의도를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여자의 시선이 너풀너풀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터질 듯한 심장만 바쁘게 뛰었다.

곧이어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렸다. 여자는 재빨리 엘리베이터로 뛰어들었다. 남자는 따라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올라가는 동안 여자는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러다가, 아차, 이럴 때가 아니라 사진이라도 찍어야겠다며 수초만에 정신을 다잡은 여자가 엘리베이터 벽에 붙어 투명한 창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날 새벽 여자는 파출소에 갔다.


“어떤 일로 오셨어요?”

“어… 그게….”


O의 조언에 따라 일단 파출소까지 오긴 왔으나, 여자에게는 아직 확신이 없었다.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몰랐다.


“그… 어떤 사람이 한 이 년 전부터 저한테 똑같은 방식으로 말을 거는데요… 근데 그게 너무 이상해서요….”


여자의 이야기를 듣던 경찰의 표정이 조금씩 심각해졌다. 지금까지 이 일로 한 번도 신고 안 하셨어요? 어어… 네에…. 진작에 신고를 해야 하는 일이었나? 하고 여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자에게 질문한 여성 경찰이 스토킹 신고 접수를 해주겠다며 여자에게 진술서를 줬다.


위의 사람은 _______ 사건의 (피의자, 피해자, 목격자, 참고인)으로서 다음과 같이 임의로 자필 진술서를 작성 제출함.


머뭇거리던 여자는 빈칸에 스토킹이라고 적고 피해자에 동그라미 쳤다. 그로서 여자가 약 이년에 걸쳐 겪은 일이 스토킹으로 정의되고 여자의 신분은 피해자로 분류되었다.


“근데 선생님. 선생님도 말 걸거나 따라오지 말라고 한 번은 확실하게 의사 표현을 해야 돼요.”


라고, 진술서를 적고 있는 여자에게 남성 경찰이 말했다. 여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여자의 대꾸하지 않음은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음이었다. 저도 그 남자한테 지랄 말고 꺼지라고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는데요, 그 상황이 존나 이해가 안 가고 무서워 뒤질 것 같아서 말 못 했어요, 니가 그 두려움을 아시나요, 따위의 말들이 여자의 목구멍 안쪽에서 꿈틀거렸다.


진술서 작성을 마친 여자는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에 있는 집에 돌아가기 위해 경찰차를 탔다. 여자는 아파트 입구에서 내려 최근 남자를 마주쳤던 위치를 경찰에게 알려주었다. 경찰은 주변 CCTV 위치를 확인했다.

비밀번호로 잠겨있는 집 안까지 다다른 여자는 혼란한 마음을 잠재울 수 없었다. 스토킹을 당하고 있구나… 내가…. 감당하기 버거운 온갖 불쾌한 감정이 여자를 덮쳤다. 빨리 누구한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빵빵해진 풍선이 바늘 찔리듯 펑 하고 터져 죽어버릴 것만 같다. 여자는 자신이 겪은 일을 인스타 스토리에 올려 감정적 공감과 지지를 받고 싶다고 생각하다가도, 불쑥, 그 남자가 자신의 SNS 역시 지켜보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상상이 들자 두려워졌다.

남자는 여자의 집 앞에서 나타난다. 때로는 여자가 사는 건물 안에서도 나타난다. 남자는 여자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사실은 동호수까지도 알고 있지는 않을까? 남자는 여자를 만나면 처음 본 사람처럼 늘 똑같은 질문을 한다. 남자의 목적은 도대체 뭘까?


“스토커들은 사고방식이 일반적이지 않아서, 무슨 수를 써서든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려고 한 대.”


라고, 여자는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번뜩 떠올랐다. 정말? 세상에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있는 걸까? 여자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자는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안전하고 커다란 품으로 뛰어들고 싶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으면서 잔잔하고 지루하게 살고 싶다. 여자는 마치 누군가 눈꺼풀을 강제로 열어젖혀, 자신이 스스로 지킬 힘 없이 나약하며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자꾸만 확인하게 하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무력함에 집중할수록 감정적 허기만이 끝 간 데 없이 깊어져갔다. 여자는 저녁에 먹다 남아 냉장해놓은 마라샹궈를 데우지도 않고 주방에 선 채로 먹어치웠다.

다음날 여자는 연기 수업 일정이 있었다.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아침 아홉 시에 기상해야 했으나 도통 잠에 들 수 없었다. 여자는 진정제를 먹고 아침 여섯 시가 돼서야 겨우 잠들었다. 잠든 지 세 시간 만에 알람 소리를 듣고 가까스로 눈을 떴으나, 위장이 타들어가는 통증과 함께 극도의 피로와 무력과 우울이 여자의 몸을 덮쳤다. 여자는 결국 당일 일정을 취소했다.


여자는 자신이 돈을 받는 일정의 경우 아직까지 펑크 낸 적이 없었다. 생계를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스스로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러나 여자가 돈을 받지 않거나 비용을 지불하는 외출은 점점 줄어들었다. 동시에 여자는 자신의 세상이 축소됨을 느꼈다. 자신에게 닥친 기회와 가능성을 자신의 손으로 잘라내며 여자는 점점 고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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