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지만 피로한 날이다. 흘린 땀방울만 해도 물 한 컵은 되지 않을까. 휴식이 필요했다. 나도 민이도.
택시를 이용해 온천행을 택했다. 이즈하라 시내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온천이 있다. 일본 여행에서 온천은 필수 코스 중 하나다. 휴식을 위한 일정이기도 하다. 다음날을 위한 충전이 필요했다.
자동문이 열리고 온천 특유의 냄새가 났다. 눅눅한 비누 냄새라고 할까. 신발을 벗고 신발장 안에 신발을 넣는다. 열쇠를 들고 두리번 거린다. 누가 봐도 여행자 티가 난다. 멀리서 직원이 걸어온다. 일본어는 여행에 필요한 것들 몇 개만 기억하고 있다. '~오네 이가이 시마스''~도코 데스까''이꾸라데스카'와 같은 일본 여행 생활일어 정도인데 나에게 다가오면 뭐라고 말해야 하지. 온천이 일본어로 뭐였더라. 머릿속에 일본어 단어들을 마구 돌리고 있는데. 이런. 한국말이 들린다. 일본 사람이었지만 한국말을 잘하는 듯하다. 아니 한국사람이 일본에 오래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여하튼, 온천 이용을 원한다고 말했고, 어른 두 명과 초등 두 명의 가격을 지불했다. 타월과 세면도구는 이미 준비해 가서 별다른 구매 목록은 없다. 온천욕이 끝나고 자판기 우유와 아이스크림을 구매하는 것에 대해서는 차후에 상의하는 걸로.
내 옆에 꼭 붙어 있던 민이는 아빠 손을 잡고 검은색 커튼 뒤로 들어갔다. 딸 하와 오랜만에 마주하는 것 같다. 여행 내내 민이는 나의 손을, 하는 아빠손을 잡고 걸었다. 우리는 붉은색 커튼뒤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대욕장 안은 열기로 가득했다. 쉴 틈 없이 들리는 헤어드라이기 소리에 말소리가 커진다. 하에게 머리를 감을 거냐고 물어봤다. 하는 숙소에서 감고 싶다고 말한다. 머리가 긴 하는 한참 동안 머리를 말려야 하기 때문에 번거롭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를 말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보니 나 역시 머리 감는 건 숙소에서 해야 했다. 미리 준비한 샤워캡을 머리에 쓰고 대욕장 안으로 들어갔다.
간단히 샤워할 수 있는 공간이 한쪽 벽면에 있다. 밖의 풍경을 내다볼 수 있는 온탕이 있고 반대편에는 냉탕으로 보이는 작은 탕이 하나가 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하늘을 지붕 삼아 즐길 수 있는 노천탕 있다. 이곳으로 온천욕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노천탕이다.
휴식이다. 남과 여를 구분 짓는 검은 천과 붉은 천을 보며 우리는 휴식을 기억한다. 두 눈을 감고 뜨거운 물에 몸을 맡긴다. 뭉친 근육들이 풀어지고, 쌓인 피로가 흘러내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버티어 본다. 개인적으로 온탕을 선호하지 않는 나다. 물속에 몸을 담그면 답답함이 밀려온다. 뜨거운 수증기가 숨 쉬기를 막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사우나를 즐기는 편도 아니다. 사우나도 그렇고 온천도 그렇고 답답하다. 하고 나면 피로가 풀리는 것 같기는 하지만 하는 것이 곤욕이다. 그렇다고 냉탕을 들어가고 싶지 않다. 냉탕의 효능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는 온탕을 좋아한다. 즐긴다. 잠깐 몸만 담갔다가 나가고 싶은 맘을 꾹 참고 하를 위해 온탕 안에 있었다. 날씨가 참 좋다. 유리벽면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참으로 예쁘다.
하에게 이제 그만 노천탕으로 가보는 게 어떻냐고 물었다. 하는 그러자고 말했다. 노천탕으로 가는 문을 열자 시원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우와' 또 한 번 밖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밖으로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나이지만 이곳 대마도에 와서 두 번이나 '우와'를 크게 외쳤다. 물은 온탕보다는 덜 따뜻했다. 화끈한 뜨거움을 원하는 몇몇의 사람들은 잠시 머물다 다시 대욕장 안 온탕으로 들어갔다. 하와 나 둘만이 남았다. 이 넓은 노천탕에 하와 나 단둘이 있어서 좋았다. 몇 개의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은 예뻤다. 하 만큼이나 예쁜 풍경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가끔 우리의 온척욕을 방해하는 벌들이 날아오지만 잠시 윙윙거리다 사라졌다. 휴식을 방해하지 않는 공기가 좋았다. 문득 불어 주는 바람이 시원했다. 아무 말 없이 하와 나는 그곳에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서로에게 묻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휴식을 지켜주는 마음만이 있었다.
사람이 나가고 사람이 들어왔다. 몇 번의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타나며 대욕장을 채우고 비웠다. 남편과 민이와 약속한 시간이 되어간다. 하의 손가락이 쭈글 해졌다. 내 손가락도 그렇다. 서로 보며 빙그레 웃었다. 샤워기로 몸을 헹구어 내고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드라이기 소리는 쉬지 않고 돌아간다. 짐을 정리해 붉은 커튼을 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자판기 앞으로 가는 하를 따라 걸었다. 하와 나는 병우유 하나씩을 꺼냈다. 온천욕이 끝나고 꼭 병우유를 먹어 줘야 한다는 여행객들의 말에 하와 나도 그리 했다. 남편과 민이는 아직이다.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 나오지 않는다. 휴식이 더 필요한가.
병우유 맛은 최고였다. 고소하고 시원하고 담백했다. 하나 더 먹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곧 저녁을 먹어야 해서다. 검은천이 젖혀질 때마다 시선이 옮겨 간다. 기다리는 사람은 나오지 않고 처음 보는 사람들만 눈에 비친다. 기다림에 지쳐갈 때쯤 남편과 민이 모습이 보였다. 포기하려는 순간 뭐가 되는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이 가끔 일상에서도 자주 겪는다. 버스를 기다리다가도,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다가도, 무언가 포기하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 결과가 보인다. 하와 온천 건물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남편과 민이가 나온 거다. 그들도 자판기 앞에 섰다. 그들은 우유대신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다. 민이는 딸기 아이스크림, 남편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다.
서로 다른 색깔의 커튼 뒤로 들어가 마주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노천탕은 최고였다는 말은 공통이다. 휴식은 만족이다. 우리가 머물렸던 검은천과 붉은 천은 휴식의 기억이다. 우리는 휴식이 필요할 때 이곳을 기억할 거다. 어쩌면 이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편안했던 우리의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