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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로시 Oct 23. 2024

섬세하고 아름다운 사랑

섬세한 돌담들이 길게 늘어선 고즈넉한 거리를 걷는다. 내가 살던 고향의 돌담들은 백삼 십 센티미터의 키로도 마당이 훤히 보여서. 까치발 들고 "친구야 놀자"를 외쳤는데. 이즈하라 무사가옥의 돌담은 백육십 센티미터의 키로도. 까치발을 들고도 점프를 하면 보일 듯 말듯한 높이다. 먼저 앞서가는 키가 큰 여행객은 안이 보일까. 남의 집 마당이 뭐가 그리 궁금한지. 돌담 앞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성거렸다. 


섬세하기도 하지. 가까이서 보니 섬세함이 보였다. 작고 큰 돌이 서로의 빈틈을 메우고 있다. 너와 나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겠다는 강직함이다. 겹겹이 쌓인 돌담의 모습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혼자 걸으면 좋을 만한 거리다. 

걷다가 마주하는 무사 가옥들을 스쳐 지나가려다 발걸음을 멈췄다. 누군가 살고 있는 걸까.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본다. 대문이 열려 있으니 들어가도 되는 것인가. 궁금증이 생겼다. 앞서가던 여행객들도 슬쩍 지나쳤다. 단체 여행객들을 앞에서 이끌 던 가이드도 잠시 멈춰 섰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들어가지 않았겠지. 열린 대문 틈으로 고개만 살짝 넣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일본의 전통 가옥 모습을 하고 있지만 조금은 다른 느낌이다. 


앞서가는 여행객들 뒤를 따라 걷다 보면 만나는 나카라이 토스이관. 돌담길을 걷던 이유기도 한 곳이다. 이곳에 오기 위한 여정이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오다가 만나는 돌담과 무사 가옥에 머문 시간 덕분인지 몇몇의 단체 팀들이 우리를 가로질러 지나갔다. 어쩌면 잘된 일이다. 여유롭게 기념관을 구경해 보고 싶기도 했으니깐. 


시골의 낮은 짧다. 해가 지면 상점들 문이 닫힌다. 식당들도 일찍이 문을 닫는다. 문이 열린 곳은 편의점과 일본 전통 술집 이자카야 정도다. 편의점 음식도 맛있다는 평이 있지만 우리는 일본의 노포 식당에 가보기를 원했다. 일본 식문화를 깊숙이 기억하고 싶은 방법이기도 했다. 이자카야도 좋은데. 미성년자인 민이를 데리고 가기에는 멈칫거려진다. 마음이 쉽게 앞장서지 않았다. 그리 좋은 풍경은 아니라는 후기들을 많이 보았기에 그렇다. 술은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킨다. 술을 먹기 전과 후의 차이는 사뭇 다르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이도 몇몇 본 적이 있다. 아직은 망설이는 마음이 옳다. 

몇몇의 사람들이 마당을 거닐고 있다. 패키지 단체 손님들은 지나가고 없는 듯해 보였다. 섬세하게 정돈된 정원 한편을 눈에 담고 사진기에 담는다. 기억에 오래 담고 싶은 사랑스러운 정원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기품 있어 보이는 정원의 모습이 좋았다. 


나카라이 토스이 생가였던 이곳은 토스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다지만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이라고 하기에는 이름에 비해 다소 초라한 전시품들이 방 한 칸에 조금 있다. 유카타 체험, 말차 체험, 회의실 대여, 찻집등으로 이용하는 공간이 기념관의 90%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카라이 토스 이는 대마도 이즈하라에서 출생하였는데, 본명은 '키요시'이고 어릴 적 이름은 센타로, 기쿠아미, 토스가 지시 등으로 불러졌다. 


의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서 살면서 한국어를 배운 듯하다. 귀국 후 공부를 하였고 도쿄 아사이신문사에 입사를 한다. 토스이는 이후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다음 해가 되는 메이지 22년에 아사이 신문에 '오시쓴보'를 발표하고 이후 시대물에서 현대물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유려한 필체로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우리나라 춘향전을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에 처음 소개한 인물로 유명하다. 

책 몇 권이 전시된 방을 나와 길게 늘어선 탁자 위를 돌아 들어왔던 문으로 다시 나간다. 일본어로 되어 있는 그의 작품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했고, 아무런 이유를 묻지 않았다. 초라한 그의 전시품에 아쉬움을 남겼다. 


신발을 벗어 놓는 한편에 일본 전통신발 게다가 보였다. 가지런히 놓인 신발이 단정했다. 토스이의 연인 이치오의 신발이 이랬을까. 이렇게 가지런히 벗어 놓고 글을 배우러 이곳에 왔을 거고, 연모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커져 있었을 거다. 

메이지 24년, 초봄, 4월 15일의 일이었다.

어느 날 그의 사무실에 소설가 지망생으로 '히쿠치 이치오'라는 매우 아름다운 소녀 한 명이 찾아온다. 토스이 나이가 서른둘이고, 이치오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토스이를 연모하게 된 이치오는 그날부터 매일 일기를 썼다. 그녀는 스물다섯이라는 매우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토스이를 연모하는 이치요의 마음이 짧은 생애동안 사라진 날 없었다는 사실을 사후 발표된 '일기'에 의해 밝혀졌다. 

토스이의 제자이며 연인이었던 '히구치 이치요'는 메이지 시대 최초의 여류 소설가로 일본 근대 소설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2004년 발행된 5,000엔 지폐에 새겨진 인물이기도 하다. 


타고난 감수성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여성의 감성을 표현한 천재작가로 기억되는 '히구치 이치요'. 그녀의 작품은 한국어로 번역된 책들이 여럿 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꼭 읽어 보겠다는 다짐과는 달리 아직도 읽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는 읽어야 할 책들이 무수히 많기에. 언제 가는 꼭 읽어 보기로. 

[치열하게 피는 꽃 이치요, 나 때문에, 해질 무렵 무라사키]


여행에서 만난 단정하게 벗어 놓은 일본 전통 신발을 보며 섬세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기억한다. 짧지만 사라진 날 없는 나날을 보냈던 연인의 마음이 우리가 다녀온 여행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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