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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근한 하루가 끝나면.

무기력하다

by 새나 Mar 31. 2025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있다. 몸이 축축 처지고,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멍해지는 날,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손끝 하나 까딱하기가 싫다.


빨래는 쌓여 있고, 청소기는 방 한가운데 멈춰 서 있다. 이불은 먼지를 털어달라고 몸을 비비 꼬는 것 같고, 싱크대에는 설거지거리가 수북하다. 하지만 나는 소파에 앉아 아무것 하지 않는다. 꼼짝도 않는다.


아무 대가도 없는 노동이 있다. 집안일이 그렇다. 하지 않으면 집안이 금세 엉망이 되지만, 해도 눈에 띄지 않는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반복될 것이다. 바닥을 닦아도 금방 먼지가 쌓이고, 설거지를 끝내도 다시 물컵들이 놓인다. 집안일이 끝나는 순간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이다.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은 계속 무엇인가를 해야 했고 하고 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의 감정을 나는 무기력이라 부른다. 무기력하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냥 쉬고 싶다. 무기력을 벗어나기 위해 커피를 탄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깨우기 위해 커피포트의 물이 끓는 동안, 나는 멍하니 서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모습을 바라본다. 컵에 커피가루를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짙은 갈색의 액체가 퍼진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이 무기력한 와중에도 커피 향은 좋다. 남편이 지인에게 받아 온 원두커피 스틱이다. 갓 내린 커피는 뜨겁고 향이 진하다. 한 모금 천천히 마셔 본다. 혀끝에 닿는 커피의 시큼함이 좋다. 쓴맛 보다 먼저 혀 끝에 퍼지는 맛은 신맛이다.


해야 할 일은 여전히 손도 대지 못한 채 그대로다. 나는 천천히 식어가는 커피를 앞에 두고 또다시 멍해진다. 잠깐이라도 기운을 내보려고 했지만, 결국 커피도 나처럼 축축 늘어져 버린다. 미지근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묽고 애매한 맛이다. 처음처럼 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식어서 차갑지도 않다. 미적지근한 감촉이 입안에 퍼진다.


무기력한 감정도 미지근 커피와 비슷하다. 처음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반복되는 일상 때문인지, 알아주지 않는 노동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지쳐서 인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이유조차 흐려진다. 그저 힘이 빠진 상태로 남는다.


창밖을 본다. 해는 중천에 떠 있고,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고 있다. 누군가는 출근을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점심을 먹고 있을 것이다. 세상은 계속 움직이는데 나만 멈춰 있는 것 같다.


이런 날이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무기력함도 결국엔 끝이 나겠지. 조금만 더 지나면 다시 움직이게 될 것이다.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밀고, 이불을 정리할 것이다.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 내일이 아니라면 그다음 날.

나는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여전히 미지근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정신을 깨우기 위해. 미지근한 하루가 끝나고 나면 다시 뜨거운 커피를 마실 날이 올 것이라는 걸 알기에.  뜨거운 커피 한 모금에서 나는 그 신맛이 그리워진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마지막 남은 커피를 모두 마시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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