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로운 Oct 27. 2024

그냥 좋은 책들과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현실의 책방을 운영하기 위해선 총판, 직거래, 서점협회, 공급율 이런 용어들을 알아야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렇게 작은 책방에, 그것도 이름 없는 신생 책방에 직거래를 해주는 출판사는 드물었다. 총판이라고 불리는 도서 유통업체도 마찬가지였다. 외딴곳에 위치한 우리 책방은 여러 면에서 환대받을 만한 납품처가 아니었다.

연락을 받은 총판 직원은 우리와 미팅하러 오자마자 지역 도매상 사장님 연락처를 전해주었다. 통화할 때만 해도 거래를 해줄 것처럼 해놓고 하루 만에 말을 바꾸니 기분이 상했다. 나중에 만난 도매 사장님은 전날 그 직원이랑 술 한잔했다고 너스레를 떨며 수십 년째 순천지역 책 납품은 자신이 도맡아 하고 있으니 본인과 얘기하면 된다고 하셨다. 뭔가 시작부터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게 맘에 들지 않았지만 지역 도매상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인지 상생해야 할 대상인지 자문했을 때 후자 쪽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수긍하기로 했다.


사장님은 자신한테 주문하면 적은 수량이라도 책방까지 매일 배달해 줄 수 있다고 하셨다. 이미 총판 쪽에선 우리와 거래할 수 없다고 선언한 상태였고, 남은 선택지는 출판사 직거래와 도매상뿐이었다. 서류에 약한 나는 출판사마다 연락해 직거래 협의를 하고, 관리해야 할 거래 장부를 늘리기보다 도매상에 바로바로 주문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겠다는 판단을 했다. 서류와 행정 업무 스트레스를 5프로의 마진과 바꾸기로 한 셈이다. 얼마 안 되는 책의 마진율을 생각했을 때 꽤나 큰 비율이었지만 아마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비슷한 선

택을 할 것 같다.*


책을 주문하는 건 언제나 신났다. 이렇게 죄책감 없이 책을 잔뜩 사도 되다니! 엄마의 잔소리도 안 들어도 되고, 다 못 읽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다고 아무 책이나 막 들일 순 없었다. 몇몇 독립출판물을 제외하곤 모두 현금 주고 매입해 오는 책들이었기 때문에, 안 팔리면 고스란히 우리 것이 되어야 했다. “안 팔리면 우리가 가져도 좋을 책들만 들여놓자!” ‘소심한 책방’ 사장님들도 그래서 두 권씩만 샀다고 했다. 우리는 부부니깐 한 권씩만. 그래야 1종이라도 더 들여놓지. 대신 책들이 더 잘 보이게, 최대한 전면 배치를 하자! 나는 책 소개를 손글씨로 써 볼게! 모든 것이 신났다. 


초반의 책방엔 사회과학 도서와 눈길이 가는 문학 작품들, 참신하고 세련된 그래픽 노블, 소량의 독립출판물을 들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제 막 책방을 시작한 주제에 콧대는 엄청 높았던 것 같다. 손님이 찾는 책이 없으면 “아, 죄송합니다. 저희는 저희가 좋아하는 책만 취급하는 큐레이션 책방입니다. 안 팔리면 다 저희가 가져가야 하는 책들이라서요.” 그러면서 속으로는 하나도 죄송하지 않았다. 여기 와서 그런 책을 찾다니! 하며 손님의 안목을 비웃기도 했다.


머지않아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는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 오래된 동네로 들어왔고, 이곳에 잘 어우러지는 책방이 되는 게 목표였다. 여행자들이 찾는 랜드마크가 되기보다 진짜 동네 사람들이 즐겨 찾는 동네 책방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다. 단골손님이 하나둘 생기고 손님의 취향을 파악하게 되면서, 신간이 나오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생겼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 손님이 좋아할 것 같아.’, ‘이 작가 책은 나올 때마다 챙겨보는 것 같던데 그 손님을 위해 준비해 둬야겠어.’ 이런 마음으로 가져다 둔 책들이 딱 그 손님의 손에 들려 떠날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러다 어느 날 책방을 둘러보면 이거 너무 무색무취 아닌가... 너무 잡식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렇게 물들어 가는 게 싫지 않았다.


책방 덕분에 하고 싶었던 일도 맘껏 도전해 볼 수 있었다. 성호는 지역사 논문 읽기 모임을 꾸려보기도 하고, 원도심의 역사문화자원을 공부해 골목길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렇게 순천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하더니 혼자서 <마을에 깃든 역사 도시 순천>이라는 책을 만들기도 했다. 나는 ‘바느질 수다’, ‘지우개 스탬프 만들기’ 등 내 관심사에 기반한 원데이 클래스를 열기도 하고, 취미로 하던 캘리그라피로 손님들에게 엽서를 만들어 선물하다 소규모 수업을 시작했다. 평일 저녁엔 필사 모임을 만들어 꽤 오랜 기간 행복한 시간을 누렸다. 필사모임 멤버들과는 함께 소풍도 가고, 보성의 조정래문학관 견학도 가고, 1박 2일 엠티도 가고, 필사를 주제로 잡지도 만들어보고... 소중한 추억이 많다. 깡성호와 지금도 이야기한다. 그때가 우리 책방의 전성기이자, 우리 인생의 황금기였던 것 같다고.


작가와의 만남도 은근히 많이 가졌는데, 우리 쪽에서 기획하거나 섭외한 건 거의 없었고, 모두 일 잘하는 출판사 직원에게 우리가 픽 당하거나, 우연과 필연이 섞여 작가님과 연결된 경우였다. 기동력이 떨어지는 우리였지만 제 발로 찾아오는 행운은 두 팔 벌려 껴안았다. <당신이 계속 불편했으면 좋겠습니다>를 함께 읽고 올린 후기에 홍승은 작가님이 댓글을 달면서 책방에 오고 싶다고 하셔서 성사된 북토크. 둥그렇게 둘러앉아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그날 밤의 풍경도 잊을 수 없다. 홍승은 작가님의 첫 북토크를 우리 책방에서 했다는 사실에 괜한 자부심을 느낀다. 


단골손님 지혜 씨가 최애 작가 정현주 작가님의 인스타그램을 보고 댓글 신청을 해서 당첨된 <픽스 유> 북토크도 있었다. 작가님과 지혜 씨가 나란히 순천만 습지를 걷는 모습을 보며 책방 단골손님의 소원을 이루는데 일조한 것 같아 뿌듯했던 기억도.

친구를 잘 둔 덕에 봄눈별, 이내처럼 멋진 아티스트들과 연결되기도 했다. 출판사 ‘생각의길’로부터 유시민 작가, 정훈이 작가의 신간 <표현의 기술> 북토크를 우리 책방에서 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는 장난전화인 줄 알았다. 도대체 어떻게 섭외한 거냐며 루트를 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우린 그저 우리를 선택해 준 김희숙 선생님께 감사할 뿐. 


유명세 높은 작가를 동반하고도 우리 부부를 먼저 배려하고 사려 깊은 태도를 보여주셨던 그분의 멋짐을 잊지 못한다. 한 번씩 생각이 나서 안부 연락을 해볼까 싶다가도, 너무 뜬금없을 것 같아서 말곤 한다. 카카오톡 프로필에 변함없이 쓰여 있는 ‘노력이 기쁨’이라는 다섯 글자에 매번 반하면서.

오랫동안 고민하던 ‘페미니즘 독서모임’은 출산 직전에 시작했는데, 안 했으면 어쩔뻔했나 싶을 정도로 내게 큰 힘이 되어준 모임이었다. 마지막엔 돌아가며 일일 책방지기가 되어주기도 하고, 책방 문 닫은 이후에도 꾸준히 함께했던 소중한 인연으로 남았다.


책방 1년 차 때 지역신문 시민 기자님이 책방을 소개하기 위해 인터뷰를 오신 적이 있다. 사려 깊은 마음에 보도 전에 원고를 먼저 보여주셨는데 ‘돈이 아닌 사람을 남기는 책방이 되고 싶어요’라는 헤드라인과 ‘책방 수입만으로는 생계가 어려워 영화강사일을 병행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발끈했던 기억이 난다. 책방에서 하는 각종 모임은 수익을 생각하기보다 친구를 사귀고 싶어서 하는 모임이 맞지만, 책방 자체가 돈벌이와 무관한 곳으로 비치는 것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차라리 당당하게 ‘우린 책 팔아서 돈 벌 거예요!’ 외치는 책방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책방 수입과는 별개로 영화예술강사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수정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조금도 오해받는 게 싫었던 그 시절, 필요 이상으로 화르르했던 기억에 그 뒤로 그분을 뵐 때면 늘 죄송한 마음이 든다. 책방은 그렇게 큰 수익을 내진 못했고, 내 곁엔 선물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남았다. 지나고 보니 그렇게 틀린 말들은 아니었는데 너무 까칠하게 굴어서 정말 죄송했어요. 하지만 그때 내겐 그런 정의들이 너무 중요했어요.




  *지금은 동네책방이 책을 주문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도 생기고 출판사에서도 적정 권 수 이상의 책을 주문하면 직거래도 흔쾌히 해주는 분위기다. 하지만 그 적정 권 수라는 게 작은 책방에는 부담이 되기도 하고 여전히 유통 시스템에는 구멍이 많다. 대형서점은 대부분 책을 위탁받아 매대에 진열하고, 팔리지 않을 것 같은 책은 출판사로 반품하는 게 디폴트다. 동네책방은 대부분 매입하는 방식으로 책을 주문한다. 그렇게 해야 조금이라도 낮은 공급률로 책을 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호의로 시작한 대형 출판사들의 동네 책방 직거래 역시 최소 주문 권수를 늘리고 이런저런 조건을 붙여가면서 작은 책방의 부담을 가중한다. 온라인 서점과 오프라인 서점의 기준을 달리하는 반쪽자리 도서정가제 역시 동네책방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아쉬운 정책인데 이마저도 몇 년 주기로 없애니 많이 논쟁이 되곤 한다.


이전 09화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