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보기엔 세상 편하고 여유로운 게 책방지기일 것 같지만 대부분의 책방지기들은 매우 분주한 일과를 보낸다. 매일 쏟아지는 신간 속에서 우리 책방에 소개할 책을 고르고 주문서를 넣고, 도착한 책들을 진열하며 서가를 재정비하고, 그러다 주인을 못 만난 책들에 마음을 쓰고, 어떻게 소개할지를 고민하고, SNS에 책방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포스팅을 하고, 독서모임과 행사 준비로 이곳저곳 연락을 하고, 그 사이 들어오는 손님맞이까지 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가버린다. 정산 업무와 택배 업무도 생각보다 많고, 도서관 납품이나 프로그램 준비로 시간을 써야 할 일도 많다. 정작 책상에 앉아 책 읽는 시간은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시간이 빨리 가는 날이 낫지, 모든 자영업자와 마찬가지로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다.
원래 하던 일과 책방 일을 병행하던 나에게 책방이 자아실현의 공간이라면, 퇴사까지 결행하며 시작한 성호에게 책방은 생업의 공간이었다. 나보다 더 오랜 시간 책방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은 그였는데, 그는 하루 종일 시간을 내고 품을 들여 공간을 꾸리는데 한 사람의 인건비도 안 나온다는 사실에 절망하곤 했다.
무엇보다 책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불쑥불쑥 들어와 ‘월세 얼마예요?’, ‘책 팔아서 얼마나 벌어요?’, ‘금수저예요?’ 무례한 질문들을 쏟아내며 자신의 시간을 뺏는다는 느낌이 들 때 가장 힘들어했다. 책방에 들어서자마자 책 보는 척 포즈를 취한 다음 찰칵찰칵 사진만 잔뜩 찍고 나가는 사람들이 ‘책방 빌런’ 중에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건 익히 알려져 있다. 내가 책방에 있는 줄 알고 왔다가 “아... 보통님 안 계세요?” 하며 실망하는 손님들을 대하는 것도 그에겐 또 하나의 스트레스였다. 책방을 닫으며 그가 남긴 이야기가 있다. 책방
은 책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 꾸려야 하는 것 같다고.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 깡성호는 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교통사고 트라우마로 운전은 절대 못하겠다던 그는 그날로 바로 운전학원을 등록하더니 일사천리로 면허를 땄다(연애 2년, 결혼 2년을 모시고 다녔는데... 이렇게 빨리 딸 수 있는 거였다니!). 그러더니 빨리 책방을 접고, 월급 나오는 직장에 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순천에 우리 육아를 도와줄 가족도 없는데 성호마저 직장에 묶여버리면 내가 더 힘들 것 같아 반대를 했다. 5월 출산 예정이었고, 학교에선 모든 일정을 내게 맞춰 시간표를 조정해 주었다. 3개월 쉰 후 8월부터 다시 수업을 나가기로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른 학교와 기관에서도 수업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수업을 더 많이 하면 되니 자기는 내가 없는 오전 시간에 아이 봐주고, 내가 돌아오면 책방 출근해서 책 쓰고, 그게 더 낫지 않겠냐며 그를 설득했다.
출산 후 몇 달은 그렇게 보냈다. 책방 영업시간을 단축하고, 요일별 당번을 정해 바통터치 하며, 숨 돌릴 틈 없는 일상을 살았다. 성호는 그렇게 시간을 쪼개어 쓰면서도 자신이 무능한 가장이 될까 봐 두려워했다. 그러다 낙안읍성 옆에 자리한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에서 계약직 직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거기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너는 취업하지 마! 돈은 내가 벌어올게!’ 하는 내가 멋있다고만 생각했지, 정작 내가 그를 ‘경력단절남성’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은 못했구나 싶어서였다.
성호는 박물관 일을 너무 즐거워했다. 매달 들어오는 작고 귀여운 월급의 소중함을 느끼며 만족해했다. 대신 책방 일은 아예 신경을 꺼버린 듯했다. 아이는 10개월부터 어린이집에 다녀야 했다. 성호가 근무하던 시민단체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이었고, 원장님과 선생님들이 너무 좋은 분들인 걸 알고 있기에 마음이 놓였다. 나는 오전엔 학교 가고, 오후엔 책방보고, 저녁엔 아이를 돌봤다. 고생하는 건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어린이집에서 가장 막내인 우리 아이가 제일 먼저 등원하고 가장 늦게 하원하는 날도 많았다. 내가 오후수업이라도 있는 날에는 책방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문을 닫아야 했다.
일과 육아, 책방 일. 세 가지 모두 다 잘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자꾸자꾸 구멍이 생겼다. 이음이든, 책방을 대신 봐주는 단골이든, 헛걸음하는 손님들이든, 정산을 기다리는 독립출판물 창작자든, 누군가에게 자꾸만 미안해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는 게 너무 싫었다. 그즈음의 나의 꿈은 ‘아무에게도 미안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거였다. 그날의 싸움은 밀린 전기요금 고지서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늘 성호가 챙기던 거라 나는 거들떠보지 않았고, 낙안으로 출근 후 책방 일에 마음이 식어버린 깡성호도 기억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니깐 내가 취업하지 말랬잖아! 니가 하던 일은 니가 책임져야지!” 했더니 “그래서 내가 책방 그만두자고 했잖아! 책방 계속하고 싶어 했던 건 자기니깐 자기가 책임져야지!” 이런 말이 돌아왔다. 서러움이 북받쳤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같이 시작한 책방을 혼자 그만둬버린 깡성호가 너무 야속해 향교 앞 주차장에서 동네가 떠나가라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 책방 접자! 접어! 우리가 행복하려고 시작한 일인데 책방 때문에 이렇게 싸우다니... 책방이 우리보다 소중한 건 아니니까 접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는 깡성호랑 일 같은 건 같이 안 하겠다고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며칠 후 어린이집 선생님과 면담을 하는데 “어머니, 하시는 많은 일들이 중요하겠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이음이한테도 가장 중요한 시기예요. 저는 어머니가 이음이에게 좀 더 신경을 써주셨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들었다. “네. 저도 알아요. 그래서 책방... 접을... 거예요... ” 말을 맺지 못하고 나는 끅끅대며 울었다. 이음이한테 미안한 마음 보다 책방을 닫기로 했다는 사실이 너무 슬퍼서 터진 울음이었다.
책방 폐업 소식을 전하며 이 자리에서 책방을 이어가실 분 있으면 연락 달라고 했다. 권리금 같은 건 애초에 받을 생각도 없었다. 그저 영업 종료 후에도 우리가 편하게 오갈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많은 사람들에게 연락이 왔다. 여수에서, 서울에서 이주를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이 책방 하나만 보고 이주하는 것은 추천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책방 단골이자 정말 책을 사랑하는 태양샘, 홍윤샘 가족에게 책방 터를 물려주기로 했다. 우리보다 인생 경험도 많으시니 적어도 우리가 힘들어했던 문제들로 인한 어려움을 겪지는 않으실 것 같았다. 그럼 난 미안하지 않아도 되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놀러 올 수 있겠다. 그런 마음이었다.
책방의 마지막 날엔 오픈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주었다. 대열오빠를 주축으로 한 나띵대열 멤버들이 불러준 전람회의 <우리>, 은정&정은 언니가 준비해 준 김윤아의 <Going Home> 두 곡을 듣고 꺼이꺼이 오열한 기억이 난다. 어쩜 이렇게 내 맘 같은 노래를 골랐을까. 귀엽고 멋진 친구들을 내 눈에 담았다.
나는 책방 오픈 때 함께 불렀던 이상은의 <둥글게> 노랫말을 손글씨로 쓴 책갈피를 그 자리에 함께한 손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둥글게 모여 앉아 행복했던 작은 가게’를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듬뿍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