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의 괴로움
ㄱ초등학교의 영화제가 다가오고 있다. 매년 이맘때면 나는 편집의 굴레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린다. 색색의 단풍이 물들고, 일 년 중 가장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계절. 하늘만 바라봐도 황홀한 계절에 골방에 앉아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다. 봤던 장면을 보고 또 보며 편집점을 찾고, 들었던 소리를 듣고 또 들으며 볼륨의 높낮이를 맞추다 보면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자막을 입력하고 위치를 정하고, 길이를 맞추다 보면 네 시간, 다섯 시간씩 훌쩍 넘어간다. 저린 다리를 풀며 자리에서 겨우 일어나 다음 일정으로 향하면 마주한 사람이 묻는다. “눈이 왜 그래?” 거울을 들여다보면 흰자 위로 새빨갛게 실핏줄들이 터져있다.
2013년에 순천, 광양 지역 3개 학교에 배정받으며 시작한 영화 수업은 대부분 제작 수업으로 이루어졌고, 교육을 신청한 초등학교에선 모두 학급 영화의 편집을 강사가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수업 결과물을 마무리하는 건 당연히 강사 몫이긴 한데 학교 축제 때 상영할 영상을 편집하는 건 강사의 의무가 아니라는 걸 나도 나중에야 알았다. 미디어센터를 통해 연결된 영상 제작 교육 역시 결과물의 완성도로 평가받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매년 10월, 11월이면 한꺼번에 편집해야 하는 영상이 10개가 넘었고 많게는 20개가 넘는 때도 있었다. 편집 무덤에 갇혀 “내가 21세기 남기남*이구만.” 하고 한숨을 쉰다. ‘나는 왜 일을 미리미리 하지 못하는가’ 원망했다가, ‘도무지 미리 할 수 없는 일정이었어.’ 합리화했다가 ‘내년엔 그만둘까?’ 자학하는 것이 이맘때의 의식이다.
내가 아마 편집을 좋아했으면 영상 제작자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따금 영상 제작 의뢰가 들어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생각해 주셔서 너무 감사한데 저는 영상 제작자가 아니라 교육하는 사람이에요. 큰돈을 받고 영상을 편집할만한 실력은 없어요. 하하. 대신 다른 분을 소개해 드릴게요.’ 한다.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면서 영상 산업은 더 큰 호황을 누렸다. 비대면 시대에 많은 강의와 행사들이 영상으로 대체되었고, 사람들은 빠르게 적응하기 시작했다. 플랫폼이 다변화되면서 너도나도 영상을 만들고, 채널을 만들었다. 그렇게 크리에이터가 된 많은 이들은 대부분 편집이 너무 재밌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게 너무 재미가 없다. 컴퓨터 앞에 가만히 앉아서 폭삭 늙어가는 기분,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을 실시간으로 느끼는 중.
사이드 프로젝트에 대한 욕구가 커지면서 학교 수업을 많이 줄였다. 특히 강사에게 편집을 요구하는 수업은 웬만하면 거절하고 있다. 시간 부자가 꿈인 나에게 편집은 시간 잡아먹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학교에 남아 있는 이유
감사하게도 ㄱ학교의 선생님들은 그냥 수업용 결과물이 아닌 영화제 상영용 작품을 편집하는 것이 강사에게 얼마나 큰 부담인지를 알아주셨고, 일찍부터 학교 차원에서 편집비를 따로 책정해 지급해 주셨다. 내 노동력에 가치를 매겨주고, 실질적인 보상으로 돌려주는 것. 내가 다른 학교 수업은 줄이거나 접으면서도 이 학교는 계속 남아 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렇게 마음을 써주셨던 선생님들과의 추억이 남은 곳이라서. 학교 교사와 외부 강사는 갑을 관계가 아니라 각각 다른 전문성을 가지고 존중과 협력을 바탕으로 함께 일하는 동료라는 것을 이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들을 통해 배웠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실제로 그런 분위기 속에 일하는 건 아주 드문 행운이다. 매주 수업을 들어가는 학교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고, 무례하고 일방적인 요구를 빈번하게 받으며, 자신들의 소통 오류와 행정 실수로 인해 강사가 피해를 받아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교사
들을 우리는 무수히 많이 만나기 때문이다.
출산을 앞둔 겨울,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을 때, 선생님들은 내년에도 꼭 우리 학교에 있어 달라는 편지와 함께 격려금을 모은 봉투를 건네주셨다. 차 안에서 하얀 봉투 위로 가지런히 쓰인 볼펜 글씨를 보면서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는 학교에 남았고, 만기를 채운 선생님들은 다른 학교로 떠나셨다. 학교에 돌아왔던 날, 학교에 은목서 향이 가득했다. 다른 학교로 떠나신 관리직 선생님이 정성껏 돌보시던 나무였다.
마지막 이유는 이 일이 주는 보람 때문이다. 영화를 편집할 때는 너무 괴롭지만 완성하고 나면 정말 뿌듯했고, 그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피로가 다 날아가는 것 같다. 그래서 학교 영화제, 교육 시사회 등 D-day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마감일이면서도 1년 치 고생을 보상받는 행복한 날이기도 하다.
그날엔 뒤쪽에 앉는 것보다 살짝 앞쪽이나 측면에 앉는 걸 좋아한다. 불이 꺼지고, 커다란 스크린에서 쏘는 불빛에 반사된 얼굴들을 힐끔힐끔 훔쳐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는 똘망한 눈빛들, 웃음꽃 만개한 표정들을 눈에 담는다. 불이 켜지고 나면 서로를 격려하는 뜨거운 박수! “우리 너무 잘했어요!”, “다음엔 이런 거 해봐요!” 이런 목소리들 역시 가슴에 저장해야 한다. 학생들의 아낌없는 표현을 마일리지 쌓듯 적립하고 나면 나도 모르게 또 내년을 기대하게 된다. 그런 것들에 중독되어 10년을 온 것 같다.
3년 전, 학교는 100주년을 맞았다. 오랜 시간 교문 앞을 우두커니 지키고 서 있던 소나무는 교장 선생님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결국 생명을 다했다. 그 자리엔 배롱나무 한 그루가 심겼다. 내게 특별한 사랑을 주셨던 선생님들이 모두 떠나고, 그 후에 새로 오신 선생님들도 떠나고, 나보다 훨씬 오래된 나무까지 떠나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남겨진 나는 새로운 선생님들과 새로운 나무를 맞았다. 소나무만큼 든든하진 않지만 꽤 근사한 기둥을 가진 배롱나무. 이제 막 옮겨 심어서인지 올해는 꽃도 늦게 피고 그만큼 작게 피었다. 내년에 활짝 핀 배롱나무 꽃을 보고 싶어서 일 년 더 남아야지 생각한 적도 있다. 이 학교에 남아 있으려는 이유가 이렇게나 많았다니.
*남기남 : 7080 시대에 활약한 어린이 영화감독. 다작으로 유명하며, 대표작으로 <영구와 땡칠이>가 있다. 저예산 액션 영화나 코미디언들을 활용한 B급 영화를 주로 찍었으며 여러 가지 기이한 방식으로 단시간에 촬영을 끝내 ‘필름을 남기남’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31년간 영화감독을 하며 미개봉 작품까지 합치면 130여 편을 제작. 얼핏 세어보니 나도 10년간 학생들과 만든 영화가 100편이 넘는다. 물론 장편과 단편이라는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