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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운 Oct 27. 2024

사이드 프로젝트

일과 일상의 지루함을 탈피하고자 매년 새로운 변화와 도전을 시도하는 편이다. 2020년엔 순천KBS 라디오에서 매주 영화 소개하는 코너를 맡았었다. 이번에도 누군가의 소개로 연결되어 공부 삼아 해보자, 하고 시작했다. 어찌 됐든 1주일에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원고를 쓰면 영화에 대한 전문성이 길러질 거라 생각했다. 라디오라는 매체를 좋아하기도 해서 재밌겠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시작한 것도 있다. 그런데 3주 차부터 유튜브 생중계를 시작하더니 그게 방송국 채널에 꼬박꼬박 업로드되었다. 생방송으로 떠들고 사라지는 것과, 그대로 박제

되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기에 준비하는데 부담이 가중되었다. 원고를 준비할 때부터 더 철저히 준비해야 했고, 팩트와 출처를 체크하는 과정에서 더 엄격해져야 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소개하는 기쁨이 컸고, 소수였지만 챙겨보고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고마웠다. 꾸준히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준비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고 다른 일에 지장을 줄 수 없어서 딱 1년을 채우고 그만두기로 했다.


2021년의 도전은 그림책 만들기였다. 전세 난민으로 살다가 임대 아파트에 당첨되었고, 입주 전까지 2년을 주택에서 살아보는 행운을 누렸다. 좋아하는 동네에 있는 집이라 누릴 수 있는 게 훨 많았고, 추억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5살 이음이는 이 집을 너무 좋아했는데 연말이 되면 이사를 가야 한다는 사실이 아이한테 미안했다. 아이한테 좋은 집은 어떤 집일까를 고민하다가 ‘아이는 엄마, 아빠랑 함께 있는 집이면 다 좋아하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과정과 마음, 추억을 담은 그림책을 만들어 아이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다. 오치근 작

가님의 가르침과 , 동기들의 기운을 듬뿍 받아 그림책을 완성했다. 그림을 따로 배워본 적이 없어서 시간이 많이 필요하긴 했지만, 내가 그림 그리는 과정 자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이가 좀 더 들면 그림 그리는 사람, 그림책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도 살짝 꿔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의 신세를 져야 하고, 때론 민폐가 되어야 하는 영화 작업과 달리, 그림책은 혼자만의 작업을 꾸준히 하면 되는 거라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내가 후자에 더 약하다는 사실은 올해의 도전, 이 책 쓰기 도전으로 날마다 체감하고 있다. 처음부터 책 쓰기가 목표는 아니었다. ‘삶은 글을 낳고, 글은 삶을 돌본다.’라는 은유 작가님의 문장을 좋아한다. 내가 쓰는 사람이 되면 내 삶이 더 나은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글쓰기는 어떻게든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해서 책상 앞에 나를 가져다 둬야 가능한 일인데, 나는 이게 가장 어려운 사람이었다. 수업과 미팅, 친구들과의 만남 등 밖에서 내가 가진 에너지를 최대치로 쓰고 오는 나는 집에 들어오면 배터리가 다 떨어져있다. 당최 집에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약속을 만들었다. 먼저는 순천시도서관에서 지원하는 ‘시민 책 쓰기 사업’에 신청했다. 11월까지 책을 만들기로 약속했다. 


글을 써야 하는데 써야 하는데 하며 시작을 계속 미루다 ‘편집자가 안내하는 에세이 수업’을 신청했다. 책방을 운영할 때 인연이 되어 SNS로 가늘고 길게 이어져 있던 김보희 편집자님이 사적인 서점과 함께 꾸린 수업이었다. 스스로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었는데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비대면 수업 5주, 대면 수업 1주로 총 6주간, 5명의 글쓰기 동료들과 함께 내 삶을 편집자의 관점으로 들여다보고, 어떤 글감을 건져 올리면 좋을지 고민했다. 편집자님은 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아이덴티티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고 했다. 자서전이 아닌 에세이 쓰기는 그 아이덴티티 안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감을 엮어야 한다고 하셨다. 영화 강사, 구 책방주인, 탈 기독교인, 10년 차 순천시민, 캘리그라피 작가, 딸, 아내, 엄마... 나는 이 중에서 10년 차 순천시민을 골랐다. 순천에서의 10년을 돌아보면서 복잡다난한 마음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내 안에서 이것부터 해소해야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쓰다 보니 결국엔 저 많은 걸 다 이야기하고 있구나 싶었다. 이게 에세이인지 자서전인지 모를 글을 쓰고 있었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하니 꾸역꾸역 쓰고는 있는데 10년 치 밀린 일기를 쓰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걸 종이책으로 만들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하고 싶어졌다. 하필이면 마감이 학교 영화제와 겹쳐서 한동안은 손을 놓고 있기도 했다. 그래도 완성하면 의미가 있겠지, 기록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거야... 포기하지 않으려 또 하나의 약속을 만들었다.


나의 고운 벗 은의언니와 은영이와 함께 수요일 목요일 아침, 얼리버드 온라인 모임을 시작했다. 6시 반에 줌을 켜고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한 시간 동안 고요하게 자기가 마음먹은 일을 하는 시간이다. 이름은 ‘아침고요수목회’라고 지었다. 넷째 아이 아침 수유를 하고 재우고 들어오는 언니는 최근에 신청한 글쓰기 수업 과제를 하고 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은영이는 바쁜 일상에 잔뜩 어질어진 책상을 정리하기도 하고, 독서모임에서 나눌 책을 읽기도 한다. 내 오랜 친구들의 집중하는 표정, 잔뜩 찌푸린 미간이 사랑스럽다. 저 미간에 깊은 골이 패여도 저 예쁜 눈이 흐릿해져도 나는 오늘을 기억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쓰다만 이야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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