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습니다. 후회되는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실패가 두려워서 책임 못 질 일들엔 선택을 유예하며 살았어요. 좀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지는 꽤 되었습니다. 변하지 않는 나를 탓하며 늘 같은 고민의 굴레 속에 있었어요. 새로운 모드로 세상을 살아가기엔 환경을 바꾸는 게 가장 쉬웠다는 걸 경험해 본 저였기에 또 한 번 그런 터닝포인트에 대한 갈망이 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방인으로 살다 훌쩍 떠나고 싶었는데 언젠가부터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여기 남아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책방의 단골손님이 서울로 발령을 받았다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러 왔을 때 느꼈던 그 생소한 기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순천시에 전무했던 청년 정책과 조직을 만들어 보려고 맨땅에 헤딩하던 H는 상처만 잔뜩 입은 채 서울로 향했습니다. 오디션을 보러 다니며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동안 순천에서 성실한 바리스타로 지냈던 배우 S도 결국 서울로 돌아갔지요. 집에서의 독립이 절실했던 동갑내기 친구 R씨는 자신의 공간을 꾸리기 위해 전주로, 페미니즘 독서모임을 시작할 때 순천대 신입생이었던 D씨도 졸업 후 고향 대전으로 돌아갔어요.
원두 한 봉지를 주문하면 책방까지 걸어서 배달해 주길 좋아하던 옥천 P씨는 아내와 함께 경기도로, 미디어센터에 취업해 4년의 시간을 한 동네에서 보냈던 대학 후배 C도 부산으로 돌아갔어요. 미디어센터 교육팀에서 오랜 기간 파트너로 일하며 나의 역량을 키워줬던 B쌤도 서울로 떠났습니다.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매번 가슴 한편이 휑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다음번엔 내가 떠나는 사람이길. 남겨진 쪽은 어쩐지 쓸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요. 내가 떠나왔을 때 남겨졌던 사람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까요?
그때의 난 모든 걸 버리고 훌쩍 떠날 수 있는 나 자신에 살짝 도취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것도 없는 남자랑 결혼을 하겠다 했을 때도, 돈 안 될 거 뻔히 알면서도 책방을 열었을 때도 용감한 마음 뒤편엔 오만한 마음이 함께 있었습니다. ‘하고 싶으면 하면 되지!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고! 진짜 마음을 속이지 말고.’
그런데 그건 마음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의 행운도 따라야 하는 거더라구요. 내가 가진 행운을 다 써버린 것 같아 우울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보통의 사람이 되고 싶다 했지만, 이렇게까지 평범하게 살고 싶진 않았는데 하는 생각에 서러웠던 날도 있었구요. 붙들고 있던 신념이 사라진 자리에 무얼 채워야 할지 몰라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시간들도 있었습니다. 이 글에 그런 것들을 담고 싶었는데, 반쯤은 성공하고 반쯤은 남겨둔 것 같아요.
네 번째 서랍. 책상의 제일 아래 칸, 자주 손이 가진 않지만 버릴 수 없는 것들이 가득 담겨있는 곳. 거기 담긴 마음들을 마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게 글이 될까 포기하고 싶었던 저를 응원해 준 친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지금 나는 떠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의 곁에 있습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마음, 여전히 내 손길이 필요한 가족들을 돌보는 마음,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마음, 이상과 현실 사이에 괴리를 느끼면서도 그저 이 시간을 견디는 마음들과 매일 만납니다. 그런 하루하루를 쌓아가는 것도, 떠나는 것 못지않은 용기라고 서로를 위로하며, 그 속에서 만나는 기쁨과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며, 내일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