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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운 Oct 27. 2024

좋은 손님이 되고 싶어요

#골목책방서성이다

그냥과보통이 사라진 자리엔 ‘골목책방 서성이다’가 들어왔다. 청소년들의 독서수업을 꾸려오신 태양샘과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이신 홍윤샘이 오랫동안 꿈꿔오신 책방이었다. 2018년 10월 9일 한글날,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책방은 바지런한 두 분의 손길로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책방에 손님으로 놀러 갈 때면, 태양샘은 만나는 모든 분에게 우리를 서성이다의 전신이라며 소개하셨다. 그럴 때마다 손사래를 쳤지만, 이 골목에 머물렀던 우리의 시간을 한 장의 역사로 의미화해주려는 사려 깊은 마음에 늘 감사한 마음을 품었다. 내가 너무 

사랑했던 공간에 가벼운 마음으로 놀러 갈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1년여의 시간이 흐르고 책방 건물주가 바뀌면서 서성이다는 다른 공간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새로운 건물주는 연향동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셨는데 책방 계약기간이 끝나고 나면 이곳으로 식당을 이전하고 싶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서성이다는 귀인으로부터 더 좋은 공간을 소개받았고, 문화의거리 은행나무 가로수길 한가운데로 예쁜 책방을 옮겼다. 책방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문을 열면 작은 뜰이 나오는데, 네모난 공간에 갇혀 있는 게 힘들었던 성호와 내가 가장 부러워한 공간이다. 각종 모임이 이뤄지는 지하 벙커는 여섯 살 

이음이가 최고로 좋아하는 아지트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고전 독서 모임, 시 낭독 모임, 페미니즘 독서 모임, 전라도닷컴 읽기 모임, 청소년 인문학 모임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지역의 독서문화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로만티코

인스타그램 피드에 운영 공지와 함께 ‘어디서든 필요한 커피와 디저트 하세요’라는 다정한 인사를 남기는 로만티코는 커피뿐 아니라 베이커리도 맛있어서 언제나 손님이 와글와글, 서두르지 않으면 원하는 빵을 먹지 못하는 인기 카페이다. 우리와 비슷한 또래의 부부가 운영하는데, 8살, 6살 깜찍한 자매님들 육아와 병행하다 보니 오픈일이 들쭉날쭉하기도. 디저트가 빨리 소진되는 날은 일찍 문을 닫는 날도 많아서 갈 수 있을 때, 꼭 가야 하는 곳이다. 믹스커피를 좋아하는 깡성호는 커피값에 인색한 편인데, 로만티코에 첫 방문한 날 사장님이 성호의 첫 책 <한국기독교흑역사>를 잘 읽었다고 먼저 인사를 건네주신 후로 여기서만큼은 지갑을 잘 여는 편이다. 나는 너무 달달한 디저트나 먹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한 토핑이 많이 들어간 베이커리를 선호하지 않는데 로만티코엔 딱 내가 좋아하는 담백한 맛과 모양의 빵이 많아서 좋아한다. 여기서 나온 소금빵을 미리 겟한 날에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이음이의 표정을 볼 수 있다.



#카페짙은

이 동네에 또 하나의 인기 카페 ‘짙은’. 오래된 건물을 구석구석 수리해 새하얗고 모던한 분위기로 새단장한 공간이 들어섰을 때, 사실 난 속으로 씰룩거렸다. ‘흥! 이 동네는 이런 느낌이랑 어울리지 않는데… 너무 혼자만 ‘새삥’ 느낌이잖아. 내 취향 아니야! 나는 낡고 오래된 걸 좋아하지!’하고는 지나치곤 했다. 내가 가지 않아도 카페는 늘 북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와의 약속 때문에 발길을 들인 짙은에서 나는 감탄에 감탄을 연발했다. 구석구석 조화롭게 장식된 생화들, 예쁜 접시와 조리도구들, 모든 것이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모습을 보며 마음에 안정감을 느꼈다. 나, 이런 거 좋아하네… 정리정돈엔 취미가 없는 내 주변은 늘 어지러운데, 누군가가 잘 가꾸어둔 공간에서 시선 닿는 곳마다 눈이 시원해지고 마음이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로만티코에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흐를 때 남몰래 기뻐하는 행복을 누린다면, 짙은에서는 평소에 내가 듣지 않는 좋은 음악이 흘러 내 마음을 잠시 먼 곳으로 보내주는 기분이다. 동네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도 자주 찾지만 조용한 아침 시간, 아직은 북적이기 전의 짙은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도 작은 행복이다. 케잌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내가 보장하는 케잌 맛집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놀러 온 친구들이 여기 케잌을 먹고 돌아가면 생각날 것 같은 맛이라고 했을 때의 뿌듯함이란.



#어스먼트

문화의거리는 아니지만 꼭 소개하고픈 카페가 있는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어스먼트다. 국가정원 근처 오천지구라는 신도심에 오픈한 신상 카페인데 커피맛과 분위기, 사장님들의 손님을 대하는 태도까지 흠잡을 곳이 없는 멋진 곳이다. 한쪽 벽면은 전체가 유리문과 창으로 되어있는데 오후의 햇살과 함께 커다란 나무들의 그림자가 매장 안으로 길게 들어오면 공간 전체가 작품이 되는 듯하다.

문화의 거리에 서식한 지 오래되다 보니 거기 있는 카페에 앉아 있다 보면 꼭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합류해서 수다를 떨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처럼 혼자 집중해서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나 조용히 책 읽으면서 쉬고 싶을 땐 조금 떨어진 동네에 단골 카페로 향한다. 센스 있는 사장님들은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해 주신다.

옆자리에 떠들썩한 손님들이 자리한 날에는 하지 않아도 될 사과를 대신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손님이 더 반갑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마음을 써주는 게 고맙기도 해서, 길게 머무는 날엔 꼭 두 잔을 시키려고 한다. 그럼에도 사장님의 서비스 차나 쿠키가 더 빠르게 내 테이블에 도착하는 날도 있다. 나는 그 따뜻한 것들에 나를 응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다.



책방 점포 정리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냥과보통이 사라지는 걸 아쉬워했다. “그러게. 진작에 자주 와서 책 좀 많이 팔아주지 그랬어요?!” 차마 입 밖으론 못 꺼내고 마음에 묻어 둔 말이었다. 손님들이 주신 사랑은 충분했다. 처음부터 큰돈을 벌거라 예상하고 차린 것은 아니었고, 좀 더 젊을 때 우리가 하고 싶은 걸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거라 후회는 없다. 다만 좋아하는 공간을 지키는 건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카페와 식당, 내가 응원하는 책방,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공간들이 오래오래 자리를 지켜주었으면 한다. 내 친구들이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그 가치를 알아주고 거기에 돈과 시간을 쓰는 ‘소비자’, ‘이용자’가 필요하다는 걸 자영업을 경험해 보고 뼈저리게 느꼈다. 너도나도 사장님이고, 생산자이고, 기획자인 생태계에서 파이 다툼에 열 올리는 것은 서로 피곤한 일

이다. 눈앞의 지원사업에 매몰되어 모두가 똑같은 색깔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각자 자기가 잘하는 걸 믿고, 진심을 다하며 자기 파이를 키워 나가야 시장 전체가 커진다고 믿는다.


책방 문을 닫은 후 새롭게 가꾸고 있는 꿈이 있다. 바로 좋은 손님이 되는 것. 책방에 앉아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존재. 내가 고른 것들을 세심하게 살펴봐주고, 내가 정성을 쏟은 부분을 알아채 주고, 내가 꾸린 공간에서 행복해하는 손님. 그리고 무엇보다 매출을 팍팍 올려주는 손님! 그런 손님이 되고 싶다. 그러려면 더 열심히 일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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