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공부했지만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다. 음악도 인디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영화는 좀 더 비주류 쪽. 편식이 심한 편이다. 대신 오랜만에 보고 싶은 영화가 생기면 그 영화는 꼭 영화관에 가서 보려고 한다. 어쩐지 영화를 대할 때는 좀 겸손해지고, 뭔갈 배우려는 자세로 임하게 된다. 그게 작가의 예술혼이든, 독창적인 연출력이든, 시대를 앞서가는 스타일이든, 배우의 눈부신 열정이든, 스태프들의 값진 노동으로 이루어낸 하모니든 하나라도, 아니 모든 것을 흡수하겠다는 자세로 보는 편이다. 불 꺼진 극장 안에서 내가 모르는 타인들과 같은 장면에 함께 반응하며, 이 영화가 지금 우리에게 온 이유와 의미를 발견하며 보는 것을 좋아한다.
공간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되면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도 사실 독립예술영화전용관이었다. 부산에 살 때 주중에 잠시 여유 시간이 생기면 국도 예술관 상영시간표를 찾곤 했다. 그곳에서 만난 영화들은 내 세계와 사고를 확장시켜 주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나며 타자에 대한 이해를 넓혀갈 수 있었다.
순천에서의 삶의 만족도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내게 유일한 아쉬움이었던 것은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미디어센터에서 정기 상영회를 통해 독립예술영화를 상영해 주긴 했지만 무료 상영이어야 한다는 제한 때문에 현재 개봉 중인 영화는 볼 수 없었고,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작품을 보려면 광주나 전주까지 가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 내가 사는 도시에선 영화 선택권이 없구나... 나는 문화 소외 지역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여기 순천에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영화관 시간표를 도배하고 있는 영화 말고 그 틈을 비집고 어렵게 제작된 영화들, 혼자 말고 함께 보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게 보통의 극장.
책방을 연 첫 해에는 서울의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인연이 된 ‘다큐유랑’ 팀과 함께 맥주 마시며 영화 보는 작은 상영회를 두 차례 가졌다. 첫 번째 상영작은 공미연 감독님의 <술 먹는 다큐>, 두 번째 상영은 김수목 감독님의 <니가 필요해>. 모두 10명 남짓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웃고 울고 했던 밤. 오랫동안 품어왔던 작은 꿈 하나를 이룬 것 같아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두 번째 겨울엔 <야근 대신 뜨개질>의 박소현 감독님, <할매,서랍>의 김지곤 감독을 차례로 모시고 공동체 상영과 감독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모두 신기하게 이어진 인연들이었다.
책방이 세 살 되었을 때엔, 상영작을 알려주지 않고 이보통의 큐레이션을 믿고 참여하는 보통의 극장을 열었다. 내가 고른 영화를 함께 보고 싶은 마음은 컸는데 우리 공간에서 정식으로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선 절차도 까다롭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내가 비용을 지불하고 다운로드한 영화를 함께 보는 자리였는데 아무리 참가비를 안 받는다고 해도 그 영화의 제목을 알리는 것만으로 그 영화가 가진 이미지 자산을 우리 책방 마케팅에 사용하는 것 같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아예 블라인드로, 당일에 현장에 와서야 어떤 영화인
지를 알 수 있는 상영회를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똥배짱이었나 싶다. 아무도 안 오면 혼자 보는 거지 뭐 그런 마음. 다행히 혼자 보는 날은 없었다.
보통의 극장 마지막 상영작은 나의 대학교 졸업작품이었다. 경남 산청의 한 농촌공동체에서 젊은 농부를 꿈꾸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년이 주인공인 14분짜리 다큐멘터리였다. 책방 폐업을 준비 중이었고, 지금 아니면 못할 것들을 하나씩 해보는 시기였다. 나조차도 부끄러워서 졸업 이후 거의 거들떠보지 않았던 영화였는데 12년이 흘렀으니 다시 꺼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내 작품이라지만 허락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당시 열여섯 살 소년의 모습으로 박제되어 있는 진하. 어느덧 이 친구는 멋진 농사꾼이자 선생님이 되어 있었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와 함께 책방에도 놀러 오기도 했었다. 전화를 걸어 사정을 말하니 소리를 꽥 지르며 부끄러워하면서도, 상영을 허락해 주었다. 너무 갑작스럽긴 하지만 혹시나 그날 와줄 수 있냐고 물으니 그건 어렵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은 폭풍우가 몰아쳤다. 이 비바람을 뚫고 누가 올까... 오늘이야말로 내가 혼자 영화 보는 날이 되겠구나. 차라리 혼자면 낫지 잘 모르는 손님과 둘이 되면 좀 많이 어색할 것 같다. 그럼 자연스럽게 상영작을 바꿔야지... 두 명, 세 명 자리를 채우고, 영화를 소개할 타임이 되었다. 책방 단골이자 보통의 극장 단골 두 명, 그리고 처음 온 사람이 두 명 정도였던 것 같다. “이 비를 뚫고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보통의 극장 마지막 날인데요, 함께 보실 영화는... 음...” 말하면서 계속 머리를 굴렸다. ‘이 사람들이 실망하면 어쩌지... 멋지고 좋은 영화 보고 싶어 왔을 텐데...’ 이미 내 컴퓨터엔 플랜 B 상영작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국 나는 플랜 B 영화 제목을 댔다. 그때 책방 문이 열리더니 민망한 표정의 진하와 그의 어여쁜 아내 소리씨, 귀여운 아들 이우가 함께 들어왔다. 산골에서 진하의 트럭을 타고 한 시간 넘게 빗길을 달려와 준 것이다.
관객들에게 사정을 실토하고 양해를 구했다. 모두 내 영화를 보는 것에 찬성했다. “그래요, 여러분. 이 영화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거예요.” 뻔뻔하게 이야기했지만 식은땀이 줄줄 났다. 14분의 상영시간 동안 나는 화면 속의 어린 진하와 그를 바라보는 어른 진하, 그리고 소리씨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화면 속 진하는 마냥 해맑았다.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다 사진을 찍고, 길을 걷다 땅에 떨어진 열매도 아무렇지 않게 주워 먹고, 예쁜 꽃을 발견하면 감탄사를 연발하고, 작은 풀과 들꽃들을 그리는 것도, 자기만의 레시피로 요리하는 것
도 좋아하고, 무엇보다 농사에 진심이었던 소년이 있었다. 현실의 진하는 최대한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고, 소리 씨는 소년 시절의 남편의 모습을 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우리도 그들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 많은 신혼부부였고, 이따금 만나면 그런 고민을 나누곤 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 자리에 온 관객들과 함께 간단한 담소를 나누고 꽤나 진지한 이야기를 함께 했던 것 같다.
부산을 떠나기 직전, 지도교수님을 만난 적이 있었다. 서류를 준비하러 학교에 갔다가 교수님 연구실에 들러 인사를 드렸는데 그때 교수님과 이런 대화를 나눴었다.
“너 다큐 좋았는데... 그 친구 아직도 연락하니?”
“네. 지금도 종종 연락하고 아주 가끔 보기도 해요.”
“그게 몇 년 전이지? 그 친구 이제 몇 살이야? 지금도
거기 살아??
“진하요? 스물두 살이요. 보기엔 더 들어 보이지만... 지금
거기 대안학교에서 농사 선생님 하며 닭 키우며 잘
지내고 있어요.”
“그때 촬영본 테잎 다 가지고 있니?”
“허허.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죠. 허허”
“너 그걸로 영화 찍어라. 이거 장편 되겠다 얘.”
“네? 제가 영화를요? 무슨. 못해요 교수님.”
“내 말 들어. 예술강사? 그건 나중에 언제든 할 수 있어.
근데 영화는 할 수 있을 때 해야 해.”
학부 때 나는 칭찬을 그리 많이 받는 학생은 아니었다. 성적은 좋은 편이었지만 영화를 너무 사랑하는 게 느껴지는 동기들 사이에서 여긴 내 길이 아니구나... 하며 늘 다른 길을 찾는 학생이었다. 졸업작품도 최대한 다른 사람 피해 안 끼치고 싶어서 적은 스태프로 제작할 수 있는 다큐를 선택했고, 그렇게 촬영 간 곳에서도 내가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눈치만 보다가 중요한 장면들은 카메라를 켜지도 못하고 넘어갈 때가 많았다. 엄격하게만 느껴졌던 교수님이 내 작품이 좋았다고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도 기뻤다. 8할은 주인공 캐릭터 때문인 걸 알고 있었지만. 그즈음의 진하가 십 대 때보다 더 거대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것과 여러 매체에서 취재를 다녀가며 공동체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교수님, 저는 배포가 작아서 감독은 못할 것 같아요. 이제 와서 진하를 다시 영화 소재로 삼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꿈보다 우정을 택할래요.”
“그래,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왜 너희 동기들은 영화과 나와서 영화를 안 찍니?! 부산에 지금 좋은 프로젝트 사업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저는 아닌 것 같아요. 하하”
그렇게 말씀드리고 나왔지만 그날 밤엔 잠시 다큐멘터리 감독이 된 나를 꿈꿔보기도 했다. 심장이 두근거려 혼났다.
책방에 둘러앉아 그날의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때 내가 예술강사가 아닌 다큐를 선택했다면, 카메라를 들고 다시 진하를 찾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둘 다 그러지 않기를 정말 다행이라고, 그래서 지금 우리가 여기 같이 있을 수 있는 거라며 깔깔 웃었다. 책방의 시간을 정리하며 마음이 헛헛하던 차에 또 한 번 마음이 후끈해지던, 선물 같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