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30일. 책방의 시작은 찬란했다. 조용한 골목길에 노란 불빛이 켜졌고, 우리를 축하해 주기 위한 사람들이 몰려왔다. 우리 부부가 책방 운영에 대한 소박하고도 야심 찬 포부를 발표했다. ‘와일드허니파이’라는 공간에서 만난 멋진 친구들이 축하 공연도 해주었다. 본업만큼이나 음악을 사랑해서 함께 모여 합주도 하고 버스킹도 하는 우리 동네 뮤지션들이었다. 그날은 깡성호도 기타로 거들었다. 나는 플레이리스트에 두 곡을 요청했다. 이상은의 <둥글게>와 브로콜리너마저의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작은 꿈을 꾸는 사람들’을 지켜주던 공간,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공간을 꾸리고 싶다는 마음을 담았다. 애초에 이 동네에 잘 어울리는 책방을 만들고 싶었고, 조용한 주택가 골목에 자리한 가게라 주민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컸다.
책방 이름은 ‘골목책방 그냥과보통’으로 정했다. ‘그냥과보통’은 순천에서 만난 귀한 동생 목련이의 오랜 친구들 모임 이름이었다. 책방 이름을 고민하던 중 목련이의 SNS 피드에서 대학 시절 친구들과 편안한 모습으로 남긴 사진 아래 ‘그냥과보통’이라는 다섯 글자를 발견하고 너무 멋진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던 던 이름은 ‘늦봄’이었는데 모두가 공평한 따뜻함을 누릴 수 있는 늦봄이란 계절을 좋아해서 고른 이름이었다. 문익환 선생님의 호가 늦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더 좋아했다가 같은 이유로 포기했다*. 책방 이름에 너무 거창한 의미를 담고 싶지 않았고, 좀 가볍고 산뜻한 이름이었으면 하던 중에 ‘그냥과보통’을 만난 것이다. 목련이와 친구들의 허락을 구하고 그 이름을 빌려왔다.
처음엔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사람들이 누가 ‘그냥’이고 누가 ‘보통’이냐는 질문을 많이 했다. 그래서 입에 붙는 대로 ‘강그냥’과 ‘이보통’이라고 농담처럼 얘기했는데 어느새 우리의 닉네임이 되어 있었다. ‘이보통’. 불릴수록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아버지는 한글 이름을 짓는 사람이 별로 없던 시절에 딸의 이름을 ‘이로운’으로 지으시고 무척 흡족해하셨다. 나는 이름 덕을 많이 보면서 자랐다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에는 새 학기 출석을 부를 때마다 늘 주목받는 아이였고, 다행히도 그런 주목이 싫지 않았다. 다만 조금만 잘못해도 ‘해로운’ 아니냐는 농담을 듣기 일쑤였는데, 그게 싫어서 언제나 말과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려고 애썼다. 언젠가부터는 그 이름의 무게가 부담스러워졌다.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쉽지 않은 과제로 다가왔다. 이 특별한 이름은 익명성 보장이 안 된다는 큰 단점이 있었는데, 작은 지역사회에 살면서 그 불편함이 더 크게 체감되었다.
친구들은 서로를 닉네임으로 부르는 일이 많았다. 자기가 불리고 싶은 이름을 스스로 정하거나 친구들이 부르는 별명을 이름 대신 쓰기도 했다. 별명만큼이나 특이한 이름을 가진 나는 어릴 적부터 별명이 따로 없었고, 좀 큰 다음에도 본명의 아우라를 넘는 닉네임을 짓기가 어려워 그냥 이로운으로 살았다. 그런데 어쩌다 생긴 ‘이보통’이라는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든 것이다. ‘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가장 보통의 삶을 살고 싶어.’라는 생각이 강하게 나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전남지역에 새로 생긴 작은 책방을 주목해 주는 매체도 많았다. 비슷한 시기에 오픈한 책방 ‘심다’와 함께 이런저런 지면에 인터뷰도 하고 지역 뉴스에도 소개되기도 했다. 심다는 우리 보다 한 달쯤 후에 책방 문을 열었는데 준비하는 과정에 서로를 알게 되어 응원하기도, 견제하기도 했던 묘한 사이다. 또래의 젊은 부부가 옆 동네에 비슷한 규모의 책방을 열다 보니 의식이 안 될 수 없었다. 취급하는 책의 종류를 달리하고 고객 타겟팅을 달리해 최대한 경쟁과 비교를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좁은 바닥에서 오가는 손님들은 겹치기 마련이고 취향이라는 것도 칼로 무 자르듯 가를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SNS에 올리고자 했던 신간 소개를 저쪽에서 먼저 해버리면 괜히 따라 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포기해 버릴 때도 있었고, 책방에서 하고 싶었던 모임이나 이벤트도 상대방이 하면 이쪽에선 마음을 접어야 할 때도 있었다.
심다의 주은샘과 나는 나이도 같고, 결혼도 같은 해에 했고, 부산에서 이주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심지어 ‘사진’과 ‘영화’로 분야만 달랐지 학교예술강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까지 같았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같은 병원 같은 의사 선생 님께 진료를 기다리다 마주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어떤 날에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이웃이자 동료였다가, 또 어떤 날에는 서로의 마음을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경쟁자였다. 천천히 나의 속도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며 존재하고 싶었는데 심다 부부의 부지런함을 지켜보며 괜히 조급한 마음이 밀려올 때마다 미움의 싹이 자라기도 했다.
옹졸한 나와 달리 주은샘은 늘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 차라리 아주 나쁜 사람들이었으면 욕이라도 할 텐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럼 결국 못난 사람은 나여야 했으니까. 누군가에게 이로운 사람은 못될지언정 해로운 사람만은 안되고 싶었는데, 그것 역시 맘처럼 쉽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어도, 내가 가진 포지션 자체가 누군가에겐 불편함을 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작은 도시에서 파이 싸움을 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감정. 그 감정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더라도, 어떻게 소화시키는가가 중요한데 그땐 그게 너무 어려웠다. 책방을 그만둔 지금은 서로를 응원하는 친구로 잘 지내고 있다. 모든 건 다 맘 넓은 주은샘 덕분이다. 지금 같은 마음이라면 더 좋은 이웃이 되어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이따금 해본다.
*나중에 제주에 ‘만춘서점’을 알게 되었을 때, 아 난 왜 이렇게 이쁜 이름을 생각지 못했을까 찰나의 후회를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