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책방 그냥과보통 1
2015년 4월 18일. 우린 결혼식을 올렸다. 스몰웨딩, 이색 웨딩이 주목받기 시작한 때였고, 우리도 허례허식 없이 간소하게 결혼을 준비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결혼식을 하기 위해선 시간과 정성과 비용을 더 많이 들여야 했고, 부모님을 설득할 용기도 필요했는데 우린 그 모든 게 부족했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하루를 위해 많은 에너지를 쓰기보다 앞으로 우리가 잘 사는데 쓰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나는 원래 보여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작은 것 하나하나에 의미 부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성호를 만나면서 그런 부분이 많이 캐주얼해졌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늠한 후, 아닌 것에는 무심해지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결혼식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원가족의 마음 상하게 하는 일 없이 원만하게! 우리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합리적으로! 그렇게 우린 부산의 한 웨딩타운에서 윤달 할인을 대폭 받아 평범하고 그럴듯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 성호의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는데, 짧은 기간 큰 일을 함께 겪으며 가족의 의미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신혼여행은 프랑스 파리와, 이탈리아 3개 도시로 다녀왔다. 영어도 잘 못하고, 해외여행 경험도 부족한 우리였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가겠냐는 마음으로 선택한 여행지였다. 항공편과 숙소만 예약해주는 세미패키지로 예약했기에 이동시간 외 모든 일정은 우리 자유였다. 신혼여행지를 선택할 때 장기 연애 커플은 관광지를 선호하고, 단기 연애 커플은 휴양지를 선호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사귄 지 얼마 안 된 커플은 서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기 때문이고, 오래된 연인은 둘 만 있으면 싸우기 때문에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며 새로운 것을 구경하는 여행이 좋다는 거였다. 연애 2년 후 결혼을 준비한 우리가 휴양보다 관광을 선택한 건 또 다른 이유였다. "우리 휴양은 순천에서 많이 했잖아! 도시 구경하자! 큰 도시!"
어쩌면 그때부터 조금씩 순천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3년 차가 되니 많은 것이 익숙해지고 식상해졌다. 인구 28만의 도시. 면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n번째로 큰 도시라지만 사람들이 모여사는 도심은 20분 내외, 끝에서 끝까지 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 안을 맴맴 도는 생활에 우리는 조금 싫증 나있었고. 새로운 변화를 원했다. 성호는 무엇보다 자신의 관심사를 함께 나누고 자신의 연구를 지지해줄 커뮤니티가 없는 것에 가장 목말라했다.
파리에서 우리는 영화와 소설의 배경이 된 곳을 찾아가 보기도 하고, 동네의 오래된 카페, 현지인들로 가득한 재즈클럽, 거리에서 무심히 펼쳐지는 플리마켓 등을 둘러보았다. 에펠탑, 센강, 오르세 미술관 등 랜드마크도 좋았지만 우리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건 골목골목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작은 책방들이었다. 처음엔 지도를 보고 가고 싶은 책방을 찾아갔고 (가령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같은.) 좀 지나선 "어? 이런 곳에 책방이 있네!" 하며 신기해서 들어가 보고, 나중엔 만날 때마다 반가워서 들어가 봤다. 작은 책방이 주는 독특한 생기에 매료되었고, 골목을 거닐다 자연스럽게 책방으로 걸음해 그 공간을 누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이 서점은 되게 오래된 서점 같지? 이런 자리에 이렇게 작은 서점이 계속 자리할 수 있다니..."
"우와! 여기도 서점인가봐! 밖에서 봤을 땐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여긴 디자인 관련 책만 파는 전문서점인 것 같아."
"홀로코스트 전문서점? 와! 이런 곳이 있다니!"
우리나라엔 온라인 서점, 초대형 서점이 발달하면서 골목을 지키던 서점은 물론 지역을 대표하던 중형 서점도 줄줄이 폐점을 하는 실정이었는데 이렇게 다양한 색깔의 서점이 골목골목 존재할 수 있다는 게 놀랍고 부러웠다. 머지않아 우리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작고 특별한 서점들이 다시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해 여름휴가로 떠난 제주여행에서 구좌읍 종달리를 방문했다. 대학시절 만나 서로의 취향과 고민을 공유하며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소중한 친구 은영이(a.k.a앨리스)의 추천으로 선택한 동네였다. 당근과 소금밭으로 유명한 작은 시골마을에 작은 책방이 있다는데, 그 이름마저 너무 귀여운 '소심한 책방'이라는 거다. 고불고불한 골목을 들어가 만난 책방의 첫인상은 "와! 정말 작다!" 두 번째 인상은 "여기 있는 책들 다 좋은 책인 것 같아!"였다. 책방을 나서면서는 이런 대화도 나누었다.
"이렇게 한적한 시골마을이라도 이런 책방 하나만 있으면 살만하지 않을까?"
"그치. 책방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아주 큰 차이지!"
"우리 동네에도 이런 책방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게. 그냥 우리가 차릴까?"
"좋아! 하하하!"
이렇게 농담처럼 시작된 책방 이야기는 각자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그날 밤 숙소에서 우린 다시 진지하게 이 이야길 이어갔다. 소심한 책방에서 산 책보따리를 함께 풀었다. 우리를 가장 사로잡은 건 독립출판물 <계간홀로>와 남해의봄날에서 나온 <작은 책방, 우리 책 좀 팝니다>였다. <계간홀로>는 '짐송'이라는 필명을 썼던 이진송님이 홀로 기획해 7호에 이르게 된 작은 간행물이었는데, 비연애인구를 위한 잡지를 표방한 B급 매거진이었다. 처음엔 호기심에 들여다보게 되었다가 필진들의 필력에 놀라고, 이 작은 책이 주는 수많은 통찰에 놀랐다. 세상에 이런 책이 있다니! <작은 책방, 우리 책 좀 팝니다>는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공간을 꾸린 전국의 작은 책방들을 조명하고 있었다. "와! 이런 책방도 있구나!", "다음에 우리 여기 꼭 가보자!", "좋아! 전남엔 없나?" 하며 책 뒤에 실린 '전국 작은 책방 지도'를 펼쳐보았다가 우리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그 지도엔 전남에만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전남이라고 작은 서점이 아주 없진 않았을 테지만, 이 책에 실린 책방들과 궤를 같이하는 독립 책방은 아직 없는 듯했다.
순천에서 이런 책방을 하는 건 무모한 일일까?
순천 살이 3년 차. 앞으로의 거취를 두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둘이 함께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리에 가서 살까? 집 없이 이 나라 저 나라 여행하듯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아. 난 그건 별로. 나는 이제 떠돌아다니는 생활 그만하고 정착하고 싶어. 그래 그럴 수 있겠다. 제주도는 어때? 너무 좋지! 나도 사실 제주에 살면 좋겠다는 생각하고 있었어. 그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제주에 살고 싶은 이유는? 아름다운 자연, 그 속의 여유와 자유로움? 끄덕끄덕. 근데 그런 건 순천에도 있지 않나? 음… 보다 소신껏 살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 끄덕끄덕. 그 또한 순천에서도 가능할 것 같은데? 주변에 사람들만 잘 둔다면! 맞아, 맞아! 만약에 말이야. 우리가 진짜로 책방을 한다면 마음 맞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그렇게만 된다면 순천 생활이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아! 문화의 거리 어때? 좋지! 공방도 많고, 젊은 예술가들도 많고, 여행자들도 오고.
성호는 헌책방 주인이 되는 게 꿈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외롭게 지내던 시절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보물 찾기를 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고. 나중에 다시 얘기해보니 그건 거의 빈말에 가까운 작은 소망이었는데, 그의 이야기를 너무나 귀담아듣는 나는 그 말을 잘 간직해 두었었다. 내게도 그런 빈말 같은 소망이 하나 있었는데 작은 마을에 문화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1층에 카페와 갤러리 그리고 예술영화관, 2층에 마을 도서관, 3층에 게스트하우스를 만들자며 친구들을 부추겨보기도 했다. 자본이라곤 1도 없으면서 열정과 패기가 넘쳤던 시절. 그 시절이 지나고 내 꿈은 현실 앞에 쪼그라들었지만 '동네에 작은 사랑방 하나' 이런 모양으로 작게 남아 있었다. 작은 책방. 책방이라면 우리 두 사람의 꿈을 함께 담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우리가 좋아하는 동네에 우리가 바라는 책방을 만들자!
순천에 돌아오자마자 성호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하나 만들었다. 이름하야 '낭만책방 만들기 프로젝트'. 하하하. 그의 머리에서 나온 네이밍이라기엔 너무 물렁해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래. 너무 낭만적인 시작이었지. 우리는 비공개 페이지에 각자가 알아본 정보들을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한국출판문화진흥원에서 주최한 서점 창업 아카데미를 수강하기 위해 휴가를 내고 서울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여행책방 일단멈춤 사장님의 특강이 가장 인상 깊었다. "사장님 블로그 글 너무 좋아서 다 읽었어요."라며 인사를 건네자 다정한 목소리로 "책방 이름은 정했어요?" 하고 물어오셨다. "일단 '늦봄'책방이라고 지어보았는데 바뀔 수도 있어요."라고 답하니 "예쁜 이름이네요." 하셨다. 공간을 알아보고 있다는 우리에게 "꼭 좋은 공간 찾길 바라요."라는 인사도.
서울에서 돌아오는 길. 기쁨과 두려움이 함께 몰려왔다. 우리라고 늘 사이가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서로가 정말 다른 사람이란 걸 날마다 확인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차이가 아득하게 느껴질 무렵 찾은 이 작은 교집합이 너무나 소중했다. 그러나 나는 변덕이 심한 자라. 오늘 이만큼 꿈을 꾸다가도 내일이면 쉽게 절망하기도, 훌훌 털어버리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이러다 내 마음이 바뀌어서 책방 안 하고 싶어지면 어떡하지? 성호가 많이 실망하겠지? "이럴 거면 애초에 일을 크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이제 와서 그런 소릴 하면 어떻게 해?!" 하며 화를 내겠지?'
- 근데 말이야… 만약에… 정말 만약에 내가 책방 안 하고 싶어 졌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
- 왜? 안 하고 싶어?
- 아니. 이러다 마음이 변할 수도 있잖아…
- 안 하고 싶으면 안 해야지.
- 화나지 않을까? 이렇게 시간 쓰고 돈 쓰고 준비했는데…
- 아니. 나는 자기랑 이렇게 책방 여행도 다니고, 강의도 듣고, 이야기 나누고 하는 자체가 너무 좋은데? 우리가 이러다 만다고 해도, 당장 오늘 그만둔다고 해도 상관없어.
와… 내 눈에서 하트가 막 쏟아지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용기가 불타올랐다. 이런 마음이라면 무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우리가 같은 꿈을 꾸고 있잖아.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행복하잖아. 나중 일은 나중에. 일단 가보자!
2015년 12월 1일. 순천향교 앞에 지어지고 있는 건물의 한켠을 계약했다. 보증금 1000에 월세 30. 아직 다 지어지지도 않은 건물인 데다 인적 없는 골목 안에 자리하고 있어 말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우리가 가진 자원으로 이만한데 구하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거보다 싼 곳은 나오더라도 손을 많이 봐야겠지? 셀프 리모델링 이런 건 관심은 많았지만 경험도 지혜도 부족했다. 공사 대금이 빠듯했던 건축주 쪽에서 미리 계약하면 페인트 색이나 전구 등은 취향에 맞게 해 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을 했다.
그래, 그 에너지를 아껴 다른 걸 더 잘 준비하자. 좋은 책을 더 많이 들이자. 인테리어는 가구만 잘 골라도 된다. 망해도 챙겨갈 수 있는 책이랑 가구만 사자. 남은 예산이 얼마지? 600정도? 그럼 책 300, 가구 및 집기 300! 예산 끝! 우린 이번에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원만하게, 합리적으로 진행하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임대차 계약서에 '2년'이라는 단어에 계속 눈길이 머물렀다. 2년이라... '책방을 2년까지 운영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내가 여기 순천에서 2년을 더 살아야 한다는 거지?'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래! 한 번 해보자! 그렇게 우린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