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1
새로운 도시에서 나는 이렇게 살고 싶었다.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나 자신을 탐색하는 삶,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는 삶, 영향력 따위 개나 줘버리고 있는 듯 없는 듯 머물다가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삶. 20대의 대부분을 대의명분과 책임감을 떠안고 살아온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똘똘 뭉쳐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늘 타인의 시선과 감정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힘들었기에 이곳에선 사적 인간관계를 최소화하고 싶었다.
비장한 독립선언과 함께 품게 된 거창한 꿈들은 여러 가지 변수를 만나면서 꺾이고 마는데, 그중 최고의 변수는 뭐니 뭐니 해도 깡성호와의 연애였다. 독립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구 썸남에 지나지 않았던 그는, 독립을 실현한 즈음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어있었다. 내게 있어 순천살이 10년은 깡성호와의 10년이기도 하다. 이번 글에선 그와의 이야기를 담아보려 한다.
세상만사에 관심이 많고 이것저것 잔재주가 많지만 뭘 하나 꾸준하게 하는 게 없었던 나는 자기 공부 - 돈도 안되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그야말로 자기가 좋아서 하는 공부 - 에 푸욱 빠져있는 그가 멋져 보였다. 한국근현대사를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갔다는 것도 멋져 보였고, MB장로대통령의 등장 이후 한국교회는 어쩌다 이렇게 욕을 먹게 되었나를 탐구하다가 한국교회 흑역사*를 연구 주제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매력적이었다. 한국교회가 역사의 어두운 부분은 철저히 묻어두고, 자신들의 업적만 확대 재생산하는데만 관심을 두었기에 진정한 반성과 회개가 불가능했다는 그의 문제의식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세상 착하고 순종적인 '교회 오빠'들의 구애를 몇 번 받았지만 교회밖에 모르는 그들의 착함은 내겐 답답함일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교회 밖 사람과의 연애는 더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의 세계관을, 가치관의 배경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무나 사랑했던 세계를 완전히 떠날 수도, 다시 이전처럼 사랑할 수도 없는 나를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연애와 결혼에 대한 기대가 다 사그라지고 비혼의 삶을 고민할 때쯤, 그를 만났다. 교회 안과 밖, 그 경계에 있는 사람. 내 언어를 다 알아듣고, 내면의 폭풍을 다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 나는 그 앞에서 한없이 솔직해졌다. 그 역시 자기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고팠고 그렇게 우린 가까워졌다.
*2016년에 이르러 그는 <한국기독교 흑역사>라는 책을 출간하게 된다.
서른이 되어서야 독립을 결심하고, 서른 하나에 실행한 나와 달리 성호는 스무 살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다. 초등학생 시절 다섯 번의 전학을 경험하며 점점 더 외롭고 소심한 아이로 자란 그는 청소년기를 포항에서 보내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가정에서 받지 못한 돌봄을 교회에서 받았다는 공통점이 우리에게 있었다. 대학 진학과 함께 울산으로 가게 된 그는 규모가 꽤 있는 교회에서 지원하는 ‘학사’(대체로 다른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저렴한 비용 또는 무료로 공동주거를 했던 공간)에서 생활했다. 대전에서 2년의 군생활, 울산으로 돌아와 다시 학사 생활, 졸업 후 대학원에 가면서 또다시 서울에 있는 교회에서 학사 생활을 했다.
그의 독립은 선택이라기 보단 숙명 같은 거였다. 집으로부터는 일찍 독립했지만, 가난한 형편 때문에 늘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내가 아는 성호는 누구보다 자기 경계가 확실하고, 타인과 부대끼는 걸 불편해하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좁은 공간에서 다수의 사람들과 섞여 살았을까 상상이 안될 때가 있다. 그는 선택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스무 살에 울산으로 갔을 때도, 20대 후반에 서울로 갔을 때도, 집에서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학자금 대출에 생활비 대출까지 받아가며 대학원을 다녔던 그에게 자기만의 방을 얻는데 필요한 보증금은 너무나 큰 산이었다고.
하얗고 뽀얀 얼굴, 실없는 농담 뒤로 수많은 사연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그 사연들을 자신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며 꽁꽁 감추고 싶어 했지만 나는 그걸 어떻게든 알고 싶어 했다. 하나씩 알게 될 때마다 조금 놀랐고, 겁이 났지만 그가 비참해할까 봐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이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의 잘못이 아닌, 환경 때문에 그를 떠나지는 않겠다는 다짐을 거듭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자마자 장거리 연애를 시작해야 했던 우리에겐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내가 순천으로 이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도 순천으로 따라왔다. 따라왔다기보단 와서 가질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인 듯 하다. 대학원 수료는 했지만 졸업 시험을 패스하지 못했던 그는 자신을 ‘논문 백수’라 칭했다. 학생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그 신분이 얼마나 지속될지 기약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넘치도록 많은 것은 시간이었는데, 그는 그 시간을 나랑 보내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고, 나는 그런 그가 좋았다.
내가 일하러 가면 그는 우리집 앞의 도서관에 가서 논문을 썼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이름으로 책 한 권 내고 싶다는 꿈을 안고 열심히 자료를 모았다. 서울 생활을 함께했던 이들은 그가 울산으로 내려갔다고 알고 있었고, 울산의 가족들은 그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서울에 있겠거니 했다. 순천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몰랐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이곳에서 유령처럼 살았다. 어떤 날은 고양이 같고, 어떤 날은 우렁각시 같은 존재가 내 방에 숨어 있었다. 그 존재와 함께 뒹굴거리다 도서관에서 각자의 작업을 하고, 같이 저녁을 먹고, 해가 지면 동네를 걸었다. 원도심의 거리는 일찍 어두워졌다. 저녁 8시만 넘어도 가게들이 서둘러 문을 닫고 9시가 되면 거리가 고요했다. 몇 안 되는 불빛 사이로 나란한 그림자를 바라보며 나는 이런 고백을 했다.
연예인들 말이야. 누구랑 누구랑 사귄다고 기사가 나면 열애설이라고 하잖아. 난 그게 좀 웃기다고 생각했거든. 연예인이 누굴 만나면 무조건 열애인가? 근데 우리야말로 지금 진짜 열애를 하는 것 같지 않아?
이런 낯 뜨거운 고백을 거침없이 술술 잘도 했던 나였다. 온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었던 나는, 사방이 내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많이 지쳐있었고, 스스로를 먼저 사랑하고 싶어 이곳으로 도망치듯 왔었다. 그런데 내 눈앞에 세상 누구보다 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다. 내가 가장 잘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랑을 아끼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시절의 나에겐 그게 신앙이기도 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함께하며 나 역시 스스로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졸업시험을 통과하고 석사논문을 마칠 무렵부터 그는 순천에서 일자리를 알아봤다. 전공분야를 살려 취업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는 무슨 일이든 밥벌이만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했다. 자기는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사는 건 어려울 것 같고, 퇴근하고 저녁에 글 쓰는 시간만 확보할 수 있으면 바라는 게 없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이왕이면 적성을 살릴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고 했다. 구인 구직 사이트를 열심히 들여다본 끝에 지역신문 기자와 시민단체 활동가, 두 가지 안을 찾았다. 당시 지역에 대한 이해도 인맥도 부족했고, 결정적으로 운전면허도 없었기에 기자는 어려울 것 같았다. 시민단체에서는 청소년사업을 담당하는 팀장 자리를 주었다. 순천에 처음 생긴 그의 자리였다.
입사 후 처음 맡게 된 일은 그 단체의 대학생들 졸업식에 찾아가 축하해주는 일이었다. 순천대 캠퍼스는 대학 졸업생과 대학원 졸업생들, 그들을 축하해주기 위한 인파로 북적였다. 그날은 깡성호의 대학원 졸업식이 있는 날이기도 했다. "저도 그날 졸업식이 있어서요." 했어야지, 왜 이 말을 못 했냐고 답답해하는 내게 "됐어. 안 가도 돼. 서울까지 차비도 비싸고... 졸업식 그거 뭐라고..." 하고는 생전 처음 보는 청년들을 찾아가 졸업을 축하해요 인사하며 선물을 전달하는 그를 지켜보았다. 너스레를 떨며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뒷모습도. 교내 스피커에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
- 브로콜리너마저 <졸업>
이 집 음악 잘하네 하며 꽃잔치가 열린 2월의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한 무리 사이로 아는 얼굴이 보여 얼른 뛰어갔다. 그 무렵 출석하던 교회의 어른 한 분이 대학원 졸업을 하셨다 했다. 축하인사를 전하고 사정을 말씀드린 뒤 학사모를 빌렸다. 일행분들이 꽃다발까지 빌려주었다. 괜찮다고 하는 성호를 끌어다 제일 무난한 배경 앞에 세우고 학사모를 씌웠다. 얼마나 힘들게 졸업한 대학원인데... 얼마나 그리던 날인데... 사진 한 장은 남겨야지! 자! 웃어!
(사진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