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2
비장한 독립선언이 무색해졌지만 내 삶은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다. 새로운 일은 적성에 잘 맞았고, 일로 만난 사람들과도 꽤 편해졌다. 순천이란 도시는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도심의 편리함을 다 갖추고 있으면서도 조금만 나가면 광활한 자연을 누릴 수 있었다. 주말엔 깡성호와 함께 구례, 남원, 여수, 광양, 전주, 광주, 진주 등 근교에 놀러 갔다. 모두 30분에서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2013년엔 순천만세계정원박람회가 유치되었는데, 그로 인해 도시 전체가 활기를 띄었다. 내가 좋아하는 문화의거리에선 시도 때도 없이 플리마켓이 열렸다. 친구들, 후배들, 제자들이 앞다투어 놀러 왔고, 나는 그들과 함께 순천의 명소를 돌아다녔다. 순천만습지, 정원박람회, 와온해변, 낙안읍성, 드라마촬영장 등을 신나게 누볐다. 친구들의 원픽은 문화의거리였다. 관광명소나 눈부신 자연에도 감탄했지만 문화의거리 특유의 분위기를 모두 좋아했다. 나의 호들갑도 한몫했다. 문화의거리 한복판에 있는 미디어센터를 가리키며 "나 여기서도 일해."라고 말할 때면 타지에서 홀로 씩씩하게 잘 살아내고 있는 나를 충분히 보여준 것 같아 어깨가 으쓱했다. 친구들, 동생들을 배웅하고 집에 돌아오면 나의 고양이 깡성호가 새초롬히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 친구들이 자고 갈 때면 집 밖으로 쫓겨나는 날도 있었다.) 외로울 틈 없는 1년을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았다.
전세 계약기간 1년이 지났고 나는 동네를 좀 옮겨보기로 했다. 새로운 동네는 금당지구. 신도심의 주거 밀집지역이었다. 발품을 엄청 판 끝에 거실과 방이 분리된 집, 베란다가 있는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만족스런 집이었지만 이번에도 전세 1년 계약만 하고 싶다고 했다. 집주인은 무조건 2년 계약을 해야 한다고 했고, 그 안에 나가고 싶으면 다음 세입자를 구해주고 나가는 걸로 협의를 했다. 원도심 같은 정취도 없었고, 조금이라도 늦게 귀가하는 날엔 주차할 곳이 없어 동네를 몇 바퀴 돌아야 할 정도로 복잡한 동네였다. 대신 주변에 편의 시설이 많았고, 맛있고 저렴한 과일가게가 바로 앞에 있었다.
10평 원룸과 13평 투룸(거실1, 방1)은 천지차이였다. 새로운 집은 두 사람이 같이 지내기에도 큰 불편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성호에게 이제 직장이 생겼으니 집을 따로 구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다. 성호는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에 매달 나가는 월세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어차피 맨날 붙어있을 건데 왜 굳이 집을 구해야 하냐며 서운해했다. 나는 성호랑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지만 각자 돌아갈 곳이 있는 게 서로에게 더 좋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렇게 또 한 번 발품을 팔아 보증금 200에 28만원짜리 방을 구했다. 우리집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고, 주방과 방이 분리된 원룸이었다. 놓치기 싫은 좋은 조건의 집이었지만 둘이 합쳐 보증금 200만원도 없던 시절이었다. 고마운 혜미가 돈을 빌려주었다. 어렵게 구한 집에서 더 어렵게 번 돈을 매달 내야 했지만 깡성호는 당최 그 집에 가질 않았다. 나 하나 보고 순천에 온 그였고, 나 역시 그와 떨어지기 싫었다. 비어있는 집에 월세만 빠져나가는 달이 이어질수록 성호는 돈을 아까워했고, 나는 결혼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깡성호는 결혼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얼굴이 어두워졌다.
성호의 그늘은 대부분 부모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는데 나는 그게 이해가 되면서도 또 가늠이 안돼 답답할 때가 많았다. 유독 가족 이야기만 나오면 분노 조절이 안 되는 사람처럼 말을 심하게 하는 그를 보며 놀라곤 했지만 "그래도 엄마 아빤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이런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타인이 헤아릴 수 없는 그만의 속사정이 있는 거겠지 생각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그와 만나면서 새롭게 배운 마음이다.
원도심 원룸에 살던 봄날, 우리만의 세상에 살던 무렵이었다. 성호 여동생의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어머니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두 남매의 통화를 옆에서 들으며 심장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난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어머니가 연락두절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어떻게든 당일날엔 나타나실 거라 믿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알콜의존도가 높아 주기적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했던 아버지였다. 분명 집에 쓰러져 있을 게 뻔하니 오빠가 가서 목욕도 시키고 옷도 준비해달라는 동생의 도움 요청이 있었다. 서로에게 세상 무뚝뚝한 남매였지만 이런 상황이 올 때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나와 내 동생이 가진 유대감과 같고도 다른 유대가 그들에게 있었다.
깡성호는 전화를 끊고 자기 신세를 비관하며 광광거렸다. 내가 왜 그런 것까지 해야 하냐며 분노하며 펄쩍거리더니 너무 비참해 죽고 싶다며 울었다. 나는 그를 달래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너무 힘들 것 같다. 근데 지금 헤어지는 건 너무하잖아. 일단은 이번 고비만 넘기자. 상황이 좀 괜찮아지면 그때, 그때 헤어지는 게 좋겠다.' 그의 그늘을 사랑했지만 그 그늘의 크기에 압도되어 두려움도 커지고 있었다.
여동생의 결혼식날 내가 가진 가장 좋은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평소에 신지도 않는 하이힐도 신었다.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오늘 인사는 제대로 드려야지. 성호한테 이렇게 이쁘고 번듯한 여자친구가 있다고 보여드려야지. 속으로 생각했다. 전 남친이 나를 자신의 트로피 취급하던 걸 가장 못 견뎌했던 나였는데, 어디서 나온 마음인지 그땐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 전날까지도 연락이 안 되었던 어머니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고운 한복을 빌려 입고 결혼식장에 나타나셨다. 그럴 거라고 예상하면서도 한쪽으로 불안해했던 성호와 여동생의 표정을 번갈아 살폈다. 얼마나 조마조마했을까 오지라퍼의 걱정이 무색하게 신부는 화사했고, 결혼식은 무탈하게 끝났다. 이 평범해 보이는 결혼식 뒤에 숨겨진 사연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어느새 이 가족과 유대감 비슷한 걸 느끼고 있었다. 마음 졸였을 그를 위로하며 이런 마음을 나눴을 때도 깡성호는 우리 관계에 가족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고 매정하게 말했다.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가족과 엮이는 순간, 우리 사이가 흔들릴 거라는 불안이 그에게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성호는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음악을 향한 꿈을 안고 살았지만 놓을 수도 붙들 수도 없었던 아버지는 술로 현실도피를 일삼았다고 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거면 결혼 같은 건 안 했어야 하는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였다. 그래서 자긴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다고 했다.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는 있지만 보장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막막했던 그는 정말로 오늘만 사는 사람이었다.
서로 결혼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타이밍에 만났기 때문에 가까워질 수 있었던 우리였다. 온갖 걱정을 미리 사서 하는 나의 경우 결혼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으니 연애의 문턱이 낮아졌다. 그런데 내 입장에선 그건 연애 초반의 이야기고, 동거기간이 길어지는데 결혼 이야기를 회피하는 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입장에선 지금 이대로가 좋은데 굳이 결혼이라는 굴레로 들어가자고 하는 내가 이해가 안 됐을 것이다. 나도 세상이 이렇게 빨리 바뀔 줄 알았다면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그 시절 나는 내가 남자사람과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너무 두려웠다. 그게 뭐 어때서? 사귀는 사이에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때 나는 그게 낙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불필요한 시선과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았고, 가족과 지인들의 걱정도 실망도 사기 싫었다. 그래서 집에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절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뭔가 떳떳하지 않은 그 상황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이런 나와 달리 너무나 안일한 그가 미웠다. 그는 내가 타인의 시선을 너무 신경 쓴다고 했고, 나는 내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그가 이기적이라고 했다. 남자와 여자가 받는 사회적 시선의 차이가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고, 그에 맞서기보다 결혼이라는 제도로 모면하고 싶었다.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오랜 연인들을 보면 멋지단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자신이 없었다.
남들이 하기 때문에 하는 결혼은 하기 싫은지 오래였다. 다만 성호랑 함께할수록 이 사람과 떨어지기 싫은 마음이 커졌고, 결혼이란 약속이 그 마음을 지켜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배수진을 쳤다. 결혼도 싫었지만 나와 헤어지는 건 더 싫었던 그도 결국 결혼을 선택했다. 나는 성호를 더 많이 사랑해주고 싶었다. 그가 편히 쉴 수 있는 집 같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다. 결혼까지 여러 장애물이 예상되었지만, 다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후의 어려움까지도.
함께할 사람을 고를 때 그 사람 자체도 중요하지만 가족 분위기도 중요하다는 말을 어릴 적부터 많이 들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그것만이 정답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 갇히게 되면 세상의 많은 가능성을 배제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말은 가족 간의 관계에서 마찰을 겪거나 결핍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유념해야 한다. 나 역시 어렸을 땐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사랑은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어도 꿋꿋하게 버티며 존재한 한 사람 앞에서 피어났다. 시들어야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사랑은 날로 더욱 커져갔다.
세상에는 결핍을 자원 삼아 더 단단하고 반짝이는 마음을 가꿔가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이 갔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고 싶었기에. 그는 내가 발견한 가장 매력적이고 희귀한 보석이었다. 나는 그 사람을 평생 아껴줄 자신이 있었다.
며칠 전 TV를 보다가 그가 대뜸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자기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어. 나 때문에 자기가 혼자 사는 삶을 경험해보지 못한거. 그건 내가 두고두고 미안할 것 같아."
"그래! 내가 얼마나 큰맘 먹고 한 독립이었는데! 내가 얼마나 원대한 꿈이 있었는데! 자기땜에 망했어!"
"미안."
그 한마디에 얼마 있지도 않던 미련과 아쉬움이 싹 씻기는듯 했다.
"미안하긴. 나도 좋아서 그랬는데. 그리고 우리 지금 더 좋잖아?! 그럼 됐지 뭐."
한 사람을 사랑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 내 인생을 너무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은 아닌가 골똘히 생각할 때가 있다. 순천에서 1년 살아보고 그 다음은 더 한적한 시골마을로 가고 싶었는데... 가령 청산도 같은 곳에 가서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도대체 저 처녀는 누군가?'하면 "하하하! 아무도 아니에요!"하며 넉살을 부린다던지, 완주 같은 곳에서 마을 만들기 운동에 동참하며 홍반장처럼 산다던지, 정말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작은 마을에 숨어서 방구석 예술가가 되어본다던지... 그런 꿈들은 접어야 했다. 대신 한 사람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했고, 그 사람과 행복하게 사는 것 - 그것이 내 꿈이 되었다. 보잘 것 없기도, 원대하기도 한 나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