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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운 Aug 28. 2022

어쩌다 순천

나의 독립 일지 3

J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하고 있는 일 있잖아요. 예술강사? 그거 괜찮아요?”


 영화과 졸업 후 두어 번 대학에서 연락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학교예술강사 사업이라는 게 생겼는데 영화과 졸업생들이 하기 괜찮은 직업이라고. (현장으로 나간 동문들이 박봉에 고생만 하며 버티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노동환경도 대우도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물론 여전히 개선되어야 할 문제들이 있겠지만.) 로운이 너는 교직 이수도 했고, 학생들 가르치는 일도 잘 맞을 것 같으니 생각해보라는 교수님의 연락이었다. 그때의 난 소명을 따라 선택한 길에 1도 후회가 없었기에. 딱 잘라 "괜찮습니다-"라고 했다. 교수님은 "너 아직도 하나님이랑 친하니? 그 일 계속할 거야? 너는 일단 하나님이랑 사이가 멀어지면 그때 나를 찾아와라"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으셨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그쵸 하나님?"


독립을 준비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중 그게 떠올랐다. 예술강사. 듣기로는 함께 교직이수를 했던 선후배들, 현장에서 일하다가 다시 돌아온 선배들도 많이 하고 있다고 했다. 대학시절 짝꿍처럼 지냈던 J선배는 이 일의 장점과 단점,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 까지 자세히 알려주었다. 부산지역은 이미 강사 포화 상태라 학교 배치 경쟁이 치열하고, 수업을 좀 더 많이 하고 싶은 강사들은 경남지역으로 지원하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다니며 수업을 한다고. 나의 첫 번째 목표는 집으로부터의 독립이었기에 경남은 애매했다. 더 멀리 가고 싶다는 나에게 전남은 어떠냐고, 전남지역은 지금 영화 강사가 부족한 상황이라 타 지역 강사 의존율이 높다는 정보까지 주었다. 오! 좋지요 전남! 저희 아빠랑 엄마, 친척들 다 전남 사람이잖아요. 물리적 거리는 멀어도 심리적인 거리감은 별로 없었던 내게 전남지역에 영화 강사가 귀하다는 말은 희소식이었다. 부산보다 수업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말은 귀에 잘 안 들어왔다. 아니, 이 일의 장점은 원하는 만큼 조금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거 아닌가요? 왜 수업을 많이 하고 싶은 거죠? 선배는 돈을 벌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 했다.

 

그땐 예술강사는 최소한의 생계비를 벌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다른 꿈을 준비하고 싶었다.


이번엔  Y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학부시절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학과 일도 도맡아서 하던 카리스마 있는 언니였다. 이미 J선배로부터 내 이야기를 어느 정도 전해 들었다던 언니는 다짜고짜 "이 일이 왜 하고 싶은 건데?"라고 물었다. "아. 제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은데요, 그때까지 잠시 하기에 괜찮은 일인 것 같아서요." 내 말을 전해 들은 언니는 정색하며 얘기했다. "야! 그런 생각이면 시작도 하지 마라. 너 같은 사람들이 강사 하면 피해는 학생들이 받는다." 그 말을 듣고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잊히질 않는다. 나도 나름 청소년 3년, 대학생 3년, 합이 6년이란 시간을 학생들과 함께했고, 그들을 대하는 내 마음의 태도, 진정성은 늘 나의 화두였다. 학생들 앞에 설 때마다 내가 이 자리에 합당한 사람인지, 내가 가르치는 것이 정말 이들을 위한 것인지, 내 꿈을 위해 학생들을 동원하는 것은 아닌지 되물으며 내 자격을 검열하던 사람인데... 언니의 날 선 충고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교단체 간사로 소명의식에 똘똘 뭉쳐있던 나는 내가 하는 이 일이 너무나 신성하고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술강사를 준비하던 내게 학교에서의 예술수업은 내 밥벌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 정도면 할 수 있겠지' 생각했지만 '이런 강사가 되어야겠다' 다짐 같은 건 없었다. 똑같이 학생들을 대하는 일인데... 내 무의식이 성속을 구분 짓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많고 많은 일들이 결코 내가 해온 일보다 무가치한 일이 아님을, 자기 자리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이름에 책임을 갖고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위대하다는 기본적인 진리를 새롭게 배웠다. 비로소 예술강사라는 일에 기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일을 할 거라고, 그것도 전공을 살려서. 부산은 자리가 없으니 전남으로 가야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생각보다 쉽게 설득에 성공했다. 엄마는 일단 간사를 그만둔다는 말에 기뻐했고, 딸의 직업을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반기셨다. 아빠는 자신이 떠나온 전라도로 자식이 떠난다고 하니 만감이 교차한 듯 보였다.


아빠보다 더 마음이 복잡한 사내가 있었으니 당시 썸을 타고 있던 성호였다. 그 해 여름 우리는 기나긴 대화로 숱한 밤을 보내며 모락모락 마음을 키우다 자꾸만 어긋나는 타이밍에 때려쳐라 때려쳐! 소식을 끊었다가 가을 즈음엔 이렇게 말 잘 통하는 친구 만나기도 힘든데 친구나 하자! 하고 이따금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예술강사 합격 통지를 받던 날. 그날도 우린 함께 있었는데, 나만큼이나 초조해하던 그의 마음을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합격 문자를 받고 기뻐하는 내게 내심 떨어졌으면 하고 바랐는데 하며 쭈뼛거리던 그에게 억지로 고백을 받아냈던 그 겨울밤을 잊을 수가 없다. "뒷일은 모르겠고, 일단 지금 너가 너무 좋아!" 그렇게 우리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갑자기 연애 이야기가 튀어나왔는데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이어 가보겠다.

 



전남지역에는 5개의 시와 17개의 군이 있다.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사실 담양이었다. 간사 시절 광주에 갈 일이 몇 번 있었는데 멀지 않은 거리라 담양에도 들린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아름다운 자연에 감탄했고, 이런 곳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차로 20분만 가면 광주‘광역시’가 있으니 광주극장에서 영화 보고, 영풍문고에서 책 사고, 가끔 좋은 공연도 보는 등 문화생활은 충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담양은 ‘군’이었기에 학교도 몇 안되었고, 그중 영화예술강사를 신청한 학교는 한 두 군데밖에 없었다. 학교 홈페이지를 살펴보다 그중 한 학교가 기독교 대안학교인 것을 확인했을 때 이건 운명인가 하며 그 학교에 배치되길 기도했지만 학교 배치는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신규 강사에겐. 배치는 거의 5주에 걸쳐 진행되는데 기존 강사들이 먼저 배치를 받은 후, 남은 학교 목록을 확인하고 나서야 신규 강사들이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마저도 다른 강사들과 많이 겹치면 떨어질 확률도 높아지기에 치열한 눈치싸움이 필요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배치 가능 학교 목록에 담양의 학교는 하나도 없었다. 막연하게 꿈꾸었던 담양 라이프가 눈앞에서 좌절되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막막해하며 남은 학교 목록과 지도를 번갈아가며 보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김혜미. 2차 면접 때 만났던 동료였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땐 경쟁자의 입장이었다. 전남지역 신규 강사 4명을 뽑는데 8명이 광주의 면접장에 왔다. 그녀는 처음 보자마자 내 옆에 앉더니 이런저런 말들로 긴장을 풀어주었다. 나보다 앞 순서인데 떨리지도 않나... 어쩜 이렇게 당당할까가 내가 받은 첫인상이었다. 하이힐에 풀메이크업, 누가 봐도 면접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것 같은 깔끔한 정장 차림의 그녀 앞에서 구제 시장에서 구입한 나의 빈티지 리폼 재킷은 초라해졌다. 나름 교육자의 단정함과 아티스트의 자유로움을 함께 보여주고 싶어 야심 차게 고른 착장이었는데… 성의 없어 보이려나... 운동화는 오늘따라 왜이리 꼬질꼬질해 보이지? 긴장이 가중되었다. 면접은 수업 커리큘럼과 지도안을 제출하고 모의수업을 진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면접을 끝내고 후련한 듯 돌아온 그녀는 다시 내 옆에 앉더니 또 한 번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 이봐요, 나 당신 경쟁자예요! 경계심 없는 그녀가 신기하기도 고맙기도 했다. 그리고 더 놀란 건 그다음이었는데 내가 면접 끝나고 나올 때까지 안 가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지낸다던 그녀는 광주까지 온 김에 부모님이 계신 순천에 들렀다 간다고 했다. 예술강사 합격하면 순천과 서울을 오가며 지낼 계획이라고. 광주 터미널까지 택시를 함께 타고 가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합격해서 만나자는 훈훈한 인사를 주고받으며 헤어졌다. 얼마 후 합격 소식을 나누고 함께 축하하며 우린 서로의 첫 동료가 되었다.

 

- 언니! 어디로 갈 거야?

- 글쎄... 어디로 가야 할까... 보고 있는 중이야.

- 순천으로 와! 순천에 학교 세 개나 남았어.

- 순천? 너가 가야지.

- 순천은 여수, 광양이랑 같은 생활권이야. 난 순천에 학교 하나만 하면 되니깐 나머지 두 개는 언니가 신청해.

- 나 때문에 그럴 거 없어. 내가 순천으로 가면 너한테 득이 될 게 없을 것 같은데...

- 언니! 언니가 순천에 왔으면 좋겠어서 하는 말이야. 00학교랑. **학교 신청하고! 광양에 @@학교, 여기도 별로 안 멀어. 여기도 신청해. 나는 여수에 aa학교랑 순천에 bb학교 두 개만 하면 돼!

 

얘는 어쩌자고 나에게 이렇게 호의적인 걸까? 다짜고짜 내 진로를 결정해주는 그녀에게 나는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살고 싶었는데... 주체적으로 살고 싶었는데... 이렇게 끌려가도 되나...? 잘 모르겠지만 되게 든든하다. 이 친구의 말을 듣는 게 좋겠다. 그렇게 나는 순천과 광양에 3개의 학교를 배치받았다. 그중 광양의 학교는 지금까지 10년째 출강하고 있다. 그리고 혜미와도 지금껏 잘 지내고 있다. 겉으로 풍기는 이미지가 달라서 그런지 가끔 둘이 어떻게 친해졌어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럴 땐 이 이야기를 해준다. 제가 순천으로 오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에요. 저의 은인이지요.



10주년 사진 찍기로 했는데 요새 둘 다 너무 바빠 못만나고 있음. 작년 봄 사진으로 대체.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10년 전 그 때, 예술강사가 아닌 다른 일을 선택했다면? 그 때 J선배가 나에게 전남을 추천해주지 않았다면? 그 때 부모님을 설득하지 못해 독립을 포기했다면? 그 겨울, 성호가 떠나지 말라고 나를 붙잡았다면? 우리가 겨울이 아닌 그 해 여름에 잘 됐다면? 면접장에서 혜미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천 번 만 번을 생각해봐도 정말 다행인 것이다. 인생의 많은 순간에 내가 했던 선택들. 그 모든 선택이 다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내 인생에 개입해 준 모든 사람들, 모두가 내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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