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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운 Aug 23. 2022

내가 떠나온 세계

나의 독립일지 2

오랜 세월 크리스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모태신앙으로 시작한 나의 신앙생활은  대가 되고 IMF 거치며 엄마가 생계전선에 나서면서, 가족  유일한 것이 되었다. 아빠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원래 종교 자체에 심드렁했고, 횟집 서빙부터 시작해 작은 호프집을 인수하게  엄마는 교회 사람들은 술장사 하는  흉본다며 걸음을 끊었다. 매주 일요일마다 나란히 함께 교회에 가던 남동생은 체육고등학교에 진학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나와 다른 세상을 살게 되었다. 가족들이 교회로부터 멀어질수록  기도는 뜨거워졌고, 어떻게든 교회 생활의 좋은 점을 어필하려고 노력했다. 엄마는 나도 어렸을   해본 거라며 소용없다고, 부질없는 것에 인생을 거는 딸을 미련하다 했다.


10살 때부터 출석한 모교회*에서 받은 사랑은 대수롭게 여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밥벌이로 바빴던 부모님을 대신해 주말 내내 나를 돌봐준 건 교회였고, 교회 어른들이었다. 그곳에서 사랑을 배웠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 내 것을 나누는 마음,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마음을 배웠다. 다양한 존재들과 우정을 가꾸고, 리더십을 발휘하며 자존감도 키웠다.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교회에서의 나는 충분히 풍요로웠다.


20대가 되어선 그 사랑을 갚는 마음으로 교회를 섬겼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던 교회에선 나라는 존재의 쓰임이 많았다. 아침 일찍 도착해 초등부 교사를 하고, 11시 예배에선 성가대를 하고, 점심을 급하게 먹고 나면 새가족 사진을 찍어주고, 1시엔 청년부 예배를 준비하고, 마치면 임원 회의, 4시에 초등학생들 오후예배 마치고 나면 저녁 예배 찬양팀 연습... 나중엔 방송실 일까지 도맡아 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정으로 일요일 하루를 꼬빡 채웠었다. 때로는 지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날들을 행복으로 채웠다. 본인이 그러했듯 쟤도 저러다 말겠지 생각했던 엄마는 뒤통수를 제대로 맞게 되는데, 대학 졸업 후 선교단체 간사로 취직하겠다는 딸의 선언 때문이었다. 주말에만 유난인 줄 알았던 딸은 주중엔 기독교 동아리에 열정을 바치고 있었다.


믿음대로 살고 싶었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었다. 내가 받은 사랑, 내가 누린 평안을 전하고 싶었다. 집, 교회, 친구밖에 몰랐던 나는 선교단체 간사 생활을 하며 좋은 선배들 덕분에 사회 이슈에도 눈 뜨게 되었고, 인문학적 사고도 하게 되었다.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선배들을 따라 소위 말하는 진보를 지향하게 되었고 생태적 삶, 공동체를 가꾸는 삶, 물질적 안정보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삶, 사회를 변혁하는 삶 이런 것을 꿈꾸게 되었다. 내가 알게 된 것, 깨달은 것들을 나의 학생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 전부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치를 지금 이 땅에서 실현하는 게 우리의 사명이다!" 청소년, 대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삶의 태도를 바꾸게 하는 게 나의 일이었고, 꿈이었다. 말하는 대로 살아내는, 닮고 싶은 멘토이자 스승이고 싶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학생들과 함께 떠났던 1박2일 서울 여행. 꿈을 꾸듯 살았다.



우리는 그걸 '청년 사역'이라고 불렀다. 나를 '간사님'이라고 불렀던 학생들은 바쁜 시간을 쪼개어 소모임을 준비하고, 후배들을 돌아보고, 캠퍼스 문화변혁운동을 고민했다. 선교단체와 교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 부단히 애쓰며 자신의 에너지를 끌어올리던 학생들. 아르바이트와 각종 시험, 편입과 취업 준비의 압박 속에서도 우리 모임을 소중히 생각하고 시간을 비우고 마음을 헌신하는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눈물이 차올랐다. 그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어 공부를 하고, 부끄럽지 않으려 나를 다스렸다. 돌아보면 나도 20대. 새파란 청춘이고 청년이었는데 너무 일찍이 청년을 대상화하며, 나란 사람은 '센세'의 위치에 두고 살았다. 몇 살 차이 나지도 않는 청년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지만 정작 일개 청년으로서의 푸르름과 자유는 놓치고 살았던 것 같다. 인생의 정답을 이미 가지고 있었고, 남은 건 사명감밖에 없었다.


너무 쉽게 신앙생활하는 이들을 미워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남들과 똑같이 살고, 같은 것을 욕망하는 사람들을 정죄했다. 세상이 이렇게 엉망인데 여기서 우리끼리 얼싸안고 쉬운 위로만 주고받는 학생들을 보면 답답했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함께  정의를 위해 싸우는 법을 배우고 작은 승리의 경험을 쌓아야 세상에 지지 않고 살아낼 수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다 질풍노도의 시기가 왔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할수록 내가 속한 기독교 공동체가 가진 해답에 한계를 느꼈다. 내가 가진 해답이 모두에게 정답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무조건 숭고한 것이 아님을,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내 견고한 세계관에 균열이 생기면서 학생들 앞에 서는 게 자신 없어졌다.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들키는 게 두려웠다. 그러면서 내적 자아는 마음껏 흔들려 보기를 갈망하게 되었다. 나를 믿고 따랐던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아 (그게 가장 두려웠다.) 겉으로는 변한 게 없는 것처럼 강의하고 설교하고 그러면서 자기혐오가 깊어졌다. 이런 마음으론 누구도, 무엇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누구도 자신이 해석한 이로운을 기대하지 않는 곳으로. 아무 질문이나 할 수 있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곳에서 나의 신을 만나고, 나를 만나고 싶었다. 내 두려움의 정체를 정확히 보고, 돌파하고 싶었다.


그렇게 6년의 간사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이왕이면 멀리 가고 싶었다. 그곳에서는 '이로운' 말고 '자유로운'으로 살고 싶었다. 그게 순천이 될 줄은 그땐 몰랐다.




*모교회 : 출신 교회, 고향교회 같은 의미.

학생들이 만들어준 앨범. 너무 과한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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