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립 일지 1
어릴 적 우리 가족은 단칸방에 살았다. 내가 유치원생 시절부터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엄마 아빠는 가구점을 했었는데 가게 뒤편에 딸린 작은 방이 우리 집이었다. 네 식구가 나란히 누우면 딱 알맞은 정도의 크기의 방. 출입문 있는 쪽이 아빠 자리였는데 누워있는 아빠의 머리 위로 건너 다니다가 큰소리로 호통을 듣곤 했다. 그럼 어떻게 지나가라는 말인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 사람 머리 위로 지나가는 거 아니고, 다리 쪽으로 지나가는 거라 말씀하시며 흥분을 삭히셨다. 더 이상 아빠의 머리 위로 건너 다니는 실수를 하지 않을 때쯤 내 키는 엄마만큼 자라 있었고, 한 살 어린 남동생의 덩치도 엇비슷했다.
나의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부모님은 가구점을 접었다. ‘점포정리’라는 말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이게 얼마나 쓸쓸한 단어인지는 20여 년 뒤 책방을 닫으면서 조금 알게 되었다. 그땐 마냥 이사 갈 생각에 들떠있었다. 새로 이사한 집은 우리가 자주 다니던 시장 골목에 있는 다세대 주택 1층이었다. 거실 겸 주방과 방 두 개의 구조로 되어있었는데 점포정리로도 처분하지 못한 가구들을 이고 지고 왔기 때문에 집이 더 좁게 느껴졌다. 연년생 남매가 중학생이 될 때쯤엔 각자의 방을 주고 싶었던 엄마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고, 엄마는 그걸 그렇게 미안해했다. 동생과 나는 2층 침대가 생겨서 기쁠 뿐이었다. 누나보다 날렵했던 동생이 2층을 차지했고, 동생보다 약았던 누나는 양보하는 척했지만 1층이 더 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동생은 누날 절대 2층에 못 올라오게 하는 것으로, 누나는 얇은 이불을 2층침대 프레임에 끼워 커튼을 만드는 것으로 자기 구역을 지켰다. 그래도 싸구려 야광별 스티커가 생기면 사이좋게 나눠 붙였다. 나는 1층 침대에 누워 야광별이 붙어있는 2층 매트리스의 바닥을 바라보다가 잠들었는데, 역도 특기생이었던 동생의 체중이 세 자리를 향해 가면서 삐걱삐걱 소리가 점점 크게 났고, 언젠가 한 번은 내가 저 매트리스에 깔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때부터 언젠가는 생길 내 방을 상상했다. 기술가정 시간에 쓰고 남은 푸른색 모눈종이엔 수많은 방이 그려지고 지워졌다. 가로 두 칸, 세로 네 칸, 여덟 칸짜리 침대를 이쪽 벽에 그렸다가, 저쪽 벽에 그렸다. 가로 세 칸, 세로 두 칸, 여섯 칸짜리 책상을 창가에 두었다가, 방 한가운데 두었다가 하면서 스무 살이 되고, 스물한 살이 되었다. 벚꽃이 흩날리던 어느 날, 방 세 개짜리 아파트로 이사한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심장이 쿵쾅거렸던 기억이 난다. 막상 두 눈으로 확인한 방은 너무 작았는데,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큰 방을 차지하겠다고, 작은 방 두 개를 왔다 갔다 하며 한 뼘 두 뼘 열심히도 쟀다. 그렇게 반뼘이라도 큰 방을 차지했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내 방의 창문은 세탁실과 연결이 되어있었고, 동생 방의 창문은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하늘이 보이는 뷰였다. 덜덜거리는 세탁기 소리가 들릴 때마다 창문을 닫으며, 방의 크기에만 집착했던 안목 없는 나를 미워했다. 동생한테 바꿔달라 하기엔 염치가 없었다. 엄마는 넌 곧 시집 갈거니 조금만 참으라고 했다.
그땐 상상도 못 했다. 10년 후의 내가 낯선 도시에서 혼자 지낼 방을 알아보고 있을 거라곤.
기독교 선교단체 간사로 6년 지내면서 저축은 꿈도 못 꾸는 동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완전한 타의로 5년짜리 적금을 들었다. 신입간사 시절 “그래서? 도대체 네 월급이 얼마냐?” 지치지도 않는 엄마의 압박면접에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조금 부풀려 얘기했는데... 그 부풀린 액수를 듣고도 기가 차하시던 엄마는 일단 무조건 매달 30만원씩 엄마 계좌로 보내라고 하셨다. 그럼 엄마가 20만원을 보태서 50만원짜리 적금을 들어주겠다고. 셈이 느린 나였지만 이걸 거절하면 바보라는 건 모르지 않았다. 세상에 없는 고금리 이자였다. 매월 1일마다 당당하게 30만원을 보내기 위해 버스비를 아끼고, 밥값을 아꼈다. 30만원도 못 모으는 직장? 당장 때려치우라는 엄마의 호통이 두려워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심지어 알바비를 모아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던 학생이 쌈짓돈을 빌려준 적도 있었다. 고마움보다 부끄러움이 컸던 시절이었다. 엄마의 20만원은 쉬웠을까?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생과 서러움의 대가를 아까운 줄도 모르고 보태주셨다. 5년간 그렇게 모인 돈이 3천만원. 만기가 다가올 무렵의 나는 간사 생활을 정리하고 있었다.
엄마는 시집갈 밑천을 마련해주신 거였지만 나는 그 돈으로 공부를 하고 싶었다. 문화 연구, 문화 경영을 배울 수 있는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대학원을 갈 거였으면 졸업하고 바로 갔어야지 6년간 ‘허송세월’하다가 나이 서른에 무슨 대학원이냐고, 여자가 공부 많이 하면 시집가기 더 힘들다고, 우리집이 내세울 것도 하나 없는데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결혼을 해야지! 지금 나이도 적은 게 아닌데 언제 결혼해서 언제 애 낳을 거냐? 수년간 들어왔던 시집 레퍼토리가 시작되었다. 똑같은 레퍼토리라도 들을 때마다 고통스러웠고 특히 ‘허송세월’이라는 네 글자는 너무 아팠다. 여자와 공부와 시집의 상관관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으는 것도 내 의지가 아니었던 그 돈은 쓰는 것도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이 서른에 내 갈 길을 정하는데 여전히 부모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현타가 왔다. 그건 내가 독립을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독립을 못한 건? 시집을 못 가서? 꼭 시집을 가야만 독립할 수 있나? 아니잖아.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일단 독립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