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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카 Aug 05. 2022

잘난 척 하다 꺾인 코

이번 숙제는 투명 물컵에 담긴 꽃을 그려오는 것이었다. 마스킹 액을 써보기도 하며 빛에 대한 연습을 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자연광이 없는 저녁에는 기본 스케치를 했고, 다음날 아침에는 밝은 빛의 그림자를 그렸다. '그림을 완성해야지!'라는 생각만 하다 보니, 아침 햇살을 받은 꽃의 사진을 찍는 것을 깜빡 잊었다. 나중에 물감을 칠하려고 보니 그림자가 기억이 안 나서 디테일이 오히려 떨어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며칠에 걸쳐, 조금씩 다듬어가는 그림은 당장 마음에 안 들어도 다음에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많았다. 하지만 빛이나 그림자가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사진을 찍어뒀어야 하는데, 그것을 깜빡 잊는 바람에 여태 들인 공이 반으로 절감된 것 같아 아쉬웠다. 스케치는 열심히 해놨는데, 실제로 색을 입힐 때 디테일함을 살리지 못하게 되어서 노력한 것에 비해 아주 작은 결과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대한 눈 앞에 있는 것과 비슷하게 그리려고 노력을 했고, 잎사귀 몇 개는 생략했다. 투명 컵을 그릴 때에는 내 상상으로 실제와 다르게, 두꺼운 부분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그렸더니 더 생생하게 느껴져서 꽤 만족스러웠다. 성취감이 있달까. 나도 뭔가를 만들어내는 크리에이터가 된 느낌이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았는데, 내 상상이 실제로 괜찮아 보일 때의 행복감이란.


남편은 음악을 전공했는데, 나한테 크리에이티브 정신이 생기고 있다고 했다. 공부를 하던, 어떤 분야가 되었던 대부분의 다른 분야에서는 복습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던 나였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다시 보고, 또 다시 보는 것이 지겹고 싫었지만 미술은 달랐다. 더 이상 그림을 지속했다가는 그림이 망쳐질 것 같을 때, 여기서 어떻게 발전시켜야할지 잘 모르겠을 때 과감하게 펜을 놓은 후, 지나다니며 그 그림을 보게 되면 자연스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그 시간의 흐름을 좋아하게 되었다.

남편은 이것을 크리에이티브 정신, 장인 정신이라고 불렀다. 계속 고치고 보고 또 생각하는 작업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사람들이 특히 수채화는 망쳤을 때 고치려고 하지 말라고 하던 조언을 기억하고 천천히 작업을 하니, 나에게도 그 정신이 깃드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이걸 그려서 뭐하나’라는 순간이 벌써 오기도 했다. 세상에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많은데 나도 사실처럼 그리는 게 뭐가 중요한가 싶고, 또 귀여운 캐릭터를 그리는 것도 세상에 필요한 일인가 싶었다. 그러다가 또 문득, 이것은 기초를 쌓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빛에 대한 자연스러운 이해를 체득한 후에야 내 작품이 나오겠지’라는 생각이었다. 또, 현자타임이 온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입힌 색과 선의 조합이 마음에 들어서 그림에 사랑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아직 상상을 그림으로 그리기보다는, 그리다보면 우연히 예쁜 모습을 만드는 단계다. 생각보다 붓의 터치가 예쁜 결과물을 만들어내면 또 한 단계 진화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뿌듯하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다보니 이상하게, 비싸게 산 물감이 그라데이션이 잘 된다는 것을 느꼈다. 역시 미술은 도구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꼈다.


그리고 대망의 미술시간, 선생님한테 한껏 칭찬받을 마음에 붕붕 떠서 수업에 갔다. 사실은 스케치만 해오고, 채색은 수업시간에 하는 것인데 수업이 너무 짧아서 채색을 하다가 중간에 수업에 끊겨 코멘트를 다 듣지 못하고 작업실을 나왔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수업 시간 내에 채색을 끝내리라 마음을 먹고, 기본 채색도 어느 정도 하고 갔다.

내 그림을 본 선생님은, 표정을 보지 않아도 굳어져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컵이 꽃에 비해서 너무 작기 때문에, 넘어질 것 같이 아슬아슬하다는 것이다.

‘그림의 디테일을 잘 살려야해! 전체적인 색감을 어울리게 해야 해!’라고 생각하다 보니, 전체적인 구도를 놓치고 있었다.

스케치를 할 때, 보는 사람이 편안한 느낌이 들 수 있도록 컵이 (사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발란스를 맞췄으면 훨씬 좋았겠다는 생각이셨다. 하지만 이미 채색을 해버려서 스케치를 수정할 수는 없었다.


또, 그림에 사물이 너무 많이 들어가다 보니 (꽃 2송이, 레몬 5개, 잎사귀 7개, 컵 1개) 디테일하게 그리기가 어려워졌다. (예를 들어, 물 속에 잠긴 꽃줄기에 맺힌 기포까지 다 그리기에는 그림이 너무 복잡해진다. 하지만 빛에 있어서는 아주 실오라기 같은 디테일도 꼼꼼히 챙기시는 선생님이셨다. 내가 웬만큼 다 포함시켰다고 생각하고 수업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내가 빼먹은 빛을 아주 많이 찾아내셨다. 내가 0.2cm정도의 디테일을 발견하고 그것을 그린 후 뿌듯해 할 때, 선생님은 머리카락 한 올 만큼의 빛을 찾아서 그림에 반영하셨다.) 전체적으로 산만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다음 수업 때에는 그 부분을 클로우즈업해서, 꽃 하나와 컵 하나만 그려보기로 했다. 아직 초보 단계이기 때문에 명암의 차이가 큰 것을 대상으로 연습을 하기로 했다. (불행히도 내가 선택했던 꽃은 명암 차이가 거의 없어서, 난이도가 아주 높은 아이에 해당했다.)


나는 수채화는 ‘밝고 맑은 색채가 생명이지!’라고 생각을 했고, 실제로 그림도 그렇게 그렸다. 많은 사람들도 수채화는 색채싸움이라고 할 정도로, 수채화에 있어 색감은 중요했다. 하지만 그렇게 그리니, 포인트 사물이 희미한 느낌이 들었다. 포인트를 주고 싶을 때에는 더 밝고 맑은 색을 썼기 때문이다. 또, 배경은 사물보다 강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더 흐릿한 색을 사용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그림을 봤을 때, 그림 자체가 흐물흐물하고 목적이 없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선생님께서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셨다. 바탕 색을 원색으로 강하게 칠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의문이 들었다. 포인트가 되는 대상이 강조되어야하는 것이 아닌지 궁금했다.


선생님은 그것이 우리가 안고 살아가는 착각이라고 하셨다. 사실, 색채는 관계가 중요한 것이지, 그 고유의 색깔이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강한 배경을 쓰면, 오히려 포인트 대상이 강조가 되기도 한다고 하셨다. 새롭게 시도를 해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정열의 빨강을 배경색으로 칠하기 시작했다. 저렴한 물감을 써서 그런지, 그라데이션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속상했다. 색도 강한데, 붓선이 심하게 남으니 더 그림이 이상해보여서 속상해하고 있었다.


지나가다가 내 그림을 발견한 선생님은 그림이 더 좋아졌다고 말씀해주셨다.

집에 와서 다시 보니 정말 빨간 배경도 좋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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