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이야기
자주 인용하는 책 <정원가의 열두 달>에서 마음을 쏟는 모든 일들이 그렇듯, 가드닝도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열정 그 자체라 했다. 그러면서 진정한 정원가를, 정원을 구경시켜 주기 위해 손님을 초대해 놓고는 당장 눈앞에 일을 하느라 정작 손님 대접은 뒷전이나 또 만나면 놀러 오라는 말이 술술 나오는 괴짜 같은 사람으로 묘사했다. 좋아야만 하는 정원일은 그만큼 자랑거리지만 현실은 일 투성이라, 근데 그 일이라는 게 어쩌면 과도한 열정이 만들어 낸, 안 해도 그만인 일인지도 모른다. 적당하게 일하기가 좋아하는 일에서는 적용되지 않으니까.
처음 해보는 텃밭일이 요즘 그렇다. 변화가 무쌍한 텃밭 작물들 이야기가 좋은 글감이라고 자주 쓰게 될 것이라고 은근 기대했건만 현실은 다르게 흘러갔다. 텃밭 울타리에 도착하면 눈길은 벌써 멀찍이 38번 텃밭에 도착해 있고, 발이 도착함과 동시에 손은 어느새 작물이나 풀에 닿아있다. 계획이나 순서 같은 게 없어도 발과 손이 가는 대로 일이 척척 진행될 수 있더라. 선채로 이제는 나무가 된 토마토 곁순부터 따기 시작하다가 가지, 고춧대를 위해 허리를 구부리게 되고 마침 들깨대를 타고 올라오는 복수박 덩굴을 발견, 자동으로 쪼그리고 앉는다. 바닥을 기고 있는 넝쿨들을 들추며 또 그들 곁순에 손을 대고 있다. 넝쿨 두 가지만 남기라고 했으니까. 그러다 보면 풀을 메게 되고… 그날 먹을 채소를 따고 까리고 나면, 아뿔싸! 사진을 안 찍었네, 작은 후회가 올라 오지만 곧 잊고 또 일을 찾는다.
쉽게 찍었고 찍을 수 있는 사진이 텃밭에서는 쉽지 않다. 이렇게 홀리듯 일을 시작해 버리니 그간 자란 작물의 변화 모습을 사진에 담을 시간을 놓치는 것이고, 중간에는 손에 흙이 묻어 폰 꺼내기가 번거로워 또 포기한다. 어쩌다 찍어보면 열과 성의로 가꾸고 있는 텃밭 모습이 제대로? 담기지 않은 것 같아 실망 같은 걸 하게 된다. 무엇보다 사진 찍기가 텃밭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진정한 정원가에게 정원을 누리는 것보다 당장 보이는 일이 중요한 것처럼 초보 텃밭가에게도 일하고 수확하고 장만하여 먹는 일에 온 신경이 몰릴 뿐이다.
며칠 못 온 사이 풀이 곳곳에 점령한 텃밭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면 적당한 곳에 작은 낚시의자를 펼치고 앉는다. 혼자 간 날은 실컷 앉아서 그림 작품 감상하듯 키운 작물들을 지켜본다. 감자북과 땅을 기게 해 놓은 복수박 덩굴이 있는 곳에는 풀이 있어야 되는 형편을 생각하며 공공텃밭이 아닌 마당 텃밭을 꿈꾸어 보기도 한다. 말로만 들은 관행농법과 순환농법의 차이에 대해서도, 5평 작은 텃밭에 살아있는 갖가지 생명들은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다.
운 씨랑 같이 간 날은 대충 일이 끝나면 “가자!”는 소리가 두어 번 나오고, 얼마못가 몇 가지 용품이 든 주머니를 든 그가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 아쉽지만 따라나서다가… 근처 다른 이의 밭에서 한 가지 팁을 발견한다. 조금씩 익기시작하는 방울토마토 잎가지를 잘라준 모습을 본 것이다. 아하! 저렇게 하면 토마토에 수분 공급이 중단되어 빨리 익겠다, 맞거나 말거나 어림짐작하고는 운을 불러 세운다. 재빠르게 우리 밭으로 다시 돌아가 마르기 시작하는 아래쪽 잎들을 싹둑싹둑 잘라버린다. 찰토마토까지 손을 대고는 또 재촉하는 운을 따라나서며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연신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구시렁거릴 건 또 뭐람? 왕토마토는 괜히 잘랐나, 아직 더 클지도 모르는데…. 운이 뜨악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살아있는 것을 기르고 가꾸는 일에는 과한 열정이 꿈틀거리기 쉽다.
피곤한데도 잠 못 이루는 밤, 열정은 잠재우고 어쩌다 찍은 사진 한컷을 꺼내며 마이크로 코스모스의 세계, 텃밭이야기를 이제야 하고 있다.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친구여, 그대는 저 구름들조차 우리 발밑의 흙만큼 변화무쌍하지도 아름답지도 경외할 만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정원가의 열두 달> 중~
카를 차페크는 채소밭을 가꾸는 정원가와 순수한 정원가를 구분하더라만(웃기게도 가꾼 것을 먹고 안 먹고로), 결과물보다 사실은 흙의 향기(냄새가 아닌), 역동성에 매료된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손바닥만 한 텃밭을 가꾸며 살아있음을 느끼고 다가올 미래까지 하늘하늘한 커튼 뒤에서 어른거리는 것 같아 여전히 충족되지 않은 열정의 모습이지 않을까 감히 견주어 본다.
땀이 살짝 배인 몸으로 밭두렁을 나가며 구경하는 남의 밭 채소꽃은 휴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