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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련 Sep 08. 2024

<금강경> 대차대조표, ‘힙한 부처’의 전위적 진리

- 깨달음 = 무아(無我) + 자비(慈悲), 간단한 공식

‘금강경’의 풀네임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다. 대승불교의 모태인 금강경은 대한민국 불교의 장자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의 소의경전이기도 하다. 본래 금강경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쓰였다. 이를 최초의 삼장법사라고 알려진 구마라습(334?~413?)이 한문으로 번역했다.


영어권에서는 금강경을 ‘Diamond Sutra’라고 번역한다. 이는 정확하지 않은 번역이다. 인도와 중국에서 유래된 금강(金剛)은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물질’이란 뜻이다. 이런 개념이 없었던 영어권에선 금강을 자연 보석 가운데 가장 높은 경도를 가진 다이아몬드로 번역했다.


대한불교조계종이 표준 금강경(한문본·한글본)을 발표한 것은 2009년이다. 의외로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전까지는 저마다 번역과 주석, 해석한 수천 가지 버전의 금강경이 전승됐다. 말과 글이 통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소통과 논의가 어렵다. 이에 조계종의 금강경 표준본 확립은 지난하지만, 반드시 이뤄냈어야 할 과정이었다고 본다.


혹자는 대승불교 사상의 정점인 금강경을 놓고 “붓다가 설한 게 아닌 창작물”이라거나 “붓다가 설한 내용에 붓다 사후 수백 년에 걸쳐 여러 석학의 주석이 덧붙여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를 거치면서 나온 금강경이 초기불교(원시불교·근본불교)의 오리지널 가르침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다.


개인적으로는 “금강경을 실제로 붓다가 말했든 아니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주의다. 붓다 사후에 불교도 시대에 맞춰 계승되고 변화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를 꽃피운 수많은 조사의 가르침이 초기불교 속 붓다의 말과 다르게 보이는 것은 혼란한 시대상을 반영해 ‘즉각적인 깨달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붓다와 조사의 방편법은 다를지 몰라도, 그 실제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결국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목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금강경 자체의 내용은 어느 문학보다도 전위적이며, 어느 심리학보다도 유용하다. 특히 금강경 속 붓다의 가르침은 상당히 아방가르드하고 '힙'하다.




“그때 세존께서는 공양 때가 되어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걸식하고자 사위대성에 들어가셨습니다. 성 안에서 차례로 걸식하신 후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 공양을 드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습니다.” (금강경, 조계종출판사, p.16, 2009.)



“그때 대중 가운데 있던 수보리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며 합장하고 공손히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금강경, p.18.)



금강경은 붓다와 보살의 일상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많다. ‘밥때가 돼서 옷 입고, 밥그릇 들고 걸식하러 갔다’, ‘집으로 돌아와 걸식한 밥을 먹고 밥그릇 씻고 발도 씻고 자리를 펴고 앉았다’, ‘붓다에게 질문하려고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꿇고 합장했다’ 등등. 


이는 “전혀 기술할 가치가 없는 일상”이다. 하지만 이를 기록한 것은 “깨달은 이와 보살도 일상을 산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다. “비범한 깨달음은 하늘옷을 입은 천상의 존재가 누리는 게 아니라, 이 땅 위를 걷고 옷 입고 밥 먹고 씻고 앉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있다는 걸 기술한 것이다. 


이는 깨달음을 얻은 이의 일상을 보여줌으로써,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바로 “그냥 평범하고 무탈하게 산다”는 것.


그럼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무탈하게 살기 위한 ‘그러한 깨달음’은 어떻게 얻는가? 금강경 속 ‘힙한 붓다’의 해답은 역시 아방가르드하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남자 선여인은 이러한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나는 일체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리라. 일체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였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열반을 얻은 중생이 없다. 왜냐하면 보살에게 자아가 있다는 관념, 개아가 있다는 관념, 중생이 있다는 관념,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강경, p.62.)


깨달음을 얻기 위해선 고통받는 타인을 열반에 들게 도와주는 마음을 일으킬 것. 또 그렇게 일으킨 마음으로 타인을 열반에 들게 할 것. 하지만 열반에 든 타인이 열반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 것. 


한마디로 “너가 타인을 위해 봉사해야 하고, 또 반드시 결과물도 내야 하는데,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지 마!”다.


이는 “깨달음 = 무아(無我) + 자비(慈悲)”란 간단한 공식으로 표현된다. 대차대조표의 차변에는 깨달음이 있고 대변에는 무아와 자비가 있다. 깨달음이 자산이라면, 무아는 자본, 자비는 부채다. 일상에서 매일 ‘깨달음이란 자산’이 운용되려면 ‘자아가 없다는 무아라는 순수한 자산’을 기반으로 ‘일체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한다는 끝없는 부채’를 끝없이 감당해야 한다.


불교에서 삶은 고통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무아와 자비를 깨달으면 무탈한 일상으로 바뀐다. 일상의 소중함과 그 안에서의 행복을 찾는다면 ‘금강경’ 속 힙한 붓다를 만나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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