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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련 Sep 07. 2024

“분노로 잠을 설친다면” 크리슈나무르티

- 사랑? 복수? 미움? 용서? “헛된 것, 마음을 직시해야”

요즘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 1895-1986)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잊힌 사람이다. 잊힌 부처다. 한마디로 ‘재수가 그다지 없던 깨달은 이’였다. 그의 출생과 이력, 삶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과 추문도 모두 그 때문이었으리라.


크리슈나무르티를 보면 예전 법구경 속 붓다의 일화가 생각난다. 붓다의 아이를 임신했다며 붓다를 고발한 한 여인 말이다. 의혹과 진실, 사실은 저 너머에 있으니, 오늘은 크리슈나무르티가 남긴 말만을 고찰하려 한다.


생전 크리슈나무르티는 깨달음과 마음과 관련한 많은 강연을 했다. 인도인인 그의 활동 무대는 정작 미국과 영국 및 유럽 대륙이었다. 그를 놓고 종교가, 교육가, 사상가 등 많은 평가가 있다. 그를 두고 퍽 진지한 이라는 평가가 많으나, 나는 그를 장난기 많은 성자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가 자신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세상에 나툰 수많은 진리를 부러 모두 부정한 까닭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여타 각자(覺者)와는 달리 ‘믿음’을 강조하지 않는다. 천주교와 그로부터 파생된 개신교도 모두 하님 또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설한다. 붓다의 깨달음을 숭상하는 불교 또한 세 가지 교리가 있다. 바로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심(大疑心)이 그것이다. 역시 깨달음에 대한 믿음이 선행된다. 불교의 가르침 또한 사성제(四聖諦)니 팔정도(八正道)니 하는 것은 믿음 이후의 일이다.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하는 진리는 다르다. ‘믿을 수 있는 진리는 없고, 믿을 수 있는 경전도 없으며, 믿을 수 있는 교사도 없고, 믿을 수 있는 종교도 없다’는 게 그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생각하는 진리는 ‘각자 자신의 마음을 끝없이 탐구하고 의심하라’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저서 가운데 핵심이 오늘 소개하는 ‘Freedom from the Known’이다.


“For centuries we have been spoon-fed by our teachers, by our authorities, by our books, our saints. We say, ‘Tell me all about it-what lies beyond the hills and the mountains and the earth?’ and we are satisfied with their descriptions, which means that we live on words and our life is shallow and empty. We are second-hand people.” (Jiddu Krishnamurti, FREEDOM FROM THE KNOWN, Krishnamurti Foundation Trust Limited, p.10, 1969.)



‘We are second-hand people.’ 크리슈나무르티 사상의 핵심이다. 우리는 모두 ‘복사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붓다, 예수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크리슈나무르티의 수십 년 전 깨달음은 현재도 유효하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믿고 있다. 누구는 부처님, 누구는 예수님, 누구는 알라, 누구는 자본주의, 누구는 공산주의, 누구는 권력, 누구는 명예, 누구는 가문, 누구는 진리. 이에 대해 크리슈나무르티는 ‘진리를 포함한 평화와 사랑이라는 개념 모두 폭력’이라고 규정한다. 크리슈나무르티가 보기에 이는 모두 진자(振子)의 양 가장자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폭력-비폭력, 사랑-미움 등은 모두 반대되는 개념을 희석하기 위한 인간의 개념적 사고에 불과하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뭘까?


“We have had ideals without number, all the sacred books are full of them, yet we are still violent-so why not deal with violence itself and forget the word altogether?” (Jiddu Krishnamurti, p.56, 1969.)



폭력의 반대 개념을 생각하지 말고 폭력 그 자체를 ‘마음속에서 처리하라는’ 것, 미움 그 반대 개념을 생각하지 말고 미움 그 자체를 ‘마음속에서 처리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비폭력과 사랑을 생각하지 말고 부정적인 감정 그 자체를 직시하라는 말이다.


뭐, 그게 어디 쉬운가?


물론 어렵다. 나이를 먹다 보면, 사회에 치이다 보면, 삶을 오래 살아가다 보면, 사회 구성원으로 제몫을 하다보면, 또는 특정 조직에 들어가 수많은 이들을 만나고 인간군상들을 상대하다 보면, 어.렵.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내가 그 마음을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완숙하게 익으면 그 감정을 직시할 수 있다. 내 글을 어떤 분들이 읽으실지 모르겠지만, 이해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고 생각한다. ‘철저하게 노력해서’ ‘완벽한 성과를 거뒀는데’ ‘시대가, 조직이, 사람이 나를 배신했을 때’. 이러면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이 비로소 와닿는다.


어떤 상황이나 사람을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않거나, 증오하거나, 감싸보려고 그 상황을 생각하거나, 되갚는 방법을 골몰하거나, 용서하기 위해 마음을 정리하려고 하나? 죄송하지만 이 모든 건 헛되다. 왜냐하면 미움과 사랑, 복수와 용서는 모두 마음의 반작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저서들에는 이러한 우리 마음 작용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쓰였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실로 마음의 아인슈타인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마음의 작용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크리슈나무르티의 저서들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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