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혼자가 아니야
아이의 얼굴
시험관 시술로 어렵게 가진 아이를 임신 중일 때, 나는 아이의 얼굴이 무척 궁금했다. 남편과 나는 서로 매우 다르게 생겼기 때문이다. 프랑스 출신인 남편의 얼굴은 하얗고 길고 입체적인 반면, 한국 태생의 내 얼굴은 베이지색에 둥글고 넓적하다. 주수를 꽉 채우고 태어난 아이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아이여서 무조건 아름다워 보였다. 너무 아름다워서, 감히 나의 무엇을 닮아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나와 남편의 눈, 코, 입, 귀를 취사선택하여 완성된 얼굴이 아니었다. 그 얼굴은 완전히 새로웠다. 우리 부부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아이의 얼굴에서 나와 남편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별로 신뢰가 가지는 않았다. 그들의 시선에는 일관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댁에서는 아이의 눈이 엄마를 닮아 동양적이라 하고, 친정에서는 아이의 눈이 아빠를 닮아 서구적이라고 하는 식이었다. 똑같은 눈을 두고, 이렇게나 반대의 의견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재밌었다.
공평한 문화 노출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고 곧이어 동생도 태어났다. 두 아이는 문화적 풍요로움을 누리며 자랐다. 그러는 와중에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엄마의 문화와 아빠의 문화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상태로 자라는 걸 경계했다. 그건 공평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두 문화권의 음식, 명절, 언어를 같은 정도로 노출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제3의 문화
남편의 직장 문제로 네 가족이 싱가포르로 이주하고 난 직후에, 제3문화 아이들(TCKs:Third Culture Kids)이라는 용어를 접하게 되었다. 우리의 자녀들이 TCKs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 꽤나 두툼한 책 한 권을 구했다. 영어 사전을 뒤적거리며 책을 독파하는 동안, 지금까지 내가 착각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들은 엄마 나라와 아빠 나라의 문화를 반반씩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문화적 유산을 재료 삼아 완전히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얼굴이 우리의 DNA를 재료 삼아 완전히 새롭게 빚어진 것처럼.
TCKs와 CCKs
1950년대에 처음 등장한 제3문화 아이들(TCKs;Third Culture Kids)이라는 용어는 "성장기간 중 부모의 문화권 밖에서 상당 기간 이상 거주한 적이 있거나 거주 중인 어린이"로 정의된다. 과거에는 해외 파병 군인의 자녀, 외교관의 자녀, 해외 선교사의 자녀, 해외 근무자의 자녀 등 그 정의에 들어맞는 범위가 제한적이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더 다양한 케이스가 생겨났고, 이에 따라 기존 TCKs보다 더 넓은 범위를 포함하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그것이 바로 교차문화아이들(CCKs: Cross-Cultural Kids)이다.
CCKs: 18세 이전에 두 개 이상의 문화권에서 상당 기간을 살았거나 살고 있는, 혹은 두 개 이상의 문화권으로부터 유의미한 영향을 받았거나 받고 있는 어린이
CCKs는 부모의 직업을 이유로 해외에 일시 거주하는 아이들(전통적인 TCKs)뿐 아니라 주기적으로 해외 이사를 다니는 노마드 가족의 자녀, 이민가족의 자녀, 서로 다른 인종이나 문화를 가진 부모의 자녀, 유학생, 난민 어린이, 해외 입양아, 소수민족 아이, 국경지역에 거주하는 아이, 국내에 거주하면서 외국인학교에 다니는 아이, 수어를 사용하는 부모를 둔 아이 등 더 다양한 케이스를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넌 혼자가 아니야
대다수의 CCKs는 다양한 경험, 다중언어 구사, 넓은 세계관, 높은 문화 수용력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혜택을 누리며 살지만, 다문화 사이에서의 충돌, 관계의 단절, 뿌리의 부재, 정체성 혼란, 반복되는 상실 등으로 인한 정서적 어려움도 겪는다. 정서적 불안정은 삶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별한 관심과 돌봄이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본인이 CCKs라는 그룹에 속한다는 것, 그리고 전 세계에 수백만명의 CCKs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 자체로 소외감을 덜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서로 다른 사정으로 CCKs에 속하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그들끼리는 같은 경험과 느낌을 공유한다고 한다. 난민 어린이와 유학생이, 농아인 부모를 둔 아이와 이민 가족의 아이가 서로 공감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늘어가는 CCKs
한 TED강의에 따르면 전 세계 TCKs의 수는 약 4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는 부산광역시 인구를 훌쩍 넘는 수치다. 범위를 넓혀 CCKs의 수까지 더한다면 훨씬 더 많은 수가 집계될 것이다. 전에 없이 다양한 문화가 가시화되는 세상이자 나라 간 국경이 희미해지는 이 시대에, CCKs의 수는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만 해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탈 한국을 계획하거나 감행하고 있고, 다문화 가정과 이민자는 끊임없이 유입되고 있다. CCKs는 곧 새로운 기준이 될 것이다.
*글 작성 시 아래 도서와 강의를 참고하였습니다.
1.『Third Culture Kids: The Experience of Growing Up Among Worlds』, by David C. Pollock, Ruth E. Van Reken, Michael V. Pollock, Nicholas Brealey Publishing
2. 『What is home? Growing up between cultures』, Abeer Yusuf, TEDxTerryTal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