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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레사 Feb 22. 2024

멀티링구얼의 사정

멀티링구얼(Multilingual)과 세미링구얼(Semilingual)

  싱가포르에는 다중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흔하다. 싱가포르 국민들은 각자의 문화 배경에 따라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 중 한 두 개를 사용하고, 학교와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영어를 공동으로 사용한다. 싱가포르 전체 거주자의 약 30%를 차지하는 대부분의 외국인들 또한 각자의 문화 배경에 따라 영어를 포함한 두 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한다. 


  다중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저 0개 국어 해요"라는 우스갯소리가 돈다.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에 살다 보면 새로 배우는 언어에 한계를 느낌과 동시에 유창하던 모국어 실력은 깎여나간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언어 실력은 해당 언어를 얼마나 자주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느냐에 달렸기에, 능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습관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부터는 '0개 국어 한다'는 말이 더 이상 웃기지만은 않게 되었다. '이러다 암 걸리겠다'라는 말이 암 환자와 그 가족에게 상처가 되듯, '0개 국어 한다'는 말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튼튼한 모국어(First Language)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세미링구얼(Semilingual). 두 개 이상의 언어를 알고 있지만 그중 어떤 언어도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어렸을 적부터 두 개 이상의 언어에 노출되는 어린이가 나중에 커서도 당연히 그 언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우리 동네 미용실 사장님은 중국계 말레이시안으로 광둥어를 사용하는 가정에서 자랐다. 하지만 집 밖에서는 말레이어와 영어에 노출되었으며(그렇다. 사장님도 CCK로 자란 것이다.) 성인이 되어 싱가포르로 이주한 이후에는 표준 중국어에 더 자주 노출되었다. 그가 말했다.

"네 개의 언어로 기본적인 소통은 다 가능해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예요. 이중 그 어떤 언어도 완벽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아요. 말은 하는데, 읽거나 쓰지 못하는 언어도 있어요."

사장님은 다중언어를 동시에 구사하면서 한 언어의 부족한 점을 다른 언어로 채운다. A언어로 말하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B언어에서 가져다 쓰고,  B언어의 문법을 C언어에 적용시켜 말하는 식이다. 누가 굳이 지적해주지 않으면 틀리는 줄도 모르고 계속 틀리게 말하는 문장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큰 불편함을 모르고 산다고 했다. 그동안 너무나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온 일이고, 그런대로 삶은 잘 돌아갔다고.


  반면에 누군가는 같은 상황에서 좌절감을 느끼기도 한다. 아래는 어떤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한 CCK의 글이다.*

Title: 혹시 여기 세미링구얼인 사람 있어?
매일매일 나는 내가 바보 멍청이 같다고 느껴. 어떤 언어로도 나 자신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거든.
(중략) 어렸을 때 이나라 저나라 옮겨 다니면서 사느라 나처럼 언어 습득을 다 망쳐버린 사람 있어?
한 가지 언어에 온전히 집중하면서 배울 시간은 없고, 이미 배웠던 언어는 잊어버리기 너무 쉬워.

외국어를 익히기 전에 모국어 기반을 잘 다져야 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뿌리 튼튼한 언어 하나를 가지고 있어야 더 정확한 자기표현, 더 깊은 사유와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것이 두세 개 언어를 구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나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누구와도 깊이 소통할 수 없다면 삶이 얼마나 외로워지겠는가? 


  하나의 언어로 나를 제대로 표현할 줄 알고, 누구와도 깊은 대화가 가능하며, 문학작품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능력은 새롭게 습득하는 언어 능력으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 언어 자체가 가닿을 수 있는 넓이와 깊이를 일단 한 번 눈치챈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로 오기 전 유창했던 우리 집 아이들의 한국어는 천천히 프랑스어에 묻혀가는 중이다(참고로 아이들은 프랑스학교에 다닌다). 둘이 대화할 때면 늘 한국어를 쓰던 아이들이 언제인가부터 프랑스어로 갈아탔다. 적어도 나에게만은 꼭 한국어를 쓰던 아이들이 나에게 말할 때조차 점점 프랑스어 비중을 늘려간다. 나는 앞에선 "한국어로 얘기해 줄래?"라고 요청하는 동시에, 뒤로는 프랑스어 공부에 열심을 낸다. 아이들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어서. 지금이야 엄마한테 조잘조잘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잘도 쏟아내지만, 십 대에 접어들면 입을 닫아버릴지도 모른다. 하물며 본인에게 가장 편한 언어가 아닌 엄마에게 가장 편한 언어로는 그 입을 더 꾹 닫아 버릴 수도 있다(잠깐 눈물 좀 닦고...).


  더 많이 노출되는 언어가 더 유창해지고 더 편안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걸 알면서도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내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그래서 우리가 무언갈 잃어가고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하지만 다중 언어 구사자들의 속사정을 알고 난 뒤로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어느 언어가 됐든, 내 아이들이 일단 하나의 언어를 제대로 듣고, 말하고, 읽고, 쓸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밖의 한국어를 포함한 다른 언어까지 완벽하길 바라는 건 부모의 욕심이다. 사용 빈도가 낮은 언어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유지하기란 대단한 동기와 끈기, 노력 아니고서는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물론 본인이 욕심이 낸다면 불가능할 일도 아니지만.


  나는 지금껏 그랬듯 아이들을 꾸준히 토요한글학교에 보낼 것이다. 때로 취향을 저격할만한 한글책을 조용히 들이밀 것이고, 영상물을 보고 싶다고 조르면 한국어로 된 것은 얼마든 OK!라고 인심 쓰듯 허락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한국어를 잊어버리지 않을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완벽하진 못하더라도 끝까지 한국어라는 끈을 놓지 않기를. 그렇게 한국의 가족들과 계속해서 소통을 이어갈 수 있기를. 그리고 마침내 성인이 되었을 때, 나의 말과 내 존재를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 이것마저 욕심이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욕심쟁이가 될 것이다. 



*출처

https://www.reddit.com/r/TCK/comments/n4t8o7/is_anyone_else_here_a_semilingu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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