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찾은 이름
아이가 셀 수 없이 자주 적어낼 말. 아이가 평생 가장 많이 듣게 될 말. 아이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될 말. 그건 바로 이름이다. 이름만큼 인생을 시작하는데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아기 이름을 짓는 일에는 신중에 신중을 가해야 옳다. 내 부모님이 그 막중한 책임감을 덜어내기 위해 작명소로 향했다면, 우리 부부는 책을 뒤적거렸다. 다름 아닌 이름 책. 문자 그대로 이름이 리스트업 되어 있는 책이었다.
처음부터 책을 뒤적거릴 계획은 없었다. 이 책을 남편의 이모님 댁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되기 전 까지는. 무려 1800개의 이름이 소개되어 있는 이 책에는 각 이름의 의미와 기원, 관련된 성인(saint)에 대한 설명까지 자세하게 나와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종류의 책이라 단번에 구미가 당겼다. 책의 제목을 번역하자면 '브르통 이름' 정도 되겠다. Prénoms(프레농)은 이름을 뜻하고 Bretons(브르통)은 프랑스 브르타뉴 지역의 언어 혹은 사람을 뜻한다. 프렌치 이름책이 아니라 브르통 이름책을 뒤적거린 건, 남편의 부모님이 브르타뉴 출신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흔하지 않은 특별한 이름을 짓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브르타뉴는 한 때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기도 했을 만큼 지역 정체성이 뚜렷하다. 지금은 그 색이 많이 바랬지만, 예전에는 브르타뉴 고유의 언어, 문화, 풍습이 따로 존재했다. 브르타뉴 기(flag)는 아직도 해당 지역에서 쉽게 발견된다. 프랑스 전국 어느 도로에서나 지나가는 차를 자세히 들여다보다 보면 브르타뉴를 상징하는 스티커를 부착한 차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만큼 브르타뉴 출신들은 출신 지역에 대한 애착과 소속감이 남다르다. 남편은 따지고 보면 브르타뉴 출신도 아니면서 부모님을 따라 브르타뉴에 강한 애착을 느낀다. 웃긴 건 그게 나한테도 조금 옮았다는 거다. 누가 브르타뉴 출신이라고 하면 괜스레 반갑고, 디저트로 즐겨 먹는 크레페(crêpe)의 본고장이 브르타뉴라는 사실이 남몰래 자랑스럽다. 심지어 차에 붙인다는 브르타뉴 스티커를 나는 우리 집 냉장고에 붙여 놓기까지 했다.
이런 것을 보면 Domestic TCKs(국내파 제3문화 아이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나라 안에서도 지역마다 언어와 문화, 생활패턴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분명히 다르고, 이에 따라 국내에서의 지역 간 이동도 어린이에게는 충분히 문화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같이 작은 나라 안에서도 지역 사투리가 있고 지역 특색이 있다. 심지어 지역감정까지 있으니 말 다했다.
다시 이름 짓는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 한국어로 이름을 짓는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자유로웠던 것 같다. 일부 돌림자를 썼던 것을 제외하면, 집안 어른들이 생각하는 좋은 의미의 한자를 자유롭게 조합하면 되었을 테니까. 물론 그 반대로 듣기에 좋은 이름을 먼저 정해놓은 다음, 그에 맞는 한자 뜻을 끼워 맞추는 경우도 있다. 내 첫 조카의 이름은 그렇게 탄생했다. 최종 결정된 이름자를 가지고 네이버 한자 사전을 찾아보던 걸 기억한다. '크다'는 뜻과 '밝다'는 뜻의 한자어를 찾아낸 것도. 실제로 조카가 밝게 크고 있는 것을 보면 이름이 주는 영향력이 무시할 것은 아니다.
최근에 들어서는 쓰기도 부르기도 듣기도 예쁜 순우리말 이름도 자주 본다. 더 고유하고 독창적이지만 희한하게도 시대마다 유행하는 이름이 있어서, 곧 흔한 이름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다. 이름책에 줄줄이 나열된 이름도, 고심 끝에 창의적으로 만들어낸 이름도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거나 곧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 된다.
볼록하게 솟은 배를 쓰다듬으며, 나는 앞서 언급한 이름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읽어 내려갔다. 중간중간 한국어로 어색하지 않으면서도 발음하기 쉬운 이름은 따로 리스트업 하는 걸 잊지 않으면서. 이안, 요안, 오안, 말로, 로익, 에반, 알란, 이완, 라울, 타란 등등의 이름 중에 우리 부부는 테이(Teï)라는 이름을 골랐다. 당시 내 조사에 따르면(별로 신뢰가 가진 않지만), 한국에서는 가수 테이 외에는 이 이름을 쓰는 사례를 찾아보지 못했다. 시댁에서는 브르타뉴를 포함한 프랑스 전체에서 테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내가 원하던 게 바로 이거였다. 희귀한 이름!
프랑스 아이들은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놀랍도록 많다. 남아 이름인 테오, 루이, 레오 삼총사는 조금 과장하자면 각 반에 한 명씩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아이는 아직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를 만난 적 없다. 한국의 한 지인이 그 집 아이에게 '태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경우를 제외하면, 똑같은 이름을 본 적 없다. 이게 남 모를 뿌듯함을 준다. 1800개 이름을, 남아 이름만 치자면 약 900개나 되는 이름을 훑은 보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