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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Aug 29. 2023

해설 단군신화(20. 교정)

구려한국시대와 치우환웅

 단군신화에는 없지만 환단고기 등의 한국고기와 중국사서를 보면, 유소환웅이 하나님으로 지상세계에 내려와 치우환웅이라는 이름으로 신시(神市즉 구려국(句麗國) 세울 때,  염제유망(楡罔炎帝)이라는 신과 공공(共工)이라는 신, 그리고 공손헌원(公孫軒轅)이라는 인간이 있었다.

 

후술할 탁록대전이 이들과 관계가 있음으로 먼저 살펴보았다. 




염제유망(楡罔炎帝)과 공공(共工), 그리고 공손헌원(公孫軒轅)의 이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황제(黃帝) 공손헌원


  공손헌원(公孫軒轅)은 스스로를 황제(黃帝)라 칭하여 황제헌원(黃帝軒轅)이라고도 한다.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이 쓴 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황제(黃帝)에 대해 “성은 공손(公孫)이요, 이름은 헌원(軒轅)으로 유웅국(有熊國)의 임금인 소전(少典)의 아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황제(黃帝)와 관련된 신화는 문헌에 따라 전승되는 내용이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위의 사기의 기록대로 헌원이 유웅국(有熊國)의 임금인 소전(少典)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방계일 것이고, 곰토템의 웅녀는 시기적으로 보아 유웅국(有熊國)의 임금인 소전(少典)의 직계 아들의 딸 즉 손녀 쯤 된다.

 한국고기 태백일사와 한국사서 규원사화에서는 헌원의 아버지 소전에 대해  "소전은 소호씨(小皞氏)와 함께 모두 고시(高矢)씨의 방계이다. 소전의 별고(別孤)에 공손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해 헌구(軒丘)로 유배되었다. 헌원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여기서 소호씨(小皞)는 중국전설시대 오제()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인물인 소호(少昊)와는 다른 존재이다. 그리고 공손이 소전의 별고(別孤)라 하였음은 은혜를 입어 가족이 된 외로운 존재라는 의미로따라서 공손은 소전의 아들이 아니고사기의 기록은 양자를 친자로 날조한 허위이다.


 황제(黃帝)라는 명칭이 황제(皇帝)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황제(皇帝)는 오행(五行) 사상에서 곤륜산(崑崙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각각 청제(靑帝 혹은 蒼帝)·백제(白帝)·적제(赤帝)·흑제(黑帝)가 다스리고, 중앙을 황제(黃帝)가 다스린다고 하는데, 황제(黃帝)는 자신이 세상을 다스리는 중심이라는 사고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황제(黃帝)중국문화권에서 중국의 국가 형성과 관련된 신화에 나타나는 삼황오제(三皇五帝) 가운데 하나인  제왕이 되면서 황제(皇帝)로 탈바꿈하였다. 참고로 삼황오제(三皇五帝)와 관련된 전설은 여러 계통이 있으며 민간 전승이나 문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있다. 하지만 신농(神農), 복희(伏羲), 여와(女媧)를 삼황(三皇)으로, 황제(黃帝)·전욱(顓頊)·제곡(帝嚳)·요(堯)·순(舜)을 오제(五帝)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오제는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황제를 삼황으로 꼽을 때는 소호(少昊)를 오제에 넣기도 한다. 

 사실 황제(皇帝)는 본디 제왕(帝王)이 아니라 황천상제(皇天上帝)의 줄임말로서 천제(天帝) 즉 옥황상제를 뜻한다. 이에 따르면 중국문화권에서 헌원이라는 인간의 별칭인 황제(帝)의 황(黃)을 신을 의미하는 황(皇)으로 둔갑시켜 신(神)을 사칭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황제(黃帝)라는 명칭이 황제(皇帝)로 바뀐 기원에 대해  중국 지식인들이 일본의 황기를 보고 자극받은 창안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일본제국 당시 일본은 천황 즉위에 따른 연호를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진무덴노가 즉위했다고 전해지는 기원전 660년을 원년으로 하는 '진무덴노즉위기원'(神武天皇即位紀元), 통칭 황기(皇紀)도 병용했는데, 일본제국에 유학을 온 중국의 지식인들이 이를 보고 황제의 황(黃)을 황(皇)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너무나 큰 연대적인 차이나, 고대로 부터의 문물전래과정이 중국-한국-일본의 순서였음을 생각하면 의문의 여지가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보면 "소호(少昊)는 황제의 두 아들 중 하나인 현효()로 나오며, 궁상()에 도읍을 정했기 때문에 궁상씨라고 불렀다. 오행의 으뜸인 금()’자로 자신의 정치와 덕을 표시하고 '금덕()으로 천하의 왕 노릇을 한다’는 설을 내세웠기 때문에 금천씨(金天氏) 또는 소호금천(少昊金天)이라고도 한다. 후세에 대화하현종강황제() 혹은 백제라고 불리었고, 84년간 재위하다가 100살어로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호금천은 반고가한의 후예로 추정되는데, 둘다 금(金)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모두 중국민족의 조상으로 확인된다.

 회남자() 시칙편()에 보면 "소호(少昊)는 훗날 구망()이란 아들을 남겨 태호 복희씨를 보좌하게 했고, 자신은 요수()라는 다른 아들을 데리고 서방으로 가서 서방의 천제가 되어 곤륜에서 간쑤성 돈황현에 이르는 삼위의 나라() 1만 2천 리의 땅을 관할했다. 소호씨는 장류산 위에 살면서 서쪽으로 기우는 태양의 반사와 동방의 빛이 정상인지를 살폈고, 아들 요수는 부근 유()산에서 비슷한 일을 했다."고 한다.  중국사서에서 소호는 분명 황제의 아들인데, 소호의 아들이 황제보다 선대인 태호복희씨를 보좌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한국 기록의 소호씨(小皞)와 중국기록의 소호(少昊)'소호금천(少昊金天) 혹는 금천씨(金天)는 분명 다른 인물로, 소호씨(小皞)가 소호(少昊)보다 3세대 앞설 뿐만 아니라 소호(少昊)는 씨자를 붙였을 때 금천씨로 성이 다르다. 분명 황제의 아들 소호(少昊)소전과 함께 고시씨의 방계인 소호씨(小皞氏)를 동일시 하여 중국전설시대 오제()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인물인 소호(少昊)를 허위로 만들어 낸 것으로 역시 중국문화권의 사기 행각이다. 

 다만 사기(史記)에서 "소호(少昊)는 소호(少皞), 소호(少皓), 소호(少颢)라고도 하며, 청양씨, 운양씨(云阳氏), 주선(朱宣)라고도 불린다."고 하였는데,  소호씨의 성을 이름으로 썼던 점과 전통적으로 새를 토템으로 삼았던 점과 그 자손들이 산둥반도에서 장화이() 유역으로 세력을 발전시켰던 점 등을 통해 보면 중간에 소호씨(小皞)가 소호(少昊)의 선대와 잠시 합쳐져서 새토템을 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포박자에는 "옛날에 황제(黃帝)가 동쪽의 청구(靑丘) 땅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는 자부선인을 만나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국고기에 의하면 청구는 구려한국의 수도이다

 일부의 한국 재야사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환단고기에 의거해 자부선인이 태호복희씨와 함께 공부한 발귀리 선인(發貴理 仙人)의 후손이며, 상고시대인 배달국의 학자로 후대의 유위자(有爲子)의 학문도 자부선인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만약 포박자의 기록대로 황제가 자부선인으로 부터 삼황내문을 받았한국고기의 내용대로 청구가 구려한국의 수도라면환단고기의 위서여부를 떠나서 황제는 구려한국을 추종했던 인물이 된다


 황제(黃帝)는 중국을 통일해 국가를 세운 최초의 군주(君主)이자, 문자, 의복, 수레, 거울, 60갑자 등의 문물을 만들어 중국 문명을 창시한 인물로 숭배를 받아 왔는데, “황제(黃帝) 헌원(軒轅)이 중국의 모든 나라를 건설했고 이에 따라 천하가 평화로워졌다.”며 황제(黃帝)를 칭송하고 있다. 그리고 이상적인 제왕의 모습으로 여겨져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황제(黃帝)의 정치에 관한 황학(黃學)이 학문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한서(漢書)에는 “옛날에 황제(黃帝)가 있었다. 배와 수레를 만들어 백성에게 천하를 돌아다닐 수 있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헌원(軒轅)이라는 이름은 수레와 수레끌채라는 뜻으로 그가 수레를 발명했다는 신화의 내용과 관련되어 있다. 이름하여 지남거(指南車)라고 하는데, 항상 남쪽을 가리키는 일종의 나침판 역횔을 하는 장치가 있는 수레로 추정된다.

 사기(史記)에는 황제(黃帝)가 100년 간 재위(在位)하였으며, 그 뒤에 수양산(首陽山)으로 가서 구리를 캐어 보정(寶鼎)을 주조한 뒤에 용을 타고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중국 진나라[秦] 사람인 갈홍의 포박자(抱朴子)에는 황제(黃帝)가 만년에 자기가 직접 죽을 날을 택해 신하들과 사별한 후 교산(橋山)에 묻혔지만, 얼마 후 무덤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는데 무덤 속에 시신은 없고 검과 신만 있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오늘날에도 산시성(陝西省) 황링현(黃陵縣) 교산(橋山)에는 황제(黃帝)의 무덤으로 알려진 황릉(黃陵)이 전해지는데, 1992년 중국 정부에 의해 대규모로 보수되었다.      


2. 염제유망


염제유망(楡罔)은 염제신농씨의 8대손이라는 것과 황제헌원씨에 의해 판천 대전에서 패배해 그의 추종자가 된 것 외에 별다른 기록이 없다. 최초의 염제 신농씨가 출연한 시기가 기원전 3218년이고, 황제 헌원씨가 즉위한 해가 기원전 2697년으로 서로 500년 정도 차이가 난다. 

 염제신농은 신의 존재이고염제유망은 인간의 존재이니 수명으로 관계를 논할 수는 없다다만 전형적인 국가 건설 신화에 따라 염제신농이 염제유망의 선조 격이 될 수는 있다


3. 공공


 공공(共工)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물의 신으로, 불의 신인 축융(祝融)의 아들이다. 

원래 삼황오제 중 현재는 남방 상제로 취급되는 전 천제 염제 신농 열산씨의 자손으로 강성(姜姓)이며, 전승에 따르면 인간의 몸에 뱀의 하반신을 지닌 남성 신으로, 9개의 머리에 붉은 머리칼을 지녔다는 언급도 있다.

활동 중심지역은 이른바 ‘구주(九州)’로 황하 중류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유역에 가까웠다.

     

공공은 황제 때 물과 관련된 사업을 담당한 수관이다. 공공은 어느 기록에서나 물과 관련되어 나타나며, 또 공사(工師)로 기용되었다는 기록도 있어 토목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아들 후토(后土)는 물과 흙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어 치수사업에 공을 세워서 사신(社神)으로 받들어졌다고 한다. 요 임금 때는 교만방자하고 사악하다는 이유로 배척당한 기록이 『사기』에 보이는데, 그만큼 그의 세력이 강력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사람들은 공공을 기려 대황 북쪽 들판과 북방 해외에 공공대(共工臺)라는 것을 세웠다고 하는데, 동지 팥죽 전승과 관련이 있는 신이기도 하다. 공공의 아들 중 하나가 동짓날에 죽어서 역병을 퍼트리는 귀신이 되고 말았는데, 그는 팥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동짓날 팥죽을 쑤어다가 이 귀신이 집에 못 들어오게 문 앞에 뿌리거나 했다고 한다.


 한국고기에서 공공은 반고가한의 수하로 함께 삼위산 납림동굴에 내려온 신으로 그려지고 있는데중국사서에서는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천하에 해를 끼친 4주의 악신인 사죄(四罪) 중 하나에 해당한다. 사마천의 사기 본기에서 사죄는 각각이 중국 사방에 사는 오랑캐족이 되었는데, 공공(共工)은 북적(北狄), 환두(驩兜)는 남만(南蠻), 삼묘(三苗)는 서융(西戎), 곤(鯀)은 동이(東夷)가 되었다고 한다. 

사죄(四罪)와 유사한 것으로 사흉(四凶)이 있다. 중국사서의 서경과 춘추좌씨전에서는 고대 중국의 순제(제순유우)에 의해 중원의 사방으로 쫓겨난 4 기둥의 악신인 사흉을 들고 있는데, 큰 개의 모습을 한 혼돈(混沌)‘ 양신인면(羊身人面)에 눈이 겨드랑이에 있는 도철(饕餮)’ 날개가 달린 호랑이 궁기(窮奇)‘ 인면호족(人面虎足)으로 멧돼지의 송곳니를 가지는 도올(檮杌)이 그것이다. 

 사죄와 사흉은 모두가 중국민족과 대립하였던 민족에 대한 명칭인데, 고대에 중국과 가장 크게 대립하면서 입장이 갈렸던 역사 기록이다. 따라서 공공 역시 한민족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치우환웅이 구려국을 세운 가운데, 이런 신들이 함께 있었으니 분쟁이 없을 수 없고, 그 결과가 탁록대전으로 나타난다. 탁록대전을 이야기 하기전에 단군신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단군신화 해석을 위한 팁'을 살펴보았다.



- 해설 단군신화(21) "단군신화 해석을 위한 팁"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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