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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오십 May 25. 2024

기회의 땅은 어디인가.

Stars - Janis Ian


살다 보면 다양한 사건이 생긴다. 복선, 혹은 예언 같은 말들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며칠 전 내 삶에 예언자 같은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아니, 정확히는 … 그렇게 내가 의미부여를 하게 되는 상황이다.


개봉한 영화 퓨리오사를 보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마트 앞을 지나가는데 한 할아버지께서 자전거를 잡고 이리저리 휘청이고 있으셨다. 워낙 마르신 데다가 짐이 자전거 너머에 있어서 한 손으로 자전거를 잡고 짐을 손잡이에 거는 걸 도와드렸다.


조심히 가세요, 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할아버지께서 대뜸 잠깐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하셨다.

고마워서 해줄 이야기가 있다고.


*


- 대학 다니고 있어?

- 아니요, 작년에 졸업했어요.

- 아, 그래?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아주 늦지는 않았어. 미국에 가서 학비 지원해 주거나 학비 부담이 적은 대학 가서 미국에서 취업해.


백발의 할아버지는 남색 캡 모자를 쓰시고, 선글라스를 쓰고 계셨다. 물론 먼저 말을 걸고 장바구니를 손잡이에 걸어드린 건 나였지만 워낙에 사이비 종교를 강요하거나 이상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유심히 할아버지 얼굴을 살펴봤다. 할아버지도 그런 내 태도를 은연중에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내 얼굴을 보시면서 줄줄줄 이야기를 하셨다.


- 내가 젊었을 때 대학에서 양자역학을 공부했어. 자식은 아들 둘 있는데 미국에서 잘 살고 있어. 한 명은 의사 하고, 한 명은 ***** 대학교 나와서 회사 다니고 있고. 자네가 늙은이한테 베푼 선행으로 자네 인생이 좋은 쪽으로 확 변했으면 좋겠어서 그래. 허송세월하지 말고, 할 수 있다고 믿고 하면 되니까 해 봐.


- 정보를 몰라서 헤매거나, 허송세월하는데 내가 딱 알려줄게. 미국 가. 영어공부 회화 문장 50개만 외워서 미국 가서 생활해.


- 여기서 돈 벌려고 하지 말고, 꼭 미국 가. 가족이 미국에 있으면 도움 좀 받고, 미국 없어도 안전한 동네 있으니까 거기서 대학 나오고 거기서 취업해.


- 어려움도 뚫고 나아갈 힘만 있으면 돼. 그리고 거기 대학이나 취업한 곳에서 사람들과 대화해 봐. 똑똑한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다 보면 확 트이게 되니까.



한 달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끔 할아버지 생각하면서 혼잣말할 때가 있는데 그래서 그 할아버지를 봤을 때 지나칠 수 없었다. 꼼꼼히 조언을 해주는 할아버지가 꼭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해주시는 말 같아서, 그래서 더 귀담아 들었다.


- 자네는 똑똑하니까 내가 한 말 중에 걸러들을 것(시대에 맞지 않는 말)은 걸러 듣고, 꼭 된다고 생각하고 3개월 영어공부해서 미국 가봐.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고, 할 수 없다면 할 수 없는 거고, 자네한테 달려있는 거니까 할 수 있다고 믿고 내가 한 말 중에 세 개만 기억하면 돼. 뚫고 나아갈 힘만 있으면 다 할 수 있다, 영어공부해서 미국 가라, 사랑에 빠져서 다 주는 걸 경계해라..


*


한낮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어딜 갈지 몰라서 방황하는, 세상에서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할아버지 말씀대로 삶의 일정 부분을 허송세월하는 젊은이여서, 그래서 그 할아버지의 조언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한편으로는 그날 오전 조조영화로 본 ‘퓨리오사’에서 주인공 퓨리오사의 서사가 너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자신이 자초했건 세상이 밀어 넣었건 상관없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잔혹한 사건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기민하게 살아남아서 결국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는 서사, 그리고 그 안에서 침착하게, 갚아야 할 건 갚고 받아야 할 건 받아내는 모습이 멋있었다. 나는 두려움이 많은 편이라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납치될 위험을 감수하고 용기 있게 행동하고, 좌절이나 원망의 굴레에 갇혀 구원을 기다리기보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구원이 되는 퓨리오사 캐릭터가 너무 인상 깊었다. 그 태도를 닮아야지.


*


운명을 믿냐고 하면 믿는 편이었다. 그래서 개척에도 게으른 편이었다. 실수하거나 실망하는 거, 후회하는 게 두려워서, 부끄러워서 삶의 굴레를 굴려나가는 걸 망설이고만 있었는데 영화와 할아버지를 보고 좀 내 삶을 부지런히 가꿔야지 싶다. 그 동기가 불안이나 긴장이 아니라, 긍정과 자신감으로 더 적극적이고 당당해야지 싶다.


그럼에도 늘 내 것인 것과 내 것 아닌 건 있다고 생각한다. 내 것이 아닌 것에는 크게 욕심내지 않고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걸 늘 마음에 가져야겠다.


*


아들 둘이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더운 한낮 볕 아래서 혼자 짐과 힘없이 씨름하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대조됐다. 시골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 자식은, 우리 손주는….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잘 오지도 않는 애들 자랑을 경로당에서 하는 게 생각나서 혼자 안타까웠다. 사실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도 도움받고 잘 사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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