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t Reznor, Atticus Ross - Epiphany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살다가 갑자기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이 떠오를 때가 있다. 가을이 오면 그렇다. 영화에서 ’22번’이 조의 영혼에 갇혀서 어느 거리 계단 앞에 앉아있고, 단풍나무 씨앗 하나가 빙글빙글 돌아 그 앞에 날아온다. 22번이 그 씨앗을 주울 때 ephiphany라는 테마곡이 나온다.
에피파니는 ‘느닷없는 깨달음’, ‘갑작스러운 이해의 순간’이라는 뜻인데, 그리스어-귀한 것이 나타난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appearance, manifestation, coming이라고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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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가을은 참 암울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슬프고, 신던 신발이 낡아서 새 신을 사야 하는 것도 슬프고, 냉장고 한편에 뒀던 사과가 썩어가는 것도 슬프고 변해가는 게 다 슬프다고 느껴졌다. 남들은 다 태어날 때부터 다 있는 영구치가 나에겐 하나 없고 누구는 없을 수도 있는 사랑니가 나에겐 세 개나 있다는 것도 슬펐다. 그렇지만 부모님이 늙어간다는 걸 얼굴에서 확인하는 것보다는 덜 슬펐다.
당시에 ‘나는 왜 살지. 왜 살아야 하는 거지.’라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있었기도 했다. 그렇다고 죽고 싶은 건 아니었고, 그냥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는 걸로 답이 퉁쳐지지도 않았다. 나의 생에 대한 ’쓸모‘가 없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무의미에서 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어떤 위대한 사람들은 생으로써 자신의 삶의 의미를 답하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하고, 어떤 대범한 소시민은 이왕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보는 게 이득 아니냐고 설득하기도 했다. 전자는 나의 삶의 의미를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생을 살게 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울까, 혹은 나의 생이 시시하다면 나는 말년에 얼마나 실망하게 될까 를 생각하게 했고 후자는 설득은커녕 위로나 용기조차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꽤 우울한 가을을 보냈던 것 같다. 친구를 만나지도 않았고, 즐거운 일을 찾을 생각도 하지도 않았고, 하고 싶은 게 뭔지 고민하지도 않고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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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정말 ‘내 것’인 게 있기나 할까, 생각한다. 영원히 내 것인 것? 요즘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조차 별개의 개인으로 존중해줘야 한다고 한다. 내 배로 낳은 아이지만, 내 것은 아니다. 작품을 쓰면? 그것도 영원히 내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로 전해지고, 각자의 것이 된다. 물건도 그렇고, 지위도 그렇고, 자격증도, 사람도… 다 빌리는 것 같다. 내 것이라고 착각할 수는 있는데, 정말 내 것 같을 수 있는데, 사실 빌리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네 살쯤 되면, 대개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게 된다. “내 거야.”
독점욕 강한 아이는 “내 거니까 만지지 마.”라고 하기도 하고 누가 뺏어가면 엉엉 울기도 한다. 조금 관용이 있는 아이는 “빌려줄까?”, “같이 쓸래? 내가 좋아하는 거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주로 음식에 대해서 ”내꺼야.”라고 말했던 것 같다. 같이 식탁에 앉은 2살 위의 언니에게 단 하나의 용가리 치킨마저도 뺏기지 않기 위해 (물론 언니는 뺏을 마음은 없고 다만 먹고 싶었을 뿐이겠다.), 혹은 아빠가 장난스레 내 반찬을 훔쳐먹는 시늉을 할 때면 그랬다. 이런 습관은 20대 후반인 지금도 있는데, 식사할 때면 고기의 개수를 세고 누군가가 하나 더 먹으려고 하면 옹졸하게 “내 거야.”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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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데에는 시간과 노력, 또는 돈이 필요하다. 나는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해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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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학생 때만 해도 ‘되고 싶은 나’가 있었다. 되고 싶은 나. 과학고등학교에 가서 실험도 하고 관심 있는 과목에 더 집중해서 공부하는 기회를 얻고 싶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졸업해서 과학계에 기여하는, 인류에 좀 더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조금 ‘외부’의 인정에 기대는 면이 없잖아 있지만, 동기에는 꼭 순수하게 100% 내면적인 게 오히려 드물지 않나 생각한다. 하여간 나는 ‘과학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공부하는 나’가 되지 못했다. 그게 많이 좌절스럽기도 했고, 수치스럽기도 했고, 이유를 알고 싶기도 했고, 타인보다 나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해서 -라는 쪽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남들보다 덜 좋아하기 때문에 안 된 거라고,.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많이 의심하게 됐다. ‘사실 과학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닐까?’, ‘주변 사람들이 네가 똑똑하다고 하는데, 그냥 하는 소리 아닐까?’, ‘사실 나는 그렇게 공부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걸까?’, ’나는 뭘 해야할까? 좋아하는 게 없는데.‘, ’내가 좋아한다고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데 앞으로 나는 뭘 더 할 수 있을까.‘, ‘내가 가장 좋아하고 나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등…
당시에 나는 꿈꾸던 나를 이루지 못한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왜 내가 안 된 건가’에 대해 주변에 질문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형식적인 짧은 위로를 건네기도 했고, 없던 일인 것처럼 혹은 모르는 소식인 것처럼 나를 대했다. 내가 가진 의심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면 조금은 덜 괴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외로워했다. 하지만 외로움은 내가 혼자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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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나의 특성에 알게 되었는데, 뭘 해보다가 계획의 하나가 어긋나면 중요한 일일수록 오히려 더 빨리 포기하는 성향이 있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되는 요리 같은 경우에는 계량이 틀리거나 순서가 바뀌어도 아무렇지 않게 끝까지 수행한다. 하지만 중요한 일, 나를 긴장되게 하는 일, 혹은 내가 정말 이루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내가 원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면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 진로에 관해서도 그랬던 것 같다.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자. “ 이렇게. 사실 생각해 보면 주변 선생님들과 의논해서 내가 원래 원했던 ‘나의 모습’에 다시 수렴하는 계획을 세워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너무 지나치게 단념하고, 지나치게 좌절한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나의 극단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이것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것도 아닌데, 이것 아니면 다 싫다는 식의 접근 말이다. ‘되고 싶은 나’를 만들기까지 내게 주어졌던 기회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성숙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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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쉬운 수학문제를 풀고 있는데, 그 답마저 틀려버리는 악몽을 꾸기도 하고, 내가 아는 게 정말 아는 게 맞는가,라는 생각에 읽었던 지문을 다시 읽게 되는 그런 현상이 생겼다. 정말 많이 화가 났다. 첫 단추부터 꿰질 못하는데, 나는 뭘 할 수 있나. 계획을 세워 성실하게 살았는데 왜 나는 안 됐는가. 계획과 루틴이라는 것에 의미를 두는 건 재능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간추리자면 ‘왜 나는 못 가졌나.’였다.
뉴스에서 누군가는 명패, 상장, 명함 정도로 생각하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볼 때면 너무 화가 났다. 가진 사람들 중에서는 마땅히 가져야 할 것 같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 이것도 잘 모르겠다. ‘마땅히’ 가져야 할 것 같은 사람이라는 게 정말 있기나 한 건지. 평등하다는 조건이 정말 평등한지에 대한 논의가 많이 퍼져있어서 그런 것 같다.
영역 다툼 같기도 하고, 의자 뺏기 게임 같기도 하고.. 순위를 매기는 데에 익숙한 환경에 살아서 그런가, 원래 내가 그런 사람인가 잘 모르겠지만 삶의 단면을 잘라보면 그 순간엔 제로섬 게임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있고, 그 게임에서 생존하려면 내가 경쟁에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물론 삶의 뭉텅이로 보면 모든 게임이 제로섬은 아니겠지만. 새옹지마, 전화위복 다 구전되어 오는 인생의 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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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지심, 열폭 내지는 정신 승리인데, 나는 오히려 ‘그걸 별로 안 좋아했어’ 쪽으로 도도하게 선회하기를 선택했다. 근데 정작 나는 ‘정말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로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쟁에서 쟁취한 사람들을 보면 질투하고 부러워하고 ‘내 것이었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하다가 ‘내 것이 아니지.’, ’ 내가 그들보다 뭐가 됐던 덜 했기 때문이겠지.‘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꼭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는데 아무튼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까지 구차해지고, 비굴해지고, 찌질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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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되고 싶은 나에게 첫 거절을 당하기 전에 나는 꽤 숭고하고 폭력적인 마음으로 살았던 것 같다. 노력하면 할 수 있다, 왜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거지,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은 늘 옳은 길을 이끈다, 꿈을 꾸고 그것에 시간을 쏟으면 어느새 나는 꿈꾸던 곳에 가 있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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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보니 십 년 전의 나를 떠올리며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참 구식이다, 미련이 엄청나다,라고 생각되기도 하는데 지금의 나를 만든 데에는 ‘가지고 싶었지만 가지지 못한 첫 꿈’이 가장 영향을 많이 줬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에 대해서 생각하고 글을 쓰게 된다.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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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렇게 과학이 하고 싶었으면 하면 됐을 텐데?…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오히려 그때 나는 자격을 바랐던 것 같다. 내 말에 근거나 힘이 되는 조건.
자격이 없어도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다. 그게 아마추어든 뭐든 간에 관심이 있다면.
중학생 때 나는 신용받고 싶었나 보다. 자격이 없어도, 인정이 없어도, 알아주지 않아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권에서 ‘자신에게 솔직하십시오.‘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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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조직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이유 중 하나는 확실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인 것 같다. 뭘 하는 사람인지 설명가능한. 가능한 명쾌하게.
회사 이름을 대기만 해도 ‘대충 모 회사의 모 제품을 만드는 데에 기여를 하고 있구먼.’ 생각한다. 전통적인 직업의 경우 설명이 필요 없다.
명함, 직함 다 떼고 나면 사실 사람은 그냥 사람인데 이 사회에서는 자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1인 미디어가 발전할수록 다 같이 더 번지르르해지는 것 같다.
체면? 위상? 겉치레? 보이고 싶은 이미지? 가면?
내게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데 그 사람이 ‘진짜’일까 가늠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다. 이미 밖에서 돈을 벌고 있으면, 속은 사람이 있으면 가짜여도 상관없어지기 때문이다. 속은 사람이 끝까지 모르면 속인 사람은 진짜가 된다.
그렇다면 왜 상관없는 일에 나는 고약하게 굴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심술 나서?. 하지만 악플러나 무분별한 키보드워리어는 되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는 거다. 정말 ‘그 정도로 대접받을 사람인가?’. 오지랖이고, 에너지 낭비다. 하지만 내 나름 ‘진짜’라고 생각하는 것과 ‘가짜’라고 생각하는 것을 분류하고 나면 속이 시원하다. ‘진짜’라고 생각하는 건 인정이 쉬워지고, ‘가짜’라고 생각하는 건 더 이상 찾아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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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진짜,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다 가짜다. 왜냐하면 다 진짜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짜 가져본 적이 없는데 상대방이 진짜를 가진 건지, 가짜를 가진 건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다고 진짜를 무시하자는 것도 아니고, 가짜를 손가락질하자는 것도 아니다. 진짜도 가짜도 힘들어죽겠는 건 매한가지인데 진짜는 가짜 앞에서 떵떵거리지 말고, 가짜는 진짜 앞에서 수군거리지 말자.
정말 막 말로, 진짜는 진짜 본인이 가진 게 자기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가짜는 진짜가 가진 게 영원히 진짜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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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비유하자면, 꽃나무에 꽃이 함께 피었다가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는데 어떤 꽃잎은 주렴에 스쳐 비단 보료 위에 떨어지고, 어떤 꽃잎은 울타리에 막혀 똥구덩이에 빠지는 것이다. <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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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석하지 않고 학교도 잘 다녔다. 법을 어긴 적도 없었다. 하루에 삼분의 일에서 이분의 일을 일터에서 성실히 보냈고 공과금도 기한 내에 냈다. 그럼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살았으니까 이만큼이라도 산다고 만족해야 할까. ‘스물일곱 살 인생 평가 좀’ 같은 제목의 글에 사람들이 쏟아놓는 댓글을 보면 가끔 뭘 잘못한 것 같기도 했다. 더 잘 살고 싶었다면 공부를 더 잘했어야 한다고. 솥뚜껑삼겹살도 즉석떡볶이도 먹지 말고 맥주도 마시지 말고 섹스도 하지 말고 닥치고 공부해서 시험에 붙든 돈을 모으든 했어야 한다고. 남들 다 자리 잡을 때 어리바리하고 게을렀던 우리가 ‘빡대가리’라고. 두 사람은 이런 질문에 도달했다.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
-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문학동네, 134,135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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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평가하고 살아가는 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다. 타인을 평가하는 것도 사실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물론 우린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고 그렇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진짜냐, 가짜냐, 그럴만한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를 재고 따지는 건 의도를 짚어봐야 한다. 단지 비난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사회에 해악이 되는 사기꾼이라서인지. 여차하면 마녀사냥이다. 자신이 마녀가 아닌 것을 증명해야 한다? 어떻게? 신분증이라도..? 확실한 사람이라고 설명해야 한다?
나는 가지지 못했는데 쟤는 가졌다.라는 문장에서 ‘나’는 쟤가 가질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쟤’는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고 설명이 필요하냐고 생각할 것이다.
가지지 못하면 가진 ‘쟤’는 다 누리고 사는데 ‘나’는 못 누리고 사는 거니까. 쟤가 가진 걸 엎어버리고 싶을 것이다. 쟤는 아마 그런 생각조차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쟤’의 입장에서는 ‘스스로’ 정당하게 성취해 낸 거니까. 아마 우리는 성장과정에서 ‘대학교수 딸의 논문을 대신 써준 대학원생’ 이야기나 ’ 가난했지만 밤새워 공부해 명문대에 입학한 개천에서 난 용‘을 귀에 박히게 듣고 자라왔기 때문에 자기 좋을 대로 세계를 해석하고 살고 있지 않나. 그래서 나와 쟤는 영원히 평행선 상에서 틱택 대고 있지 않나 싶다. 나만 그럴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가진 사람이 되고 싶겠다. 이왕이면 시혜를 베푸는 쪽이 낫지. 아, 이래서 나는 못 말린다. 끝까지 체면을 놓지 못하는 사람.
다시. 노력을 얕보지 않고 노력한 사람을 깨끗하게 인정하는 사람. 이 되고 싶은데… 모르겠다 남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기로 하는 게 좋겠다. 그게 불특정다수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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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건 충분한 시간과 루틴에 맡겨두고 웬만하면 순간 즐거운 것을 자주 느끼며 사는 게 좋지 않나 싶다. 다양할수록 풍요롭다. 대수롭지 않아도 좋다. 숲의 풍경은 그냥 그대로 아름답다.
내가 풍요로운 삶을 위해 매일(거의) 시도하는 것 몇 가지를 적어보겠다.
1. 천변 달리기. ***
2. 음악 듣기. (그 순간에 다른 행동하지 않고,) *
3. 글 쓰기. (메모라도.)/ 일기 쓰기 포함. ***
4. 스도쿠 풀기. ***
5. 독서하기 ***
6. 심호흡과 명상하기. ***
7. 악기 연주하기. *
8. 노래 부르기. *
9. 수학 문제 풀기. *
10. 그림 그리기. *
11. 듀오링고 어플 - 일본어 학습하기. ***
이 정도다. 나름 시간도 정해져 있는 편이다.
이제 생각도 그만하고 정리 후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