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를 끝내다

이렇게 빨리 끝날 줄 알았으면 조금 천천히 쓸걸 싶기도 하고?

by 울새


천주교에서 예비신자에서 정식으로 세례를 받은 신자가 되려면 예비자교리를 6개월에서 7개월 정도 들어야 한다. 그 기간동안 해야 할 것은 적지 않다. 성당마다 다르지만 거의 공통적으로 필수 기도문을 외워서 확인받아야 하고 성지순례도 다녀와야 한다. 주일 미사를 일정 횟수 이상 드려야 하고 예비자교리 수업은 빠지지 않고 출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 '성경 필사'도 해야 한다.


성경 필사는 네 개의 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중에서 랜덤으로 지정해주는 복음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필사해서 제출해야 하는 과제다. 주어진 기간은 약 4개월이고 정해진 데드라인까지 필사를 마쳐서 필사 노트를 제출해야 한다.


나는 그간 필사라는 것을 말만 들어봤지 실제로 해본 적이 없다. 고등학생 때 손에 농구공을 맞아 오른손 손가락을 다친 이후로 오랜 기간 펜을 잡고 글씨를 쓰는 것이 어려워졌는데 지금은 약 부작용으로 수전증이 생겨서 더더욱 펜을 잡기가 어려워졌다. 펜을 잡고 글을 쓰더라도 워낙 태생부터가 악필인데 펜 잡기가 어려워지다보니 내가 글씨를 쓰는 것인지 지렁이가 등산하는 것을 그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평소 손에 길들여놓은 익숙한 굵기와 필압, 느낌의 펜이라면 악필의 정도가 낯선 펜보다 훨씬 덜하다는거다. 그리고 내가 하는 것이 캘리그라피가 아니고 성경을 읽은 뒤 그 내용을 하나하나 옮겨적는 것이니 악필이냐 아니냐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필사를 시작했다.


대체로 예비자교리 때에는 상대적으로 짧은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를 필사 과제로 내주는 듯 하다. 나 역시 마르코 복음서를 필사하게 되었고, 하루에 노트 네다섯 쪽을 매일 적어 최근 필사 과제를 무사히 끝냈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필사를 두 권의 노트에 걸쳐 끝내고 나니 내가 복음서 한 권을 모두 필사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분명 필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짤막하게 악필이지만 열심히 써야겠다 라고만 적었지만 필사를 마치고 나서는 적을 말이 꽤 늘어났다.


과거 교회를 다니면서 어쩔 수 없이 이끌려 성경 통독이니 하면서 성경을 읽은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매일, 그것도 필사를 해가면서 읽은 적은 정말 처음이라 필사를 하면서 속으로 '이런 내용도 있었구나' 또는 '이런 말씀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필사를 끝내고 난 뒤 노트에는 '나의 세례 성구'를 적는 란이 있다. 신부님들이 사제 서품을 받을 때 서품 성구라고 해서 성경 구절 하나를 마음에 간직하며 신부님으로서 살아가듯 필사를 하면서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 하나를 세례 성구로 정해 적고 묵상도 함께 적는 페이지다. 이런저런 구절이 떠올랐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 구절이 참 마음에 와닿았기에 이 구절을 그 칸에 적어넣었다. 그 구절은 최근 여주 도자기축제에서 원하는 문구를 즉석 캘리그라피 엽서로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캘리그라피 엽서로 받은 구절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캘리 엽서는 내 작업대 위에 올려두었다. 항상 보고 읽으면서 마음에 새기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소위 말하는 '주금의 필사' 과제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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