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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로 Jun 09. 2024

남편도 어쩌면 우울증이지 않았을까

주기적으로 병원을 다니며 상담을 받고 약을 먹었다. 약을 먹으면 우울이 걷히고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잠잠해진다. 하지만 약이 해줄 수 있는 건 고작 그것뿐. 시간이 지나면 우울은 다시 나를 감싸고돈다. 물론 예전처럼 우울 뒤에 숨어서 넋 놓고 있지 않았다. 병원을 다니면서 지금의 우울은 어차피 지나갈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또 찾아올 거라는 것도 말이다. 그러니 절대 우울에게 지지 않겠다고, 휩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참 다행이다. 정신과를 찾아간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내 마음이 퍽이나 편안해졌음을 느꼈다. 매일매일 조금씩 괜찮아져 갔다. 어느 날부터 상담 날을 손꼽으며 기다렸다.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어서 좋았다. 병원을 다닌 지 4개월 끝자락이 되었을 때 담당 의사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남편에게 00씨의 마음을 이야기해 보는 게 어떨까요?"

"못해요.. 남편한테는 말할 수가 없어요."

"말해야 해요. 00씨는 도움이 필요해요."


막막했다. 두려웠다. 의사는  두려움을 넘어서지 못하면 새롭게 시작할  없다고 했다. 누구보다  알고 있다. 지금  상태로는 절대 행복해질  없다는 것을. 남편에게 우울한 나를 알려야 한다. 도와달라고 말해야 한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아이들을 재운 후 남편에게 대화를 청했다. 맨 정신에는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어 술의 힘을 조금 빌렸다. 남편을 불렀는데 다음 말이 나오질 않았다. 머릿속의 생각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몰랐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빠지더니 과호흡 증상까지 왔다. 안돼. 지금 말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 모른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나 너무 힘들어."


뱉고 나니 별 거 아닌 말이었다. 그 말을 시작으로 모든 걸 이야기했다. 남편은 기다려주고 또 묵묵히 들어주었다. 어떤 위로의 말도 없었지만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남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진작에 말할걸. 내 감정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나 자신을 이해받는 것은 눈물 나게 행복한 것이었다. 눈물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얼마나 울었는지 온몸에 힘이 다 빠졌다. 남편은 부스스 헝클어진 내 머리를 쓰다듬고 흔들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제야 남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미쳐버린 나 때문에 힘들다고 말 한마디 못 꺼냈을 남편이었다. 우울은 쉽게 전염이 된다. 남편도 어쩌면 우울증이지 않았을까. 난 나를 희생해서 가족을 지키고 싶었는데 오히려 독이 되었다. 남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웃는 얼굴보다 힘든 얼굴만 보여주었다. 나도 웃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행복하고 싶다. 약 같은 건 먹지 않고 스스로를 억압하는 상황에 내몰리지도 않는, 끊임없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다.   


남편이 그랬다. 조금 쉬어가도 괜찮다고. 지금은 그런 시간이니까 괜찮다고.



이 날은 정말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어떤 악몽도 꾸지 않고, 단 한 번도 깨지 않는 그런 단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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