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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로 May 16. 2024

세상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다음날 무작정 집에서 제일 가까운 병원을 방문했다. 이른 시간임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상상했던 정신과와 다르게 생각보다 다들 평범한 모습이라서 안심이 되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아... 이 결과지를 의사 선생님께 전달해 주세요."


검사 결과지의 복사본이 의사에게 전달되었다. 진료 전 20문항 정도 되는 간단한 설문검사를 진행했다. 대기 시간은 꽤 길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집에서 나올 때는 아이만 괜찮아진다면 뭐든 하겠다는 간절함만이 가득했는데 마음속이 시끄러워졌다. 문득 뭐가 얼마나 달라질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어 병원을 나서려다가 발길을 돌려 다시 소파에 앉았다.   


‘내가 정신을 차려야 내 아이를 구할 수 있어.’ 




30분 정도 기다린 후 내 이름이 불렸다. 질문들을 밤을 새워가며 생각했는데 순간 머리가 백지처럼 하얘졌다.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인자한 표정을 한 중년의 여 의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반겨주었다.


"검사지는 잘 봤어요. 많이 힘들었겠어요. “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나는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해주길 기다렸구나. 나 정말 많이 힘들었구나.’ 

돌이켜보면 남 앞에서 울어본 적도, 힘들다고 이야기해 본 적도 없었다. 나의 부족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가 이렇게 힘들었던 건 힘든 내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의사는 티슈 한 장을 건네고는 내 눈물이 잦아들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주었다.


"죄송합니다..."

"우리 일주일에 2번 만나서 같이 이야기해 봐요."


이게 나의 첫 번째 정신과 상담이다.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지만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 후 여러 번의 심리 검사와 상담이 진행되었다. 산후우울증에서 비롯된 우울, 무기력감 그리고 평소 강박적인 사고와 불안 장애 등이 복합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00 씨. 세상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육아는 더더욱 그렇죠."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육아는 마음처럼 되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늘 불안했다. 시간과 체력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좌절했다. 너무 힘들어서 마음이 무너질 때는 엄마니까 약해빠진 소리를 하면 안 된다며 나를 채찍질했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고, 나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다. 너무 많은 것을 나 혼자 하려 했고, 다 잘하려 했다. 엄마는 강한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상황에서 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궁지에 몰려 고양이를 무는 쥐처럼 말이다. 약하면 약한 대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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