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적으로 병원을 다니며 상담을 받고 약을 먹었다. 약을 먹으면 우울이 걷히고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잠잠해진다. 하지만 약이 해줄 수 있는 건 고작 그것뿐. 시간이 지나면 우울은 다시 나를 감싸고돈다. 물론 예전처럼 우울 뒤에 숨어서 넋 놓고 있지 않았다. 병원을 다니면서 지금의 우울은 어차피 지나갈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또 찾아올 거라는 것도 말이다. 그러니 절대 우울에게 지지 않겠다고, 휩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참 다행이다. 정신과를 찾아간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내 마음이 퍽이나 편안해졌음을 느꼈다. 매일매일 조금씩 괜찮아져 갔다. 어느 날부터 상담 날을 손꼽으며 기다렸다.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어서 좋았다. 병원을 다닌 지 4개월 끝자락이 되었을 때 담당 의사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남편에게 00씨의 마음을 이야기해 보는 게 어떨까요?"
"못해요.. 남편한테는 말할 수가 없어요."
"말해야 해요. 00씨는 도움이 필요해요."
막막했다. 두려웠다. 의사는 그 두려움을 넘어서지 못하면 새롭게 시작할 수 없다고 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남편에게 우울한 나를 알려야 한다. 도와달라고 말해야 한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아이들을 재운 후 남편에게 대화를 청했다. 맨 정신에는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어 술의 힘을 조금 빌렸다. 남편을 불렀는데 다음 말이 나오질 않았다. 머릿속의 생각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몰랐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빠지더니 과호흡 증상까지 왔다. 안돼. 지금 말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 모른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나 너무 힘들어."
뱉고 나니 별 거 아닌 말이었다. 그 말을 시작으로 모든 걸 이야기했다. 남편은 기다려주고 또 묵묵히 들어주었다. 어떤 위로의 말도 없었지만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남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진작에 말할걸. 내 감정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나 자신을 이해받는 것은 눈물 나게 행복한 것이었다. 눈물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얼마나 울었는지 온몸에 힘이 다 빠졌다. 남편은 부스스 헝클어진 내 머리를 쓰다듬고 흔들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제야 남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미쳐버린 나 때문에 힘들다고 말 한마디 못 꺼냈을 남편이었다. 우울은 쉽게 전염이 된다. 남편도 어쩌면 우울증이지 않았을까. 난 나를 희생해서 가족을 지키고 싶었는데 오히려 독이 되었다. 남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웃는 얼굴보다 힘든 얼굴만 보여주었다. 나도 웃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행복하고 싶다. 약 같은 건 먹지 않고 스스로를 억압하는 상황에 내몰리지도 않는, 끊임없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다.
남편이 그랬다. 조금 쉬어가도 괜찮다고. 지금은 그런 시간이니까 괜찮다고.
이 날은 정말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어떤 악몽도 꾸지 않고, 단 한 번도 깨지 않는 그런 단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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