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플라스의 마녀> 2019년
“날씨가 어째 수상하네.” 미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마도카도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먼 곳의 하늘이 컴컴해져 있었다. 금세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엄마, 빨리 가자.”
“응, 꽉 잡아.”
“알았어.” 마도카는 두 팔로 엄마의 가느다란 허리를 휘감았다.
미나가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맞바람이 차가운 것 같았지만 마도카는 엄마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파란 털재킷 위로 엄마의 체온과 향기가 전해져 왔다.
작은 도시라서 잠깐만 달리면 민가는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이웃 도시로 가는 외줄기 길로 들어섰을 때, 갑작스럽게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자전거가 멈춰 섰다.
“엄마, 왜 그래?”
마도카가 물어본 다음 순간, 하늘에서 뭔가 투두둑 떨어졌다. 비라고 하기에는 느낌이 이상했다. 자신의 팔에 떨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잘한 얼음덩어리였다.
큰일 났다, 라고 중얼거리면서 미나가 자전거를 오던 길로 되돌렸다. 그 순간 마도카의 눈에 뛰어든 것은 어둑어둑한 하늘에서 지면을 향해 길게 이어진 한 줄기 검은 기둥이었다.
“엄마, 저게 뭐야?”
“토네이도!” 미나가 크게 소리쳤다. “어서 달아나야 해!”
빗방울이 떨어졌다. 미나는 필사적으로 페달을 밟았다. 마도카는 뒤를 돌아보고 흠칫했다. 검고 거대한 원기둥이 순식간에 바짝 다가왔기 때문이다. 무수한 뭔가가 하늘을 향해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엄마, 잡힐 거 같아!”
미나는 자전거를 세웠다. “마도카, 어서 내려! 이쪽으로!”
자전거를 길에 팽개친 채 미나는 마도카의 손을 잡고 뛰었다. 차갑고 세찬 바람 속으로 몸이 빨려 들 것만 같았다. (P11-12)
다케오는 그것을 손에 들었다. ‘우하라 마도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앞으로 다케오 씨가 경호를 맡아줄 인물, 우하라 마도카입니다. 평소에는 이 건물 안의 방에서 생활하지만 이따금 외출하는 일이 있어요. 그런 때에 그녀의 보디가드로서 동행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디에 가든 절대로 시선을 떼지 말고 다양한 위험에서 그녀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요, 라면서 기리미야 레이가 검지를 바짝 치켜들었다.
“한 가지 주의 사항이 있어요. 결코 그녀에 대해 뭔가 알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왜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 여기서 무엇을 하는지 등등. 그녀에 관한 질문은 일절 허용되지 않습니다. 아시겠지요?”
“경호에 필요한 질문도 안 됩니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항은 그때그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설명이 좀 늦었지만, 그녀가 외출할 때는 저도 함께 동행할 거예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경호 대상이 상당히 복잡한 인물인 것 같았다. 하지만 까다로운 일거리라는 건 미리 각오한 바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부러 다케오 개인에게 일을 의뢰할 리 없다.
잘 알겠다고 다케오는 대답했다. (P25)
“뛰어도 아프진 않아요?” 다케오의 허리께를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아프다니, 어디가?”
“허리요. 오른쪽 허리. 요통이 있잖아요.”
딱 잘라 말하는 바람에 다케오는 놀랐다. 맞는 말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요통에 시달려왔다.
“어떻게 알았지?”
“보면 알아요. 몸의 균형이 무너져 있거든요. 그나저나 어때요. 뛸 수 있어요? 여차할 때 뛰지 못하는 보디가드라면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요?”
그녀의 말에 기리미야 레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다케오는 자신의 가슴팍을 툭 쳤다.
“문제없어. 분명 요통은 내 지병이지만 평소에 충분히 케어하고 있으니까.”
흥 하는 콧소리를 내더니 마도카는 손을 들어 다케오의 입가를 가리켰다.
“케어도 좋지만 치과에 가시는 게 더 빠를걸요? 몸의 균형이 무너진 건 위아래 이가 잘 맞물리지 않은 게 원인이니까요.”
다케오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턱에 손을 댔다. 이가 맞물리지 않는다니. 그런 건 여태까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마도카는 손을 내리고 “이분, 좋아요.”라고 기리미야 레이에게 말하더니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다케오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P27)
“웬일이세요?”
요코가 물어보자 치사토는 “방에 뭘 깜빡 잊고 왔어요.”라면서 쓴 웃음을 짓더니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몇 분 뒤, 그녀는 다시 요코 앞을 지나갔다.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하길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15분쯤 지나 카운터 전화가 울렸다. 받아보니 치사토였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뭔가 크게 흥분해서 붕 뜬 소리였다. 큰일 났어요, 빨리빨리, 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여보세요? 치사토 씨,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얘기해보세요. 무슨 일이에요?”
요코의 말에 수화기 너머로 하아 하아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큰일 났어요. 남편이 산길에서 쓰러져 전혀 움직이질 않아요. 구급차 좀 불러주실래요?”
이미 뭔가 변고가 생긴 게 틀림없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데도 요코는 혼란에 빠졌다. 쓰러졌다고? 산길에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치사토 씨, 장소는 어디쯤이에요?” (P43)
자신의 자리에서 컵라면을 후룩후룩 빨면서 인터넷 기사를 들여다보던 나카오카 유지는 ‘영상 프로듀서 미즈키 요시로 씨, 온천지에서 사망’이라는 글을 발견하고 하마터면 면발이 목에 턱 걸릴 뻔했다. 깜짝 놀라 서둘러 상세한 내용을 화면에 띄웠다.
그 기사에 따르면, 미즈키 요시로는 아내와 함께 아카쿠마 온천가에서 근처 산을 산책하던 중 쓰러져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잠시 물건을 가지러 여관에 다녀온 사이의 일이고, 발견되었을 때 주변에는 황화수소가 발생하는 장소가 몇 군데나 있고 우연히 가스 농도가 높아진 참에 피해자가 그곳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라고 기사는 끝을 맺었다. (P46)
아오에는 당혹스러웠다. 수사라고 하는 걸 보면 뭔가 사건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경찰에 협조해줄 것이 있을 리 없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개 학자일 뿐이다.
그러자 상대는 사건이 아니라 사고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검증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 일은 D현의 산속에 있는 아카쿠마 온천지에서 일어났다. 관광을 위해 찾아온 숙박객 중 한 명이 근처의 산을 산책하던 중에 쓰러져 그대로 사망했다. 아마도 화산가스에 의한 중독사로 보이는데, 지금까지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던 터라서 그 원인을 규명해주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런 거라면 연락이 올 만도 하다고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몇 년 전. 그 비슷한 일이 다른 온천지에서도 일어났었다. 눈 밑에 생긴 공동(空洞)에 황화수소 가스가 가득 고여 있었는데 관광 온 가족이 우연히 그 위를 지나던 참에 공동이 뚫리면서 중독사한 사고였다. 그때 아오에는 현장조사에 협조하기 위해 나갔었다. 예전에 그 지역의 황화수소 가스 발생 상황을 조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D현 현경은 이번에 일어난 비극도 그것과 유사한 사고로 보고 일을 의뢰해 온 것이다. 아오에의 전문 분야는 지구화학이다. 학생들에게는 주로 환경 분석화학을 가르친다.
아오에 자신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현경의 조사에 협조하기로 했다. 전화를 받은 그다음 날로 현지에 들어갔다. (P69)
“순간적으로 0.002퍼센트를 넘는 경우가 있군요. A지점과 D지점에서.”
그래도 그리 높은 수치는 아니다. 황화수소로 급성중독을 일으키는 기준치는 약 0.07퍼센트였다.
“네, 하지만 그것도 사고 현장인 X지점은 아닙니다. 그쪽에서는 현재까지 한 번도 0.001퍼센트를 넘은 적이 없었어요. 게다가 A지점도 그렇고 D지점도 그렇고, 0.002는 딱 한 번뿐이고 그다음은 계속 그보다 낮은 수준이었습니다. 그것도 기껏 30초도 안 되는 시간의 일이고 곧바로 안전한 수치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렇다면 그날 그 시간대에만 우연히 X지점에서 농도가 급격히 올라갔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예. 그렇지요. 그러니 이것 참 난처하게 됐지 뭡니까. 그쪽 현장에 출입금지 조치를 내리는 건 그나마 감수한다고 쳐도, 그렇다면 다른 곳은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가 생기잖아요.” 이소베의 눈썹 양끝이 여덟팔자로 쳐졌다.
“이 기록을 보면 1월 초에 극단적으로 수치가 낮아졌군요. 뭔가 있었습니까?”
“아, 그건 눈 때문입니다. 그 일대에 엄청나게 쏟아졌거든요.” (P72)
“확률이라고요? 아, 그건 숫자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최근 한 달 넘는 기간 동안 농도가 올라간 일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아무리 많아봐야 1년에 기껏 몇 번 정도 아니겠습니까. 실은 이건 1년 동안 측정해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일이긴 하죠. 하지만 농도가 올라갔다고 해도 극히 제한된 구역이고 시간적으로도 한순간의 일이라서 우연히 그런 곳에 사람이 들어간다는 건 확률로 보면 거의 제로라고 해도 무방하겠지요.”
“제로....... 즉 사고가 일어난 것이 불가사의하다는 말씀입니까?”
“불가사의하지요. 그래서 좀 더 상세히 조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카오카는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몸을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면 우연이 아닐 가능성은 어떻습니까, 그럴 수도 있을까요?”
“우연이 아니라니?”
말하자면, 이라면서 나카오카는 입술을 혀로 적셨다. “인위적으로 사고를 일으켰을 가능성 말입니다.”
“예에?” 아오에는 형사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인위적으로 사고를 일으켜요? 어떻게?”
“누군가 황화수소 가스를 발생시켰을 가능성 말입니다. 몇 년 전에 그런 방법으로 꽤 많은 사람들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잖습니까.”
아아, 하고 아오에는 입을 헤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일이다.
“그런 뜻이군요. 근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니, 도리어 내가 묻고 싶군요. 형사님은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그 대답은 방금 전에 교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번 같은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거의 제로라고요. 그렇다면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죠. 그렇잖습니까?”
“아뇨, 그건요.” 아오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한 일이에요. 분명 확률이 거의 제로라고 했지만 완전히 제로라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그런 일을 일으켰을 가능성은 제로라고 해도 틀림이 없어요.”
“그럴까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황화수소로 자살을 했잖습니까.”
“그건 실내에서의 일이죠. 이번 피해자는 실외에서 사망했습니다.”
“많은 자살자가 실내를 선택한 것은 제삼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그러는 게 가스 농도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외에서도 바람 없는 날을 택해 바로 옆에서 가스를 발생시키면 중독이 되는 거 아닌가요?”
아오에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기분이 상한 듯 “제 얘기가 우스운가요?”라며 나카오카의 표정이 좀 험해졌다.
“아뇨, 실례했습니다. 우습다기보다 감탄한 거예요. 실로 유니크한 발상입니다. 일리가 있어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무리예요. 나카오카 형사님은 황화수소 발생 방법을 알고 있습니까?” (P102-103)
아오에는 연구실 창문 옆에 서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멍하니, 가 아니다. 머릿속 한 귀퉁이로는 나흘 전에 찾아온 나카오카의 이야기만 줄곧 곱씹고 있었다.
아카쿠마 온천에서의 일은 자살도 아니고 단순 사고도 아니다. ... 그는 그런 말을 내비쳤다. 즉 타살이라는 얘기다. 게다가 피해자의 아내가 관련된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단언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황당무계한 얘기라고 몰아붙인 것은 경솔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장소가 실외라서 황화수소를 대량으로 발생시켜야 한다고 말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다. 나카오카가 말했던 방법으로 피해자를 잠들게 했다면 머리에 비닐봉지를 씌워버리면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황화수소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농도니까 그렇게 하면 극히 적은 양으로도 중독사할 수 있다. 사망을 확인한 뒤, 황화수소를 발생시킨 액체며 용기는 비닐봉투로 밀폐해 다른 장소에서 처분한다. 물론 일련의 행동 중에는 반드시 가스마스크를 써야 하지만 그런 방법이라면 화학 방호복까지는 필요하지 않다.
아오에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원인은 아카쿠마 온천에서의 사고가 너무도 불가사의하다는 게 내내 머릿속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P116-117)
“지구 대기의 성분을 모두 화학식으로 표기하라. 그중 온실효과가 있는 성분은 어느 것인가, 그리고 그중 가장 농도가 높은 성분은 어느 것인가...... 어떻습니까?”
“응, 좋은데?” 아오에는 눈썹 옆을 긁적였다. “딱 좋은 함정이야. 좀 모자란 학생이라면 얼른 CO₂라고 써내겠지.”
CO₂는 지구온난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성분이지만, 압도적으로 농도가 높은 것은 H₂O, 즉 수증기다. 실은 수증기에도 온실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럼 다음 문제입니다. 톨루엔을 지름 1.6밀리미터, 길이 50밀리미터의 가느다란 관이 달린 확산 튜브에 0.15그램을 넣었다. 이 확산 튜브를 섭씨 35도의 항온조(恒溫槽)에 설치하고, 확산 튜브를 설치한 실험용 상자에 0.5.....”
오쿠니시 데쓰코가 거기까지 읽었을 때, 책상 위의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들었다. (P119)
“아까 내가 준 명함은 받지도 않더니?”
“마음이 바뀌었어요.”
“허허, 자기 좋을 대로구나.”
아오에는 자신의 명함을 그녀에게 건넸다. 교환으로 받아 든 종이쪽에는 ‘우하라 마도카’라고 손 글씨로 적혀 있었다. 아래쪽에는 휴대전화 번호가 있었다.
“본명이겠지?”
그러자 그녀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아오에에게 내보였다. 신용카드인 데다 분명 ‘MADOKA UHARA'라고 찍혀 있었다. 가짜 카드인 것 같지는 않았다.
“오케이, 이제 이름은 알았군.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자기소개라고 할 수 없겠지. 어디서 뭘 하는 사람인지 알리는 게 자기소개야. 너는 뭐 하는 사람? 학생인가? 그렇다면 어느 대학?”
우하라 마도카는 고개를 저었다. “학생 아니에요.”
“그럼 직업은? 무직이라고는 하지 마. 그런 사람이라면 신용카드 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무직인데요.”
“거짓말은 안 된다니까.”
“거짓말 아니에요. 이 카드는 아버지의 패밀리카드예요.”
흠,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라고 아오에는 내심 혀를 찼다. (P139)
“예전에 그런 얘기가 나왔을 때 내가 말했었어요. 거의 다 웃기는 사이트들이지만 딱 한 군데 믿을 만한 데를 알고 있다고. 그 여자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왜 그런 사이트를 알아보는지, 그 여자가 얘기했어?”
“남편이 부탁했다고 하던데요.”
“남편이?”
“그 여자 남편이 영화 관련 일을 하는데, 불법 사이트를 소재로 작품을 제작할 예정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실태를 파악해야 하는데 그쪽으로 뭔가 아는 거 없냐고 레이카 씨한테 물어본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 여자한테 알려줬어?”
예, 라고 야구치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트 주소, 지금 알 수 있어?”
야구치는 호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몇 번 터치한 뒤에 나카오카 쪽으로 화면을 보여주었다. 표시된 주소를 나카오카는 수첩에 메모했다.
“그 여자 얘기를 그대로 믿었어? 남편이 물어봤다는 그 얘기?”
“뭔가 좀 거짓말 같기는 했죠. 근데 괜히 한데 엮이는 게 귀찮아서 더 묻지도 않았어요.”
“진짜 목적은 뭐라고 생각했는데?”
나카오카의 질문에 야구치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몸짓을 보였다.
“그 사이트, 주로 뭔가 의뢰하고 청부하는 데지?” (P154)
나카오카는 아카쿠마 온천에도 가보았다. 지역 경찰은 이미 사고라고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현청 환경보전과의 이소베라는 공무원도 사고 재발 방지 문제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한 눈치였다.
하지만 미즈키 부부가 묵은 여관에서는 여주인에게서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번 온천 여행은 아내 치사토가 제안한 것이고 미즈키 요시로는 아카쿠마 온천 자체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카오카는 살인 가능성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화산가스 농도가 높아지는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만은 아마추어인 그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황화수소를 의도적으로 발생시키는 방법이었다. 다이호 대학의 아오에 교수는 딱 잘라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나카오카는 아직 포기할 수 없었다.
조후 시의 노인 요양 시설에서 미즈키 치사토와 덜컥 마주쳤던 일을 잊을 수 없었다.
속 시원하실 때가지 마음껏 수사해주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건 죄가 없는 인간의 얼굴이 아니다. 나카오카는 그렇게 확신했다. (P163)
캐스트 칸을 확인했다. 어쩌면 나스노 고로가 단역으로 나왔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 적힌 목록 속에 나스노는 없었다.
다시 한 번 무심코 스태프 칸으로 시선을 옮겼다. 감독과 각본은 아마카스 사이세이라는 인물이었다. 이름은 들은 적이 있다. 영화에 대해 문외한인 나도 그 이름을 기억할 정도니까 분명 유명한 감독일 것이다.
그 이름을 보고 있으려니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방금 전이다.
혹시나 해서 영화 <폐허의 종>의 정보가 적힌 페이지로 다시 돌아갔다. 그랬더니 역시 짐작했던 대로였다. 이 영화도 아마카스 사이에이가 감독을 맡은 작품이었다.
아오네는 두 손으로 뒷목을 감싸고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이건 어떻게 된 것인가. 단순한 우연일까. 나스노 고로와 미즈키 요시로의 접점은 찾아지지 않았지만, 이 아마카스 사이세이라는 인물을 매개로 두 사람 사이에 연결점이 생긴 셈이다.
그래서 이 인물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이번에도 위키 백과사전에 이름을 입력하고 엔터키를 눌렀다. 곧바로 아마카스 사이세이에 관한 내용이 떴다. 그 또한 미즈키 요시로 못지않게 경력이 화려했다. 30세에 비디오 영화로 감독 데뷔. 그 1년 뒤에는 극장용 장편영화로 진출했는데 그것이 갑작스럽게 해외 영화제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뒤에도 히트작, 화제작을 차례차례 만들어내고, 36세 때에 <얼어붙은 입술>로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대중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작품이 많아 일본 영화계의 미래를 짊어질 인물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었다, 라고 실려 있었다.
거기까지 읽은 참에 아오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대를 받았었다, 라는 과거형으로 되어 있는 걸 보면 그 기대가 어그러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작품 목록을 보니 최근 10여 년 동안은 영화를 찍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찍은 영화가 <폐허의 종>인 것이다. 그런 생각을 더듬으며 아래쪽을 읽어 내려가다가 흠칫 놀랐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47세 때, 자택에서 일어난 황화수소 사고로 인해 가족을 잃었다. 이 일의 충격으로 더 이상 영화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게 된 듯하다(블로그에서). (P172-173)
우하라 박사의 말에 따르면, 겐토의 뇌는 거의 정상이지만 어느 한 부분이 손상된 탓에 현재의 식물인간 상태가 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손상 부위는 현대의 뇌의학에서도 해명되지 않은 미지의 부분으로, 왜 이번 같은 증상에 빠졌는지도 수수께끼이고, 지금 겐토의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황화수소 중독이 계기가 되었다는 건 확실합니다. 산소가 뇌에 공급되지 않아 일부 뇌세포가 없어진 것이지요. 하지만 손상 부위가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고, 겐토 군이 갖고 태어난 체질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어떻든 손상 부위가 이토록 적었던 것은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입니다.”
기적이라는 말에 나는 저항감을 느꼈다. 그건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나 쓰는 말이 아닌가.
“기적이라고요? 대체 뭐가 기적입니까. 의학적으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내 아들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식물인간 상태라는 건 여전히 똑같지 않습니까.”
약간 험한 말투로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우하라 박사는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카스 씨, 제가 언제 아드님의 의식이 없다고 말했습니까?”
그 말의 의미를 얼핏 이해할 수 없었다.
“엇,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마도 겐토 군은 의식이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을 가능성도 잇습니다.”
“서, 설마, 그럴 리가......”
내 귀를 의심했다. 여태까지 생각조차 못해본 일이었다.
“이전 병원에서는 그런 말을 단 한 마디도...... 이름을 불러도 뇌파에 변화가 없다고 했는데요?”
“우리 대학에만 있는 뇌기능 해석 장치를 사용했습니다. 분자 레벨에서의 변화를 감지하는 게 가능하지요. 대단히 약한 신호지만 겐토 군은 신호를 발하고 있어요. 반쯤 잠든 듯한 상태이긴 해도 의식을 유지하는 뇌세포는 작동하고 있습니다.” (P198-199)
어쨌든 계속 읽어나가는 수밖에 없다.
글에는 수술 날짜가 다가올수록 불안과 기대가 극심하게 교차하는 아마카스 자신의 정신 상태가 꼼꼼한 필치로 그려졌다. 사소한 일로 엉뚱한 화풀이를 하거나 급작스럽게 우울해지는 일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다고 아오에는 생각했다. 나라면 진즉 도망쳐버렸을 것이다.
그다음 글의 제목을 보고는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토네이도......!’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왜 느닷없이 토네이도가 등장하는 건가.
읽어보니 거기에는 뜻밖의 얘기가 있었다. 아마카스 겐토의 수술을 코앞에 두고 우하라 젠타로 박사의 부인이 급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토네이도였다. 11월 초의 연휴에 딸과 함께 훗카이도 친정집에 돌아간 참에 돌연한 토네이도의 습격을 받아 건물잔해에 깔려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 딸이라는 아이가 우하라 마도카인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녀도 토네이도를 겪었는가. 자신은 살아났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말인가.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갔다. (P202)
겐토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걸어가려 하고 있다. 그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다시 태어난 자신의 능력을 높일 것인가. 라는 단 한 가지에만 집중된 것처럼 보인다. 겐토는 재활치료에 열의를 보였다. 그리고 틈만 나면 언어 발성 훈련을 하고 있다. 컴퓨터를 다루는 일에 관해서는 거의 완벽하다고 할 정도다. 그는 게임을 하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동영상을 즐긴다. 반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광경이 그 병실에서 펼쳐지고 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에요. 기적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우하라 박사는 내 얼굴을 보며 흥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P215)
“사람을 찾는다고요?”
의아한 얼굴을 하는 나카오카에게 아오에는 우하라 마도카와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설명이 끝날 즈음, 형사는 점점 더 의아하다는 듯 입가에 삐뚜름해져 있었다.
“뭡니까, 그 여학생은? 대체 어떤 사람이죠?”
“나도 모르겠어요. 어떻든 그런 일이 있어서 양쪽 온천지에서 일어난 사고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형사님에게도 말을 해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군요.” 나카오카는 턱을 끄덕였다. “도마테 온천 쪽의 피해자는 배우라고요?”
“나스노 고로라는 배우였어요. 아카쿠마 온천 쪽 피해자는 영화 프로듀서였죠. 즉 양쪽 다 영화 관계자들이에요.”
나카오카는 가슴을 크게 들먹이며 숨을 토해냈다.
“교수님, 그 말씀은 아주 중요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어요. 알고 계십니까?”
“뭐, 막연하게는......”
“여태까지 저는 아카쿠마 온천 쪽 사건이 설령 타살이라 해도 단순히 재산을 노린 범행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도마테 온천쪽과 연결점이 있다면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달라져요. 양쪽을 한 세트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죠. 어쩌면 연쇄살인의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나카오카는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말투가 약간 빨라진 것은 흥분한 탓이리라.
“나는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지만, 그 우하라 마도카라는 여학생에 관해 한 가지 특이점을 발견한 게 있어요.”
“특이점이라니, 그게 뭡니까?”
“형사님, 아마카스 사이세이라는 영화감독, 알아요?”
“아마카스 사이세이? 아뇨, 모르겠는데요. 영화는 별로 안 보는 편이라서요.”
아오에는 나스노 고로와 미즈키 요시로의 공통점을 검색하다가 아마카스 사이세이에까지 가닿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게다가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황화수소 사고로 가족을 잃었다고 말하자 나카오카의 얼굴 표정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대체 어떻게 된 거죠? 도저히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요.” (P230-231)
“나카오카 형사와의 대화에서도 나왔지만, 아마카스 겐토 군은 우하라 박사님의 환자였어요. 불행한 사건으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지만 기적적으로 회복했죠. 그 뒤에 겐토 군은 사정이 있어 수리학 연구소에서 기거했습니다. 그런데 작년 봄에 돌연 행방을 감춰버렸어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편지를 남기긴 했는데 거기에는 병원이나 우하라 박사님에 대한 감사 인사가 적혀 있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밖에 또 한 사람, 수리학 연구소에서 기거했던 인물이 있었어요. 다케오 씨도 잘 아시는 우하라 마도카, 그녀는 행방이 묘연해진 겐토 군의 일을 누구보다 걱정하고 있었죠. 그대로 두면 당장이라도 찾으러 나갈 기세였어요. 그걸 막기 위해 마도카를 감시해줄 분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다케오 씨였죠.”
다케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역시 그랬구나, 라고 생각했다. 마도카가 도망쳤을 때, 퍼뜩 생각했던 게 정답이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조금 뒤로 되돌려볼까요.” 기리미야 레이가 말을 이었다. “겐토 군이 당한 불행한 사건이라는 건 친누나가 자살을 시도한데 휘말린 것이었어요. 그건 평범한 자살이 아니었습니다. 황화수소에 의한 중독사였어요. 겐토 군의 어머니까지 함께 사망했습니다.”
다케오는 저절로 앗 하는 소리를 흘렸다. 그렇게 된 일이었구나.
“이제 우리가 아카쿠마 온천과 도마테 온천에서 일어난 사고에 주목하는 이유를 알겠지요?”
우하라의 말에 다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알겠습니다. 황화수소는 아마카스 겐토 군과 인연이 많은 물질이군요.” (P264-265)
“아마카스 씨가 옛일을 돌이켜보니 이래저래 짚이는 게 많았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아마카스 씨가 집에 없는 동안에 부인과 딸이 둘이서만 외출했다는 얘기를 겐토 군에게서 자주 들었다든가, 그럴 때마다 딸이 혼자 방에 틀어박히거나 몹시 기분이 상한 모습을 보였던 모양이에요.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도 아무것도 아니라고만 하고..... 사춘기니까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갔었는데 실은 딸의 마음속에 갈등이 있었던 게 아닌가, 아마카스 씨는 글에 그렇게 썼더라고요.”
“그 갈등이라는 게....”
“딸 모에가 어머니를 따라가 이따금 만나는 남자가 자신의 친아버지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라는 거예요. 즉 호적상의 아버지를 배반하고 어머니의 부정한 상대를 만났다는 자각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던 게 아니냐고 추측한 겁니다. 이건 그리 엉뚱한 추측은 아니겠지요?”
나카오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기시의 의견에 그도 동감이었다.
“아마카스 씨는 딸의 섬세한 성격을 되돌아보면서, 그 아이가 자신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었을 가능성도 지적했습니다. 어머니의 불륜으로 태어난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아갈 것인가, 라는 식으로. 그런 다양한 요인이 점점 커져서 마침내 폭발해버린 것이 그 자살 사건이었던 게 아니냐, 라는 것이 아마카스 씨의 추리예요, 단 이미 확인할 도리가 없는 일이죠. 관계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으니.”
네기시는 한숨을 내쉬듯이 가슴을 들먹이더니 커피를 마시고 다시 얼굴을 들었다.
“그렇게 아마카스 씨에게는 새로운 고뇌가 시작된 거예요. 자신에게 가족이란 무엇이었는가, 새삼 알 수 없게 되었죠. 아내의 마음은, 딸의 마음은 어디에 있었는가, 자신이 가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전혀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고 서술하고 있어요. 넋이 나가서 살아갈 힘도 잃어버렸다고요.” (P278-279)
“보시면 알아요. 답을 알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그럼 아무 말 말고 거기 계세요.”
아오에는 스마트폰을 귀에서 떼고 경사면을 찬찬히 지켜보았다. 마도카가 움직이는 모습은 보이는데 무엇을 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윽고 그녀의 발치에서 흰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게다가 그 연기는 주위로 퍼지는 게 아니라 아래쪽으로 흘러 내려왔다.
흠칫했다. 그 연기가 무엇인지는 금세 알았다. 드라이아이스에 의한 스모크다. 아마 마도카가 물을 넣은 용기에 드라이아이스를 던져 넣은 모양이었다.
스모크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마치 거대한 흰 뱀이 이동하는 것처럼 나무 틈새를 지나고 풀 위를 기어 아오에 쪽으로 다가왔다. 놀랍게도 꿈틀꿈틀하면서도 스모크의 폭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확산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마침내 스모크는 아오에의 발치에 도달했다. 더욱 놀란 것은 그 직후였다. 스모크는 그가 있는 지점을 통과하는 일 없이 그 자리에 고이기 시작했다. 흰 연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아오에의 온몸을 휘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
이런 현상은 있을 수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아오에는 스마트폰을 귀에 댔다. “어떻게 된 거야? 뭔가 마술이라도 쓴 건가?”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는 진즉에 끊겨 있었다.
아오에는 그 자리를 벗어나 마도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산책로에 갈림길이 많아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도착했을 때, 마도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땅바닥에 놓인 네모난 발포스티롤 상자가 아직도 흰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 옆에서 파란 빛을 내는 건 케미컬라이트였다.
아오에는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마도카는 받지 않았다. 수없이 호출음이 울린 끝에야 겨우 연결되었다. 네, 라는 마도카의 목소리.
“지금 어디지?”
“공원 밖이에요.” (P321-322)
“연구는 어느 정도나 진척되었습니까?”
우하라는 어깨를 으쓱 치켜들고 양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아직 갈 길이 멀어요. 겐토 군이 처음 연구소에 왔을 때는 그 능력이 수술에 따른 영향인지 아니면 그가 원래부터 갖고 있던 능력인지조차 판단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비슷한 수술을 받은 환자가 꽤 있었지만 겐토 군 같은 케이스는 한 명도 없었으니까요. 이윽고 몇 가지 힌트를 포착해서 역시 수술의 영향이라는 것은 밝혀냈지만, 문제는 재현성이었습니다. 그것을 확인하는 데는 아주 큰 장애물이 있었어요. 한마디로, 겐토 군과 완전히 똑같은 뇌 부위에 완전히 똑같은 수술을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당연히 우리가 원하는 조건에 딱 맞는 환자가 나타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요. 그래서 해결책으로 한가지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건 윤리적인 면에서 반드시 책임이 뒤따르게 되는 금단의 실험이었습니다. 그게 어떤 것인지, 상상이 되십니까?”
“혹시 건강한 사람에게 수술을?”
우하라는 한숨을 내쉬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맞히셨어요. 뇌에 아무 장애가 없는, 게다가 세포 재생 능력이 높은 어린아이를 데려다 겐토 군의 뇌 손상 부위와 똑같은 자리에 수술을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이상이 생기면 즉시 원래 상태로 되돌린다는 얘기였지만, 어떤 일에나 완벽이라는 건 없는 법이지요. 수술로 인해 중증 장애가 남을 위험성도 전혀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박사님은 그런 위험한 수술을 하셨군요.” 아오에는 말했다. “딸 마도카에게.”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당연한 말씀이지요.” 그리고 우하라는 옅은 미소를 보였다. “실제로 반쯤 미쳤었어요. 나도, 주위 사람들도.”
“아니, 그건 아니에요.” 갑작스레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리미야 레이가 의자에서 일어나 있었다.
“아니라니, 그건 무슨 말이죠?” 아오에가 물었다.
“기리미야.” 우하라가 나무라듯이 만류했다. “그런 얘기는 할 거 없어.”
“아뇨, 이건 아오에 교수님께서도 알아두시는 게 좋아요.” 기리미야 레이는 천천히 이쪽 자리로 다가왔다. “마도카에 대한 수술은 우하라 박사님이 처음 말을 꺼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가 그런 제안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도카 본인이 나서서 실험대가 되기를 희망했던 일이에요.”
아오에는 흠칫 몸을 물리며 엇 하는 소리를 냈다. “설마.”
“사실입니다. 제가 직접 마도카에게서 들었으니까요. 왜 그런 수술을 받으려고 하는지 마도카 본인이 내게 얘기했습니다.” 기리미야 레이는 숨을 가다듬으려는지 잠시 가슴이 들먹거린 뒤, 마치 중대한 고백이라도 하듯이 말을 이었다. “나는 라플라스의 마녀가 되고 싶다. 라고 했어요.”
“라플라스?”
“마도카의 마음을 뒤흔든 것은 토네이도입니다.” (P359-360)
“우산, 어떡하지? 새로 사기는 좀 아깝잖아.” 겐토가 말했다. “하긴 8시에는 비가 뚝 그칠 거야.” 자신의 예측이 어긋나리라는 건 전혀 생각하지 않는 말투였다. 마도카는 안고 있던 인형들을 옆에 내려놓고 겐토를 보았다.
“너,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어?”
겐토의 옆얼굴에 그늘 같은 것을 쓰윽 내달렸다. 마도카의 말이 그의 내면에 있는 뭔가를 자극했다는 건 분명했다.
“그냥 되는 건 아니잖아.” 마도카는 말을 이었다. “날씨를 정확히 맞히고, 크레인 게임에서는 쉽게 인형을 집어내고, 그런 거,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야. 아까 하트 모양의 카드를 날려 보낸 것도, 처음 만났을 때 웅덩이의 물이 어떻게 튈지를 예상한 것도, 보통 사람은 못 하는 일이야. 근데 그거에 대해서 물어보면 안 되는 거야?”
겐토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마도카의 얘기를 듣지 못한 건 아닐 터였다. 그 나름대로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기척이 진하게 전해져 왔다.
이윽고 그의 입이 움직였다. “내가 좀 교활한 짓을 한 것 같다.”
“응?”
겐토는 창피한 듯 뺨을 풀며 피식 웃더니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궁금할 거야. 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당연해. 그럴 줄 뻔히 알면서 나는 내 능력을 숨기지 않았어. 숨기기는커녕 자랑하듯이 다 보여줬지. 네가 궁금해하도록, 네가 그런 질문을 하도록, 내가 작전을 쓴 거야. 난 정말 교활한 인간이야, 진짜 지겹다.”
“겐토.......” (P379)
“수학자 라플라스를 아십니까? 풀네임은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 프랑스인이에요.” 기리미야 레이가 아오에에게 질문을 던졌다.
“라플라스? 아니, 들은 적이 없는데.”
“만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의 현재 위치와 운동량을 파악해내는 지성이 존재한다면 그 존재는 물리학을 활용해 그러한 원자의 시간적 변화를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미래까지 완전하게 예지가 가능하다.....” 기리미야 레이는 마치 시를 읊는 것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라플라스는 그런 가설을 세웠습니다. 그 존재에는 나중에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별명이 붙었어요. 겐토 군의 예측 능력은 그 라플라스의 악마와 이미지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수리학 연구소에서는 겐토 군의 능력에 대한 연구를 ‘라플라스 계획’이라고 명명하기로 했습니다. 계획, 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최종적인 목표점도 설정해야겠지요. 연구소가 설정한 목표는 대략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그의 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해명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조금 전부터 누차 얘기했던 대로 재현성의 입증이었습니다. 전자는 기나긴 여정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후자 역시 높은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죠. 아무리 궁리해봐도 어떻든 인체 실험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피실험자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애초에 그것이 윤리적으로 허용될 일인가. 거기에 관해서는 후생노동성이나 문부과학성에서도, 물론 경찰청에서도 지혜를 주지 못했습니다. 내심으로는 한시바삐 건강한 일반인에게 수술을 했으면 하고 바랐겠지만, 혹시라도 사고가 발생할 경우를 우려해 아무도 선뜻 입 밖에 내지 못했던 것이죠. 그런 때에 라플라스 계획의 실질적 책임자인 소장님에게로 한 소녀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놀랄 만한 말을 합니다. 라플라스 계획의 피실험자로 지원하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아오에는 눈이 둥그레진 채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게 바로 마도카?” (P387-388)
“겐토의 누나가 황화수소 자살을 하는 바람에 어머니까지 함께 사망한 그 사건?”
“그렇지요. 겐토 군은 이 연구소에서 계속 연구에 매진했다면 그야말로 빛나는 미래가 보장된 귀한 인재였습니다. 그런데 그걸 모두 내팽개치고 살인을 저지를 만큼 누군가를 증오했다면, 그리고 황화수소에 그토록 집착했다면, 그 동기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 즉 누나와 어머니를 죽인 자에 대한 복수예요.”
그 말은 납덩이처럼 묵직하게 아오에의 가슴속에 털썩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그, 그럼 누나의 자살은 자살이 아니었습니까? 자살처럼 위장한 타살이었다는 건가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겐토 군이 살인을 저지를 만한 다른 동기가 없어요.”
“그게 타살이었다면 분명 겐토 군이 복수하려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군요. 아니, 하지만 그게.....” 아오에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미처 의식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다니, 그렇다면 모순되는 점이 몇 가지가 있는데요? 우선은 겐토 군이에요. 그는 기억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누나가 자살한 것도, 어머니까지 함께 사망한 것도, 전혀 기억을 못 한다고 했었는데? 아니, 애초에 자신에게 누나와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복수할 생각을 하지요? 아니면 최근에 기억을 되찾기라도 했습니까?” (P394-395)
“어처구니없는 추측이겠지요? 나도 차마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겐토 군이 기억상실인 척했던 이유도 모두 설명이 되는 겁니다.”
그 말의 의미를 찾아보기 위해 아오에는 생각을 더듬었다. 이윽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겐토 군이 그 사건의 진실을, 즉 친아버지가 범인이라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예, 라고 우하라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얘기가 정확히 맞아떨어져요. 겐토 군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식물인간 상태였던 소년은 그것을 누군가에게 호소할 방법이 없었다. 이윽고 의사소통을 꾀하게 되었지만 상대의 질문에 예스와 노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 뿐이다. 아들의 속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당연히 아버지로서 아들과의 접촉을 꾀해 왔다. 아내와 딸을 잃고 아들마저 큰 장애를 갖게 된 가엾은 아버지로서, 겐토 군은 어떻게든 그런 아버지와의 연결 고리를 끊으려고 했다. 그래서 아마카스 겐토로서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것으로 하기로 했다...... 어떻습니까, 이건 지나친 억측일까요?”
아오에는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껏 자신이 믿어온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러면, 이라고 중얼거리며 우하라를 마주 보았다. “겐토 군은 부친까지 살해할 생각이라는 건가요?”
“아마도.”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아오에는 책상을 탕쳤다. “그런 이야기를 믿으라니, 어떻게 그런 걸 믿겠습니까. 아비라는 자가 제 가족을 몰살시키려 했고, 그걸 알게 된 아들이 제 아버지의 목숨을 노리다니.....”
“그렇다면 그 밖에 어떤 가능성이 있지요?”
“...... 대체 동기가 뭡니까? 아마카스 사이세이라는 자는 왜 제 가족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지요?” (P398-399)
왜 그런 짓을 하는 건가. 그 목적은 단 한 가지. 아마카스 사이세이를 밖으로 끌어내려는 것이다. 아마카스의 입장에서는 그 일의 진실을 알고 있는 겐토는 방해가 되는 존재다.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들 터였다. 자신을 죽이려고 겐토가 서서히 다가온다면 그 또한 반격에 나서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내다보고 겐토는 덫을 놓았다. 그가 이용하는 건 유일한 공범자 미즈키 치사토일 것이다. 그녀에게 지시해 아마카스에게 연락하도록 한다. 그럴 경우, 분명 미즈키 요시로의 휴대전화를 쓸 것이다. 낯선 번호에서 걸려 온 전화라면 아마카스도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미즈키 요시로의 휴대전화에서 연락이 온다면 그는 즉각 덫이라고 눈치챌 것이다. 그렇다. 덫인 줄 알면서도 아마카스가 움직일 거라고 겐토는 내다본 것이다.
마도카는 미즈키 요시로의 휴대전화에 걸어보았다. 예상대로 전원이 끊겨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그 전원을 켜는 때가 온다. 바로 겐토의 복수극이 마지막 장을 맞이하는 때다. 마도카는 스마트폰을 개조해 5분 간격으로 미즈키에게 발신 번호 표시 제한 전화를 걸고, 만일 연결될 경우에는 알람이 울리게 해두었다. 조금 전의 알람 소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미즈키 치사토는 아마카스 사이세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경계하던 아마카스가 곧바로 전화를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녀는 메시지를 남길 것이다. 그것을 듣고 아마카스 쪽에서 전화를 건다. (P442)
치사토는 등줄기가 싸늘해졌다. 아마카스도 아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세상에 이런 부자간이 또 있을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나저나 아주 재미있군. 그 녀석이 어떻게 당신을 꼬드겼을까. 보통은 아무리 유산에 욕심이 나더라도 웬만해서는 살인에 가담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나는요, 라고 치사토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살인에 가담한 적 없어요.”
“아, 그러셔?”
“나는 남편과 아카쿠마 온천에 간 것뿐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우연히 황화수소 사고를 당했다고?”
“그래요, 내가 대체 뭘 어쨌다는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반론을 내밀었다.
이미카스는 잠시 침묵한 뒤 “뭐, 좋아.” 라고 말했다.
“남편이 사망한 건도 그렇고, 도마테 온천에서 나스노가 죽은 건도 불행한 사고일 뿐 사건성은 없다고 이미 결론이 내려진 모양이더군. 대체 어떤 방법으로 해치웠는지 실은 나도 짐작이 가질 않아. 하지만 양쪽 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거, 그건 내가 알지, 누구 짓인지도, 그 뒤로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녀석 쪽에서 연락이 오기를 말이야. 어떤 식이 될지는 모르지만 틀림없이 연락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랬더니만 당신이 전화를 했더라고, 아, 이거구나, 딱 감히 왔지. 녀석이 당신을 한편으로 끌어들인 거야. 당신이 거기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녀석이 뭔가 마술을 구사해서 두 사람을 죽인 건 사실이야. 그렇잖아?”
치사토는 대답이 궁했다. 반론해봤자 소용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자 아마카스가 “갑시다”라고 말했다. “출발하자고, 녀석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입을 꾹 다문 채 치사토는 차를 출발시켰다. 문득 깨닫고 보니 몸을 떨고 있었다. 그 떨림이 줄곧 멈추지 않는 상태로 운전을 하고 있다.
아마카스는 이따금 헛기침을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기만 했지만 치사토는 그래도 기무라가, 아니, 아마카스 겐토가 지시한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 인터체인지가 다가왔다. 치사토는 깜빡이를 켰다. 그러자 아마카스가 “여기였어?”라고 중얼거렸다. 뒤를 이어 흥 코웃음을 쳤다.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P473-474)
겐토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나도 처음에는 당신을 황화수소로 보내버릴 생각이었어. 바로 이 자리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만든 영화의 로케지인 이 폐허에서, 쓰레기 인간이 죽을 자리로는 쓰레기 영화의 무대가 그야말로 잘 어울리니까.”
“흥, 내가 만든 영화 따위는 안 본다고 하지 않았나?”
“안 봤어. 하지만 쓰레기 영화라는 건 알아. 이 폐허가 무대라는 건 어딘가 화장실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던 팸플릿을 보고 알았어. 그때 이곳에서 보내버리자고 결심했지, 하지만 몇 차례 사전 답사를 해보는 사이에 황화수소 중독사보다 좀 더 멋진 죽음을 선사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 오늘 이 시각에 당신을 이 자리에 세워놓기만 하면 그게 가능한 거야, 그야말로 신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지.”
“오호, 어떤 죽음일까?”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아무튼 황화수소는 아니야. 그러니 안심하시고 그 여자는 풀어줘.”
“그렇다면 여자는 풀어주겠지만, 그 전에 잠깐 얘기나 할까? 말해봐, 넌 언제 알았던 거야?”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목소리 톤을 낮추며 말을 이었다. “그때 집 안에 황화수소를 발생시킨 사람이 나라는 거.” (P485)
겐토는 팔을 허공에 대고 후려쳤다. “진실을 왜곡한 주제에 완벽이라고? 어이가 없네.”
“흥, 진실?”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한쪽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구나, 그렇다면 좀 물어보겠는데, 진실이란 게 뭐지? 그걸 누가 판정하는 건데? 결국은 기록된 것만이 진실이야. 기록되어서 사람들이 인식해주었을 때, 그게 바로 진실이야. 이 폐허를 봐, 이 건물에는 어떤 진실이 있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건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버린 것은 진실이라고 할 수 없어. 그런 의미에서 대다수의 범용한 인간들은 아무런 진실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리는 거야. 인터넷을 봐. 타인의 험담과 하소연만 가득하지? 공격의 창끝을 겨눌 곳을 찾아내면 앞다투어 비난을 퍼붓고 있어. 스스로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아무 책임도지지 않고, 그러면서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마냥 불평만 늘어놓는 인간들이 어떤 진실을 만들어낼 수 있지? 진실이라는 단어로는 알아듣기 힘들다면 역사라고 말을 바꿔도 좋아. 그런 인간들은 태어나든 태어나지 않았든 이 세상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해. 너희도 마찬가지였어. 이 세상에 없어도 무방한 인간들이었단 말이야. 그러니 행복한 줄 알아. 내 영화에 등장인물이라는 형태로 영원히 남겨지게 됐잖아. 게다가 훌륭한 인간으로.” (P489)
보이스레코더를 챙겨 넣으면서 겐토는 “아, 또 한 가지”라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중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인지 알려줄게. 대다수의 범용한 인간들은 아무런 진실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리고, 그런 인간들은 태어나든 태어나지 않았든 이 세상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아까 당신이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아니야. 이 세상은 몇몇 천재들이나 당신 같은 미친 인간들로만 움직여지는 게 아니야. 얼핏 보기에 아무 재능도 없고 가치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중요한 구성 요소야. 인간은 원자야. 하나하나는 범용하고 무자각적으로 살아갈 뿐이라 해도 그것이 집합체가 되었을 때, 극적인 물리법칙을 실현해내는 거라고, 이 세상에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 따위는 없어. 단 한 개도.”
겐토는 휙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쪽 다리를 절면서 걸음을 옮겼다. 마도카 쪽은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붙잡지 않아?” 아오에가 물었다.
마도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소용없어요.” (P497)
“질문?” 다케오는 머리를 긁적였다. 갑자기 그런 상을 받아봤자 난감하기만 하다.
“단 딱 한 가지만,”
“흠, 그렇다면 딱 한 가지만 질문하도록 하지, 실은 계속 궁금한 게 있었어.”
“뭔데요?”
“그게 그러니까 결국 마도카에게는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 궁금하더라고.”
“보이다니, 뭐가요?”
그러니까, 라고 말하고 다케오는 마른 입술을 적셨다.
“이 세상의 미래 말이야.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마도카는 침묵하고 있었다. 마음에 걸려서 다케오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마도카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건요, 모르는 게 더 행복할걸요?” (P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