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3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노자가 재즈를 만나다

[29장 예술이라는 그릇]

by 노용헌 Mar 16. 2025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장욕취천하이위지 오견기부득이)

天下神器 不可爲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천하신기 불가위야 위자패지 집자실지)

故物或行或隨 或噓或吹 或强或羸 或挫或隳     (고물혹행혹수 혹허혹취 혹강혹리 혹좌혹휴)

是以聖人去甚 去奢 去泰                  (시이성인거심 거사 거태)  

   

노자는 도덕경 29장에서, 천하의 신묘한 그릇(天下神器) 이야기를 하면서, ”억지로 하는 자는 실패하고(爲者敗之) 움켜잡는 자는 잃는다(執者失之). 성인은 지나침을 버리고(去甚) 사치스러움을 버리고(去奢) 교만함을 버린다(去泰).“라고 말한다. 천하신기(天下神器).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신묘(神妙)하다. 대중가수 신신애는 ‘세상은 요지경’이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런 세상만큼이나 예술이라는 그릇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술은 신묘한 세상을 표현하고 있으니 더욱더 신묘할 것이다. 모든 예술의 형식(그릇)들은 다다(DaDa)에서 비롯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현실을 겪으면서 예술가들의 표현은 표현주의, 야수파, 입체파, 미래파, 초현실주의, 구성주의등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다다이즘(dadaism)은 기존의 모든 가치나 질서를 부정하면서 시작된다. 형식을 파괴하는 것 같지만, 새로운 형식을 만든다. 그야말로 신묘한 그릇이 아닐까. 다다의 의미가 어린아이의 옹알이를 하는 소리로 본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에서 천하를 보는 것과 같다. 다다는 또한 허무적 이상주의와 반항정신이다. 노자의 사상이 이와 연결점을 갖고 본다면, 노자는 알 듯 모를 듯한 이야기를 펼치면서, 현실세계와는 다른 해석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치 속물이었던 공자를 신랄히 비판한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감시와 처벌>, <말과 사물> 등으로 알려진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내 삶의 예술가 되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자유주의의 틀과 무한 경쟁과 무한 증식의 사회에서 예술가에게 질문한다. “돌 속에 있는 나를 깨우기 위해 망치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다른 존재가 되려고 비싼 대가를 치른 적이 있는가? 가장 숭고한 조각품을 만들기 위해 피눈물을 쏟으며 자신을 내려쳐 본 적이 있는가? 존재의 개안을 위해 울어본 적이 있는가?” 들뢰즈 또한 예술가의 ~되기(또는 생성, devenir, becoming)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실존=내 삶이고, 미학=예술가 되기이다. 개개인의 삶은 모두 예술이고,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예술작품인 것이다. 누구나 삶에 있어서 예술가이다. 일상에서 예술을 깨닫는 것이 바로 도(道)를 깨우치는 것이다.     


“예술작품이란 땀의 흔적이며 고통의 기록이다. 규정에 갇히지 않으려는 해방의 몸짓이다. 예술가란 감각의 다른 문을 열기 위해 끝없이 도전하고 연습하는 자들이다. 지금과 다른 지각의 펼침을 모색하고 그것을 몸에, 목소리에, 화폭에, 문장에 기입하는 자들. 일상성과 동일성에 머물지 않기 위해 예술가는 몰입한다. 그것은 낡은 ‘보편’을 깨기 위한 작업이다. 몰입은 일순간 자기의 기존 감각 방식이나 신경회로 밖으로 나가는 고행이다. 그 숱한 고행은 지금 이 오감의 세계에 매몰된 자기를 구원하려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기존의 감각 회로나 신경 체계를 고장 내고 변형시킬 정도로 수련해서 다른 문을 열고 다른 리듬을 만들어 그것을 대상에 구현하려는 것이다.”

-미셸 푸코, 내 삶의 예술가 되기, P37-   

  

샌디 스코글런드(Sandy Skoglund)의 사진들은 개념예술에서 출발한다. 그녀의 대표작인 <금붕어의 복수>이다. 여기에서 가상공간 속의 침실에는 수많은 금붕어들이 꿈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만들어진 형상들이 있다.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장자의 호접몽에서처럼 수많은 나비들이 집안을 덮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끔직할 것이다. 사진은 재현의 도구가 아니라 상상의 도구(기묘한 현실의 환상)인 셈이다. 그녀의 다른 사진에서도 가상의 공간에 수많은 동물들(오브제들)이 뒤덮여 있다. 그녀는 방사능에 노출된 고양이들이 유전자가 변하여 인간들을 공격한다는 내용을 설정한 대표적인 설치 작품 ‘방사성 고양이’로 1981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가하여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이어 발표한 ‘물고기의 복수’도 금붕어 떼들이 인간들을 공격하는 내용을 담아 역시 환경 문제, 생태학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녀가 말하는 사진이란 “현실을 찍는 작업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사진 작업으로 남기는 것”이라고 한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는 비밥 베이시스트로서 평가된다. 그동안 코드에 기반한 즉흥 연주 위주였던 재즈 스타일에서 가능한 악보화된 음악으로 재즈를 연주하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기존 재즈 음악가나 청중 모두에게 너무 분석적이고 되레 재즈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처럼 여겨졌으며, 밍거스 자신도 기보에 담기에는 재즈의 세계가 너무 다양하다고 인정하고 포기했다. 1959년에 메이저 음반사인 콜럼비아에서 내놓은 '밍거스 아 음(Mingus Ah Um)'이나 '밍거스 밍거스 밍거스 밍거스 밍거스(Mingus Mingus Mingus Mingus Mingus)'에서 자신만의 음악 스타일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가 재즈라는 그릇에 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의 삶에는 많은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는데, 음악뿐만 아니라 강렬한 성격과 기행으로도 유명하다. 하나는 작곡을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자 화가 난 나머지 피아노를 부순 사건이다. 화가 풀리지 않자, 피아노 잔해를 창밖으로 내던져 버렸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는 밴드 멤버들이 연주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가차 없이 해고했으며, 심지어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분노의 재즈맨’이라고 불리었다. 그가 무엇에 왜 분노했을까? 그의 분노는 재즈라는 예술로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밍거스 안의 예술가는, 마치 도덕주의자처럼 전통에 대한 존중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그의 스승들은 헌신과 기교 연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예술에는 질서와 규율이 필요했다. 구조가 없다면 단지 혼돈만이 말할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파커보다 테이텀이 흥미로웠다. 물론 두 사람은 화성적인 아이디어가 겹치지만 테이텀은 클래식 음악에서부터 스트라이드 피아노에 이르는 기초에 훨씬 명백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밍거스에게 최고의 음악은 스타일들을 뒤섞은 것이기도 했다. 그의 복잡한 삶을 위한 새로운 표현 형식이 필요해 보였다. 그는 베토벤을 존경했는데 이 음악가는 고전적인 형식을 자기 확신을 향한 낭만주의적 열망에 맞게 확장해 나갔기 때문이다.”

-찰스 밍거스의 소리와 분노, P149-  

   

Charles Mingus - Moanin'

https://youtu.be/T2WTqjC-vPs?si=3Ii5Ng5kLJYroI6w

이 글이 좋았다면
응원 댓글로 특별한 마음을 표현해 보세요.
추천 브런치
매거진의 이전글 노자가 재즈를 만나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