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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May 05. 2023

제임스 써버의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2013년

제임스 서버의 대표작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을 원작으로, 1939년 [더 뉴요커]를 통해 발표된 이 단편 소설은 평범한 일상을 상상으로 멋지게 바꾸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특유의 간결한 문체로 위트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대중의 호평을 받으며 수많은 연극을 탄생시켰고, 1947년 데니 케이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주인공의 이름을 딴 ‘월터 미티’, ‘월터 미티 신드롬’이 현실에서보다 상상 속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보통명사화 되었을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벤 스틸러는 천부적인 재능과 친근한 이미지로 전 세계 영화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명배우다. 지난 2006년 개봉해 국내 421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박물관이 살아있다>와 시리즈 모두를 흥행작 반열에 올린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 등을 통해 명실공히 할리우드 최고의 흥행 귀재로 불리고 있다. 또한 배우로서의 활약 못지 않게 감독으로서도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다. 1994년 에단 호크 주연의 <청춘 스케치>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평단과 관객에게 연출 능력을 인정받아왔다. 2008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함께한 <트로픽 썬더>에서는 주연, 감독, 원안, 각본, 제작까지 무려 1인 5역을 거뜬히 소화해내며 전미 박스오피스 3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저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통해 벤 스틸러는 배우로서, 또 감독으로서 과감하게 새로운 시도를 했다. 16년간 근무한 ‘라이프’ 지의 폐간은 ‘월터’의 삶에 찾아온 큰 변화의 단계이다. 하지만 그는 뒤로 물러서기보다 세상 밖으로 나갈 용기를 얻는다. ‘라이프’ 지가 위험에 처하면서 ‘월터’의 현실이 상상을 추월하기 시작하고, 여기서부터 원작과는 전혀 다른 영화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임스 써버의 고단한 생활]

단편작가들은 명랑하고 근심 걱정이 없는 줄 알고들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실제로 그들은 흠칫 놀라고 불안해하기 일쑤다. 문학이라는 의자의 끄트머리에 가까스로 걸터 앉아 있으며, 인생이라는 집 안에서 늘 외투를 껴입고 있다. 한두 권이라도 두꺼운 장편소설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몰두하는 것이 두려워서 자기가 겪은 소소한 일을 짧게 설명하는 작업에만 매달린다. 깊이 몰두하더라도 금세 빠져나올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한 유형의 글쓰기는 유쾌한 자기표현이 될 수 없다. 평범한 일상 가운데 불쑥 찾아오는 거대한 물안을 드러내는 것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한 작가들은 소소한 난관에 부닥칠 운명을 타고났다. 아파트를 잘못 찾아 들어가고, 위장약 대신 가구광택제를 마시고, 잘난 체하는 이웃이 대화에서 상을 탈 정도로 잘 가꿔 놓은 튤립정원을 차로 들이받고, 건달을 학교 친구로 착각해서 힘껏 후려치기도 한다. 그들을 ‘유머 작가’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부른다면 그들이 처한 딜레마의 본질을 외면하는 셈이다. 단편이라는 작은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것은 우울함에 젖은 축축한 손이다.

단편 작가는 어디를 가든 쉴 새 없이 움직인다. 파이 팬을 떨어뜨리거나 치마가 뒤집혀도 바로 빠져나갈 태세가 되어 있다. 사회 부적응자처럼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잠시 무기력해진 순간이 찾아오면 비로소 짧은 휴식을 취한다. 아침이 오면 창문에 블라인드를 치고, 밤이 되면 담배 연기 자욱한 골목길로 기어들어간다. 작은 문제는 크게 얘기하고 큰 문제는 작게 얘기한다. 전대미문의 혼란에 빠진 세상의 불길한 소문에는 귀를 닫아버리지만, 밤중에 시골 길을 걷다가 풀숲에서 토끼가 부스럭대는 소리만 들어도 흠칫하며 예민하게 반응한다. 일요일자 신문의 만화 부록이 바람에 날려 건물 사이를 떠다니다 무릎에 감기면 갑작스레 한기를 느끼기도 한다. 나라가 위태로워도 잠들 수 있지만, 새벽 세 시에 식료품 저장실에서 이상한 소리라도 나면 위장까지 공포에 질린다. 전쟁의 위협은 잘 알지도 못하고 걱정하지도 않지만, 어둑해진 거리를 걸을 때면 작달막한 키에 눈이 크고 턱수염을 기른 남자들이 일렬 종대로 소리없이 뒤따라올까 봐 계속 뒤를 돌아본다.    (P11-13)     

천체 관측, 이론 경제학, 폭격기 제조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발전이 이루어졌지만, 행락지나 친구네 놀러 갔다가 오래된 <타임>지를 우연히 펼쳐보지 않는 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은행가와 정치가가 매년 수십억 달러를 훔치고 있고 실업자가 수천 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런 상황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멍청한 정신과 의사 때문에 석 달을 허비했다거나 이틀 내내 매달린 작품이 로버트 벤츨리가 1924년에 쓴 작품과 겹치다 못해 훨씬 형편없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 깊은 고민에 빠진다.   (P14)     

[냇 윌스의 만담]

어떤 부자가 자신의 주치의로부터 산에 가서 요양하다 오라는 조언을 들었다. “과로와 업무 과몰입으로 체력이 고갈된 상태입니다. 정상적인 몸상태를 회복하려면 산이나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일과 관련된 것들을 잊고 지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4주에서 6주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갖도록 하세요. 그러면 다시 괜찮아질 겁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의사의 조언대로 해야겠어. 멀리 떠나 있는 동안은 편지나 전보 따위에 방해받지 않을 생각이야. 아니, 아예 편지나 전보를 받을 수 없는 곳으로 가야겠군.”

그리하여 그는 6주동안 멀리 떠나 있다가 건강을 완전히 회복해 도시로 돌아왔다. 그동안 집에 관한 소실을 전혀 듣지 못해 소식에 목말라 있던 그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마중 나온 하인에게 물었다.

“이보게 헨리, 집에는 별일 없었는가?”

“별일 없었습니다요, 나리, 아무 일도 없었지요. 집을 떠나실 때와 진배없습니다요.”

“그런가? 그래도 내가 지금 집 소식이 굉장히 궁금한 상태이니,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좀 얘기해보게.”

“없습니다요, 나리, 나리께 말씀드릴만한 소식은 없습니다요. 아주 작은 일이 하나 있긴 한데, 워낙 별 게 아니라..... 그래도 알고 싶으시다면 말씀드리지요. 나리께서 가신 후 나리께서 기르던 개가 죽었습니다요.”

“내 개가 죽었다고? 어째 그런 일이. 개가 어쩌다 죽었나?”

“그게 말입니다요, 나리.... 개가 불에 탄 말고기를 먹었지요.”

“뭐라고? 불에 탄 말고기를 먹었다고? 아니, 어쩌다 개가 불에 탄 말고기를 먹었나?”

“그게 말입니다요, 나리..... 헛간이 불에 타는 바람에 소와 말도 다 타고 나중에 개가 불에 탄 말고기를 먹고 죽었습니다요.”

“뭐라고? 헛간이 불에 탔다고?”

“예, 나리. 헛간이 불에 탔지요.”

“아니, 어쩌다 헛간에 불이 붙었나?”

“그게 말입니다요, 나리.... 집에 난 불이 헛간으로 옮겨 붙는 바람에 헛간이 불에 탔지요. 그래서 소와 말도 다 타고 나중에 개가 불에 탄 말고기를 먹고 죽었습니다요.”

“뭐라고? 그러면 집도 탔다는 얘긴가?”

“예, 나리. 집이 완전히 타버렸지요.”

“아니, 어쩌다 집에 불에 탔나?”

“그게 말입니다요, 나리.... 집에 촛불을 켜두고 있었는데 불이 커튼으로 옮겨붙으면서 지붕으로 번지고 헛간에까지 불똥이 튀었지요. 그래서 헛간이 홀랑 다 타버리고 소와 말도 다 타고 나중에 개가 불에 탄말고기를 먹고 죽었습니다요.”

“집에 촛불을 켜두고 있었다고? 가스와 전기가 들어오는 집에 촛불을 켜두다니?”

“예, 나리. 관 주위에 촛불을 켜두었습니다요.”

“관이라니! 누가 죽기라도 했는가?!”

“예, 나리. 별일 아니라 깜빡하고 있었는데, 마님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요.”

“뭐라고? 장모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예, 나리. 하지만 이미 돌아가셨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요.”

“아니, 장모님은 어쩌다 돌아가셨나?”

“그게 말입니다요, 나리.... 잘은 모르겠지만, 동네 사람들 말로는 마님이 나리의 운전기사와 달아나는 바람에 충격을 받아 그런 거라고들 합니다요. 하지만 그것 말고는 별 일 없었지요.”  (P86-89)   

  

[자서전을 마치며]

1918년 휴전을 알리는 종소리가 미래에 대한 거짓 약속과 함께 울려 퍼질 때, 내 인생의 한 단원이 막을 내렸다. 인생 중반으로 넘어오면서 겪은 다사다난한 삶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려 한다. 세월이 흐르면 차마 말 못할 옛 기억의 날카로운 모서리도 무뎌지는 법이다. 15년, 20년 전의 끔찍한 기억 때문에 아침에 눈 뜨자마자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작년 혹은 재작년에 느낀 혼란과 공포는 시간상으로 너무 가까운 일이라 쉽사리 괜찮아지지 않는다. 얼간이처럼 사고를 저지른 기억에서 벗어나려고 큰 소리로 혼잣말을 지껄여야 할 지경이라면 아직 과거와 대면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고통을 직시하고 사건의 전말을 밝힐 수 없다면 정확히 무엇이 문제였는지 균형 잡힌 시선으로 서술하기란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내가 뉴욕 그린 레이크에 있는 제임스 스텐리 씨네 총기실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사건은 바로 엊그제 일 같아서 도저히 차분하게 회상할 수가 없다. 바로 코앞에 현관문을 두고도 그날 밤에는 어쩌면 그렇게 헤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P152-153)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당신 찾느라 호텔을 다 뒤졌잖아.”

미티 부인이었다. 

“왜 이런 낡은 의자에 숨어있었어? 여기 있으면 내가 어떻게 찾아?”

“올 것이 왔군.”

미티가 멍하니 말했다. 

“뭐라고?”

미티 부인이 물었다.

“당신 그거 사왔어? 이게 뭐야? 강아지 비스킷? 저 상자 안에는 뭐가 들었어?”

“방한용 덧신”

“가게에서 아예 신고 오지 그랬어.”

“나도 생각은 했어....”

미티가 말했다.

“나도 가끔은 생각할거라는 생각 안 해봤어?”

미티 부인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집에 가서 아무래도 당신 열 좀 재봐야겠어.”

미티 부부는 회전문으로 나갔다. 회전문을 밀자 어디선가 비웃는 듯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주차장까지는 두 블록을 가야 했다. 길모퉁이 약국에 다다르자 미티 부인이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요. 깜빡 한 게 있어. 일분이면 돼.”

일 분이 넘었는데도 미티 부인은 약국에서 나오지 않았다. 월터 미티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실 진눈깨비에 가까웠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약국 벽에 기댔다가 이내 자세를 가다듬고 발꿈치를 모았다. 

“손수건이었다니, 알게 뭐야.”

그는 경멸하듯 말하더니 담배를 마지막으로 한 모금 피우고 털어서 버렸다. 그의 입가에 어렴풋한 미소가 스쳤다. 눈앞에는 또다시 전쟁터가 펼쳐졌다. 그는 꼿꼿이 몸을 세우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위풍도 당당하게 포격부대에 맞섰다. 무적의 월터 미티, 마지막까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P174-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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