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용헌 Sep 18. 2023

옥타브 미르보의 <어느 하녀의 일기>

영화 <어느 하녀의 일기> 2015년

<어느 하녀의 일기>(1964), <어느 하녀의 일기>(1946)     

영화 〈어느 하녀의 일기〉(2015년 8월 6일 국내 개봉)는 제65회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현재 가장 주목받는 프랑스 여배우 레아 세이두가 주인공 셀레스틴으로 분해 화제를 모았던 영화이다. 이자벨 위페르, 다이앤 크루거, 샤를로트 갱스부르 등의 유명 배우와 작업한〈육체의 학교〉,〈페어웰, 마이 퀸〉,〈나쁜 사랑〉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브누아 자코가 감독을 맡은 이 영화는 1900년 발표된 옥타브 미르보Octave Mirbeau(1848∼1917)의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사에 이름 높은 두 감독, ‘빼어난 조형감각의 휴머니스트’ 장 르누아르(1946)와 ‘전위 영화의 거장’ 루이스 부뉴엘(1964)에 이은 세 번째의 영화화다.     

나는 성녀가 아니다. 수많은 인간을 만나봤고, 경험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미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얼마나 추잡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리 같은 사람은? 오! 세상에! 이런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게 그래도 우스운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얌전하게 서로 사랑하면 아주 간단하고 좋은데, 이런 인간들은 도대체 어디서 자신의 망상을 추구하는 것일까?             (P19)  

   

나는 아플 시간도, 고통스러워할 권리도 없었다. 아파하는 것, 그것은 주인들이나 누릴 수 있는 사치다. 우리 하녀들은 넘어질 위험을 무릅쓰고 빠르게 걷고 또 걸어야만 한다. 딸랑! 딸랑! 딸랑! 그리고 만일 종이 울렸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늦게 나타나면 마님은 나무라고 화를 내고 난리를 피웠다.          (P97)     

그렇긴 해도 이상하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나는 어머니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건 일자리를 바꾸어 새 주소를 알려줄 때뿐이었다. 그녀는 나를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패곤 했다. 늘 술에 취해 있는 어머니 곁에서 나는 얼마나 불행했던가!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졸지에 듣고 보니 내 영혼이 커다란 슬픔에 잠기고 그 어느 때보다 더 혼자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내 어린 시절이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떠올랐다. 내가 삶을 힘들게 배우기 시작했을 때 내 주변에 있던 모든 존재와 사물이 생각났다. 정말이지 한쪽에는 너무나 큰 불행이, 다른 한쪽에는 너무나 큰 행복이 있다.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 

어느 날 밤(내가 아주 어렸을 때다), 구조선의 뿔 나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던 일이 기억난다. 오! 폭풍우와 짙은 어둠 속에서 울리던 그 소리는 얼마나 음울했는지! 그 전날부터 바람이 돌풍으로 바뀌었다. 항구의 둑은 온통 하얗게 되어 격렬하게 들썩이고 있었다. 작은 배 몇 척만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보다 변변치 못한 다른 배들은 분명 위험에 처해 있었을 것이다.           (P130)  

   

나는 나이가 많지 않다. 그렇지만 많은 것들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완전히 벌거벗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의 속옷과 살갗, 그들의 영혼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거렸다. 향수를 뿌렸음에도 그들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나지 않았다. 존경받는 가정과 정직한 가족이 덕행의 외관 아래 얼마나 많은 추잡한 언행과 수치스러운 악행, 저열한 범죄를 감출 수 있는지! 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부자여도 소용없고, 비단과 벨벳으로 된 옷을 입고 있어도 소용없고, 금박 입힌 가구들을 갖고 있어도 소용없다. 은으로 된 욕조에서 몸을 씻고 허세를 부려도 소용없다. 나는 그들을 잘 안다! 그들은 깨끗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은 우리 어머니의 침대보다 더 더럽다.         (P140)     

오! 인간 존재들의 외관만 보고 표면적인 형태에만 현혹되는 사람들은 사교계가, ‘상류 사회’가 더럽고 썩었다는 것을 짐작도 하지 못한다. 상류 사회를 헐뜯을 생각은 없지만, 나는 그 사회가 오직 저열한 놀이와 외설스러운 행위를 위해서만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부르주아 사회와 귀족 사회에서 오랫동안 생활했지만, 그들의 사랑에 사랑을 위대하고 성스럽게 만드는 것들인 고결한 감정, 열렬한 애정, 이상적인 고통과 희생과 동정심이 수반되는 것은 거의 본 적이 없다.            (P163)     


내게 그것은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내게 어떤 운명이 닥치더라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시간은 나의 마음속에서 노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내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그리고 잘 안 알려진 나의 무엇인가가, 그렇지만 어쨌든 나인 무엇인가가 드러나는 것을 시시각각 목격하고 있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달콤한 기분을 느꼈다. 최악의 추락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존재하는 나쁜 것과 과격한 것에 다시 정복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열렬한 독서 취미를 갖게 된 것은, 그리고 때때로 나의 사회적 환경과 나 자신보다 우월한 것을 지향하는 충동을 느끼게 된 것은, 내 성격의 자발성을 다시 신뢰하려고 애쓰면서 모든 것에 무지한 내가 감히 이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다 조르주 씨 덕분이다.           (P187-188)     

내게 일어나는 일은 과연 다 내 탓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단 한 번도 주인인 적이 없었던 운명은 내 삶 전부를 무겁게 짓눌렀고, 내가 같은 집에 6개월 이상 머무르는 걸 원하지 않았다. 주인이 나를 해고하지 않으면 내가 더 이상 혐오감을 참을 수가 없어서 떠났다. 이상하고 슬프다. 나는 항상 ‘다른 곳에 있기 위해’ 안달했고, 이 가공(架空)의 다른 곳‘에 있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희망을 근거 없는 시정(詩情)과 먼 곳에 대한 허망한 환상으로 포장해 품고 살았다. 특히 그 불쌍한 조르주 씨와 함께 올가트에 살 때부터 이렇게 된 것 같다. 그때 이후로 나는 뭔지 모를 불안 속에서 살았다. 나는 도달할 수 없을 만한 생각과 모습으로까지 나를 드높여야겠다는 욕구를 느끼며 번민했지만, 결코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내가 더 잘 알 수는 없는 세계이므로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한 세계를 너무 갑작스럽게 언뜻 본 것이 내게 매우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아! 미지의 세계로 가는 길은 얼마나 실망스러운가! 걷고 또 걸어도 늘 똑같다. 저 멀리 먼지 이는 지평선을 보라. 푸른색이고, 분홍색이고, 서늘하고, 꿈처럼 밝고 가볍다. 거기서 살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간다. 거기에 도착한다. 아무것도 없다. 모래, 조약돌, 벽처럼 음산한 언덕뿐. 다른 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이 모래와 조약돌, 언덕 위에는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불투명한 회색빛 하늘이, 햇빛이 상처를 입고 그을음처럼 더러운 눈물을 흘리는 하늘이 있다. 아무것도 없다.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은 없다. 게다가 나는 내가 뭘 찾으러 왔는지도 모른다. 또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하인은 정상적인 존재도 아니고, 사회적인 존재도 아니다. 하인은 서로 맞춰질 수도 없고 포개질 수도 없는 잡다한 토막들과 조각들로 만들어진 누군가다. 하인은 그보다 더 나쁜 그 무엇, 인간과 괴물의 잡종이다.           (P224-225)     

조제프는 닭, 토끼, 오리를 죽이는 일을 맡고 있다. 그는 노르망디 지방에서 옛날부터 전해지는 방법에 따라 오리의 머리를 핀으로 찔러 죽인다. 오리가 고통스러워하지 않도록 단번에 죽일 수도 있을 텐데, 그는 능속하고 치밀한 고문 방법을 사용해 오리의 고통을 연장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자기 손 안에서 오리의 살이 부르르 떨리고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기를 좋아한다. 자기 손 안에 있는 오리의 고통과 단말마의 몸서리, 죽음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조제프가 오리를 죽이는 걸 본 적이 한 번 있다. 그는 오리를 자기 무릎 사이에 놓았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는 오리의 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핀을 집어 오리의 머리를 찌른 다음 천천히 돌렸다. 꼭 커피를 가는 것 같았다. 핀을 돌리면서 조제프는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리가 고통스러워해야 해. 고통스러워할수록 피 맛이 좋아지거든.”        (P251)  

   

그들은 세계를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한쪽에는 규칙적인 세계가, 다른 한쪽에는 그렇지 않은 세계가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 있고, 저기 있는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이 두 부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조각들이 되고, 그 조각들은 아주 작고 얇은 조각들이 되고, 그 작고 얇은 조각들은 더 작은 조각들로 무한히 나뉜다. 가서 만찬을 즐길 수 있는 집이 있고, 가서 그냥 저녁 시간만 보내고 올 수 있는 집이 있다. 식탁에 초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냥 응접실에 들어오는 것만 허용할 수 있는(명확히 정해진 일정한 경우에만) 사람들이 있다. 또한 만찬에도 초대할 수 없고 집에 받아들여서도 안 되는 사람들이 있고, 집에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만찬에는 초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점심식사에는 초대할 수 있지만 만찬에는 결코 초대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P280)     

아, 그렇다! 우리는 얼마나 그들을 사랑했던가? 놀라운 것은, 이 같은 복수가 더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요리사는 매일매일 주인들의 목숨을 손에 쥐고 있다. 소금 대신 비소 한 줌만 뿌리면, 식초 대신 스트리크닌 한 방울만 떨어뜨리면 모든 게 끝인데! 그런데 그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핏속에 노예근성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

나는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본 것을 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아름답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자기 집에 정착시키면, 비록 그 사람이 아무리 가난하고 평판이 안 좋더라도 그 사람을 보호하고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나는 주인이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보호와 행복을 그들의 금고에서, 그리고 그들의 피에서라도 빼앗아 올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P371)     


아마 나는 마지막으로 옛 추억을 더듬으며 오늘 밤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현재의 불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내일에 대한 공상에 너무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실 이 추억은 나를 즐겁게 하고, 나의 경멸감을 한층 더 깊게 한다. 나는 노예로 살면서 이상하고 따분한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던가! 머릿속으로 그들을 떠올려봐도 그들이 진짜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그들의 악덕에 의해서 살아 있는, 혹은 최소한 살아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존재다. 그들을 받쳐주는 악덕을 제거해버리면 그들은 심지어 더 이상 유령도 아닐 것이며, 먼지와 재, 그리고 죽음에 불과할 것이다.    (P467-468)     

여덟 달 동안 일기를 단 한 줄도 못 썼고(다른 할 일들이 있었고, 생각할 것도 있었다), 정확히 석 달 전에 조제프와 나는 셰르부르 항구 근처의 작은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결혼했다. 장사는 잘된다. 이 직업도 마음에 든다. 행복하다. 나는 바다에서 태어났고, 바다로 돌아왔다. 바다가 그립지는 않았지만, 바다를 다시 보게 되어 기쁘다. 셰르부르는 오디에른처럼 풍경이 황량하지도 않고, 해안이 한없이 음산하지도 않고, 모래톱이 죽음의 신을 부르며 무시무시하고 장엄하게 절규하지도 않는다. 이곳에는 슬픈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모든 것이 행복을 약속한다.       (P516)     

'여기 두더지처럼, 애벌레처럼 살아가는 두 존재가 있어, 이들은 마치 자발적으로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처럼 적대적인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에 자발적으로 갇혀 살지. 이들은 삶의 즐거움과 집의 미소를 만들어주는 모든 것을 마치 불필요한 것을 없애버리듯 그렇게 없애버렸어. 이들은 자신들의 부를 정당화해주고 자신들의 인간적 무익함을 용서해줄 수도 있을 만한 것을 오물을 피하듯 피하고 있어. 그들은 너무 인색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배고픔을 덜어줄 줄 모르고, 마음이 너무 메말라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위로할 줄 몰라. 심지어 그들은 행복도, 자신들의 행복도 절약하는 사람들이야. 그런 그들을 내가 동정해야 하나? 아! 아니야. 정의의 신이 그들에게 벌을 내린 거지. 그들이 가진 재산 일부를 그들에게서 빼앗음으로써, 숨겨져 있던 보물에 공기를 불어넣음으로써 그 선한 도둑들이 균형을 잡아준 거야. 아쉬운 건, 그 도둑들이 이 두 해로운 존재를 완전히 발가벗기고 비참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거야. 수없이 그들 집에 찾아와 구걸해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던 떠돌이들보다 더 가난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거야. 감춰지고 저주받은 그 부(富)에서 몇 발자국 안 떨어진 길 위에서 죽어가는 버려진 사람보다 더 병들게 만들지 않았다는 거야.‘             (P522-523)    


이전 14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분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