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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Sep 15. 2023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분신>

영화 <더블:달콤한 악몽> 2013년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을 원안으로 한 <더블>은 결핍의 보상기제인 분신 모티프로 정체성의 본질을 찾는 이야기이다. 무기력한 사무직 직원 제임스 사이먼(소설의 골랴드낀)은 정반대 성격을 가진 도플갱어 사이먼 제임스와 대면한다. 소설의 골랴드낀처럼 만약 나와 동명이인인데다가 외모도 같은(도플갱어) 사람이 사무실에서 같이 근무한다면, 그런데 큰 골랴드낀과는 전혀 다른 성격에 작은 골랴드낀의 음모로 정신병원에 가게 된다면? 아마도 끔찍할 것이다.      

9등 문관 야꼬프 뻬뜨로비치 골랴드낀이 긴 잠에서 깨어나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고, 마침내 눈을 번쩍 치켜 뜬 시각은 아침 여덟 시쯤이었다. 하지만 잠에서 깬 건지 아직 자고 있는 건지, 자신의 옆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꿈인지 현실인지, 그것도 아니면 어지러웠던 간밤 꿈자리의 연속인지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처럼, 그는 한 2분 동안 꼼짝 않고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P7)  

   

수수께끼의 사나이는 골랴드낀 씨의 집 앞에 멈춰 서서 노크했다. 그러자 빼뜨루쉬까는 자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만약 다른 때에 그랬다면 골랴드낀 씨는 무척 놀랐을 것이다.) 빼뜨루쉬까는 손에 촛불을 들고 안으로 들어간 사람의 뒤를 따랐다. 우리 서사시의 주인공은 정신없이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외투와 모자도 벗지 않은 채 복도를 걸어 들어가 자기 방 문턱에 벼락 맞은 사람처럼 멈춰 섰다. 두려워하고 예측해 왔던 모든 것들이 지금 현실로 나타나 있었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았고 머리가 핑 돌았다. 낯선 사람은 외투에 모자까지 쓴 채 골랴드낀 씨의 침대에 걸터앉아 그를 마주보고 있었는데, 입가엔 미소를 띠고 약간은 인상을 찡그려 가며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온통 쭈뼛 곤두섰고 공포로 인해 아무 감각도 없이 그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골랴드낀 씨는 이제 밤 손님의 정체를 완벽하게 알아보고 만 것이다. 그의 손님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 골랴드낀 씨 자신이었다. 다만 다른 골랴드낀 씨, 하지만 완벽하게 똑같은,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면에서 똑같은 그의 분신이었던 것이다.       (P77-78)     

골랴드낀 씨는 마침내 눈을 들었다. 그가 기절하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떠돌이 신참내기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런 일을 예감했었고, 또 처음부터 이 모든 일이 예고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골랴드낀 씨는 누가 속닥속닥 귀엣말을 하지는 않나, 이 일에 대해 누가 빈정거리지는 않나, 누군가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일그러지지는 않았나, 누군가가 너무 놀란 나머지 결국 의자에서 나가떨어지지는 않았나 등등을 살피려고 우선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그런 것은 누구에게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골랴드낀 씨의 상사와 동료들의 행동은 정말 놀라웠다. 전혀 상식 밖이었다. 골랴드낀 씨는 그런 비정상적인 침묵에 그만 기가 막혔다. 사건의 본질이 이렇게 훤히 보이는데, 정말 이상하고 엉터리 같고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몸서리마저 쳐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골랴드낀 씨는 이런 생각들을 머릿속에서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혼자서 불 위에서 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골랴드낀 씨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골랴드낀 씨의 공포 그자체이자, 수치이자, 어젯밤의 악몽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골랴드낀 씨 자신이었다. 멍청하게 입을 벌린채 손에 펜을 쥐고 지금 의자에 앉아 있는 골랴드낀 씨 말고, 계장보로 일하는 골랴드낀 씨 말고, 대중 앞에선 주눅이 들어 숨어 버리기를 좋아하는 그 골랴드낀 씨 말고, <나를 건드리지 마시오, 나도 당신을 건드리지 않을 테니> 또는 <나를 건드리지 마시오, 나는 당신을 건드리지 않잖소>라고 말하는 것 같은 걸음걸이로 걷는 그 골랴드낀 씨 말고, 그렇다, 그 골랴드낀 씨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하지만 첫 번째 골랴드낀 씨와 너무나도 닮은 다른 골랴드낀 씨였다. 키도 같고, 몸집도 같고, 옷도 똑같이 입었고, 머리가 벗겨진 것까지 똑같은, 한마디로 똑같이 닮는 데 빠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만약 누가 두 사람을 붙잡아 나란히 세워 놓는다면, 아무도, 결코 그 누구도 누가 진짜 골랴드낀 씨이고 누가 가짜인지, 누가 고참이고 누가 신참인지, 누가 원본이고 누가 복사본인지 구별할 수 없노라고 할 것이다.           (P83-84)    

 

“저는, 정말...... 여기, 안똔 안또노비치...... 그 관리가 말입니다. 안똔 안또노비치.......”

“허 참! 점점 더 모르겠구먼.”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안똔 안또노비치, 이곳에 새로운 관리가 들어온 것 같은데.”

“응, 그래. 자네와 성도 같아.”

“뭐라고요?” 골랴드낀 씨는 소리를 질렀다. 

“자네하고 성이 같다고, 그 또한 골랴드낀이라더군, 혹시 자네 동생 아닌가?”

“아니오, 안똔 안또노비치, 저는........”

“흠! 그렇다면 대단한 일이구먼 그래. 난 틀림없이 자네의 가까운 친척일 거라고 믿었는데, 가끔은 말일세. 그렇게 성이 비슷할 수도 있는 법이라네.”

골라드낀 씨는 놀라서 장승처럼 굳어 버렸다.                  (P86)     

무시하는 까닭에 이름조차 거론하고 싶지 않은 원수들이 제게 거칠고 점잖지 못하게 행동했던 폭풍우 치던 날 밤, 전혀 뜻하지 않았던 당신의 이상스러운 출현은 요즘 우리에게 발생하고 있는 모든 오해의 발단입니다. 자신의 생각만 고수하면서, 저의 생활권과 대인 관계에 침입하겠다는 당신의 고집과 갈망은 요즘 실제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기본적인 예의와 공동체 생활의 단순한 규칙만 지키면 되는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윗분들의 총애를, 당신에겐 가당치도 않은 윗분들의 총애를 얻으려고 제 서류나 저만의 명예로운 이름을 강탈한 것에 대해서는 여기서 새삼스럽게 언급할 필요도 없겠죠. 이런 경우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해명을 고의적이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회피하는 당신의 태도도 새삼스레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내친김에 하는 말이지만, 조금 전 레스토랑에서 목격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당신의 행동도 저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저에게는 없어도 그만인 은화 1루블을 손해 봤다고 불평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도 제가 아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품위 있는 사람들 앞에서 제 명예를 훼손하려고 했던 당신의 명백한 의도를 생각하면, 도저히 분노를 금할 수가 없군요.......            (P138-139)     

갑자기 위선과 동물적 본능으로 유명한 그 인물이 작은 골랴드낀 씨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서, 대수롭지 않은 행동으로 큰 골랴드낀 씨의 위엄과 명성을 단숨에 부수고, 그의 명성을 가로채고, 그를 진흙탕에 넣고 짓밟았다. 그리고 큰 골랴드낀이자 진짜 골랴드낀인 그가 사실은 가짜고, 진짜는 자기라고, 따라서 큰 골랴드낀이 지금껏 보여 왔던 모습은 사실이 아니며 그는 그렇고 그런 자라고, 따라서 고결한 상류 모임에 속할 자격과 권리가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며 증명해 보였다.            (P158)     

그는 생각했다. <그게 낫겠어. 다른 방향에서 생각하는 게 더 낫겠어. 즉 이렇게 하는 거야. 어떻게 할 거냐면 말이지. 나는 아무 상관없는 방관자가 되는 거야. 그러면 해결되고 마는 것을. <<나는 방관자입니다. 제삼자입니다>> 어쩌고 말이야. 그러면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닌 거지, 맞아, 그거야! 사태가 이젠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돌아가기로 결심한 우리의 주인공은 정말로 돌아갔다. 게다가 그는 자신만의 행복한 생각에 빠져 이제 자신이 틀림없는 제삼자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훨씬 나아.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그저 무슨 일이 벌어지나 구경만 하면 되는 거야..... 그래, 정말 좋은 생각이야!> 그에겐 이러한 계산이 틀림없는 것이었고, 사태는 그렇게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자신을 위로하고 보호해주는 장작더미가 있는 평화로운 공간으로 다시 숨어들어 가, 찬찬히 창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번엔 오랫동안 쳐다보면서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갑자기 안에서 어떤 이상한 움직임이 보였고, 사람들의 모습이 어른거리더니 커튼이 열렸다. 올수피 이바노비치의 집 창가에는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고, 모두들 마당을 내려다보면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장작더미로 몸을 가리고 있던 우리의 주인공도 나름대로 호기심을 갖고 그들의 행동을 살피며 장작더미의 작은 그늘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고개를 좌우로 쭈욱 뻗어 거기에 동참했다. 그는 갑자기 무엇에 얻어맞은 듯 깜짝 놀라서 부르르 떨며 무서워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한마디로, 그는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도 아니고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 골랴드낀 씨뿐이라는 것을 완전히 알아낸 것 같았다. 모두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고, 모두 그를 가리켰다.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러면 모두가 보게 될 테니까..... 망연자실해진 골랴드낀 씨는 장작 옆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바싹 몸을 오그렸다. 하지만, 이때 그는 배신자 같은 그림자에게서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림자는 그의 전신을 가리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지금 장작 사이의 쥐구멍에라도 아주 기꺼이 들어가 고분고분하고 얌전하게 앉아 있고만 싶었다. 다만 그것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단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절망적인 최후의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단호한 모습으로 모든 창문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게 더 나았다.......      (P232-233)     

낯선 사람은 그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정신을 하나도 차릴 수 없는 우리의 주인공은 초죽음이 되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분은, 이분은 내과 및 외과 전문의이면서 당신의 오랜 지인인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 루쩬쉬삐쯔입니다. 야꼬프 뻬드로비치!” 누군가의 기분 나쁜 목소리가 골랴드낀 씨의 귀 바로 밑에서 재잘거렸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것은 비열한 인격을 타고난 혐오스러운 쌍둥이, 바로 그자였다. 그의 얼굴에서는 천박하고 악의에 가득 찬 기쁨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기쁨에 겨워 두 손을 비비댔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주위를 이리저리 돌아보았고, 환희에 가득차서 사람들 주위를 종종걸음 치며 돌아다녔다. 폭발할 것 같은 기쁨에 바로 춤이라도 추려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앞으로 뛰어나가 하인의 손에서 양초를 빼앗아 들더니 골랴드낀 씨와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에게 길을 밝혀 주면서 걸어갔다. 골랴드낀 씨는 거실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뒤를 따라 나오면서 서로 밀치고 누르며 입을 모아 반복하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이건 아무 일도 아니니까 겁내지 마세요. 야꼬프 뻬뜨로비치, 이 사람은 당신의 오랜 친구이자 지인인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 루쩬쉬삐쯔잖아요........”   (P24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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