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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Sep 21. 2023

제인 오스틴의 <노생거 사원>

영화 <노생거 사원> 2007년

소설 <노생거 사원>은 1817년 사후에 출판된 제인 오스틴의 소실이다. 이 소설은 젊고 순진한 소녀 캐서린 몰런드가 배스에 갔다가 노생거 사원으로 가서 인간의 본성과 상상에 의존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배우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릴 적의 캐서린 몰런드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녀가 타고난 여주인공감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분과 양친의 면모로나 본인의 용모와 성품으로나 무엇 하나 그럴 만한 데가 없었다. 아버지는 목사로서, 무시를 당하거나 가난하지는 않았으며, 꽤 대접을 받는 편이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이름이 리처드인 데다가 인물이 워낙 시원찮았다. 그에게는 두 개의 종신 목사 자리 외에도 따로 상당한 재산이 있었다. 또 딸들을 집 안에 꼭 가두어 놓고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꽤 양식을 가진 여성으로 성격도 좋았지만 더 두드러진 것은 건강한 체질이었다. 아들을 셋이나 두고도 넷째로 캐서린을 낳게 되자 사람들은 뭔가 변고가 있지 않을까 예상했다. 그러나 주변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자식을 여섯이나 더 낳아서 이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고 건강한 삶도 마음껏 누렸다. 멀쩡하게 사지가 다 붙어 있는 자식이 열이나 되는 가족이라면 늘 유복한 가족이라고 불리기 마련일 터, 그러나 몰런드가가 내세울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인물이 없었는데 캐서린도 어린 시절 내내 그 점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녀는 바짝 마른 몸매에다 핏기 없는 누리끼리한 피부에 머리카락조차 새까만 직상모였고 이목구비도 드셌다. 정신도 외모에 걸맞은 정도여서 주인공으로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 아이의 놀이라면 무엇이든 다 좋아했다.   (P9-10)     


왜냐하면 어느 유명한 작가가 주장했듯이 남자 쪽이 사랑을 명백히 선언하기 전까지는 어떤 젊은 여자도 먼저 사랑에 빠질 권리가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남자 쪽에서 여자 꿈을 꾸었다는 것이 먼저 알려지기도 전에 젊은 여자가 남자 꿈을 꾼다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일이기 때문이다. (P32)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한 소설의 여주인공이 다른 소설의 여주인공에게 후원을 받지 못한다면 대체 누구에게서 보호와 존경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상상력의 범람이니 하며 비난하는 일은 평론가들의 한가한 일거리로 남겨 두자. 새로 나오는 소설마다 쓰레기 같으니 어쩌니 하면서 신문에다 대고 케케묵은 곡조로 왈왈거리게 내버려 두자. 우리끼리는 서로를 저버리지 말자. (P42)     


“전 소설은 읽지 않아요……. 소설은 들여다본 적도 거의 없는걸요……. 제가 종종 소설을 읽으리라는 상상은 하지 마세요.……. 소설치고는 꽤 좋네요.” 이런 것이 판에 박힌 듯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아가씨, 뭘 읽고 있어요?” “아이! 그냥 소설이에요!” 젊은 숙녀는 대답한다. 일부러 무관심을, 혹은 일시적인 수치심을 엿보이며 책을 내려 놓으면서, “별거 아니고 <세실리아>나 <커밀라>나 <벨린다>인걸요.” 한마디로 그냥 소설 작품이라는 것인데, 실은 여기서야말로 정신의 가장 위대한 능력이 발휘되고,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철저한 지식, 그 다양한 면모에 대한 가장 기막힌 묘사, 생생하게 넘쳐흐르는 위트와 유머가 선택된 최상의 언어로 세상에 전달되는 것이다. 자, 바로 그 젊은 숙녀가 그런 소설 작품 대신에 한 권의 <스펙테이터>를 읽고 있었다면 그녀는 얼마나 자랑스럽게 그 책을 내놓으며 제목을 밝혔을까? 그 두꺼운 출판물에서 고상한 취향을 가진 젊은 여성에게 거슬리지 않을 소재나 문체를 담은 대목이 있어서 몰두하게 할 가능성도 거의 없으면서 말이다. 거기에 실린 글들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 환경과 자연스럽지 않은 인물이 부지기수고 지금은 누구도 이젠 관심을 두지 않는 대화 주제가 넘쳐 난다. 언어 또한 너무 거칠어서 도대체 그런 말을 용납한 시대 자체가 한심할 지경이다.  (P43-44)     

틸니 양은 그녀를 아주 예의 바르게 맞았고 그녀가 먼저 다가온 것에 대해 똑같은 선의로 화답했다. 그들은 두 일행이 그 방에 머물고 있는 동안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이 나눈 이야기가 바스의 성수기마다 그 지붕 아래에서 수천 번씩 되풀이된 관찰이나 표현이었다 해도, 소박하고 진실되게 자만심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미덕만은 남달랐을 것이다. (P91)     

캐서린은 대답할 여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 둘은 가 버렸고 존 소프는 여전히 시야에 잡혔다. 이제 다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를 지켜본다거나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까 봐 그녀는 부채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런 군중 속에서 틸니 남매하고 만나리라 기대하다니 자기도 참 바보라고 자책하는 찰나, 불현 듯 장본인인 틸니 씨가 말을 건네며 다시 춤을 신청하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눈을 반짝거리며 기다렸다는 듯이 그 신청을 수락했는지, 얼마나 뛰는 가슴으로 그와 함께 춤을 추러 나섰는지 쉽게 상상이 될 터이다. 정말 존 소프를 가까스로 피하고 나자 홀연 틸니 씨가 나타나 춤을 신청하다니. 마치 일부러 찾아다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인생에서 이런 큰 행복이 또 올까 싶은 기분이었다.    (P95)     


“.... 내 생각에 컨트리댄스는 결혼의 상징이라고 봅니다. 충실성과 순종이 양자의 주된 의무니까요. 춤을 추지 않거나 결혼을 하지 않기로 한 남자들이야 이웃의 파트너나 부인 들과는 아무 볼일이 없겠지요.”

“그렇지만 춤과 결혼은 아주 달라요.”

“그 말씀은 둘이 서로 비교될 수 없다는 의미인데.”

“단연코 아니지요. 결혼하는 사람들은 헤어지지 않고 같이 가서 가정을 꾸려야겠죠. 춤을 추는 사람들은 삼십 분 동안 긴 방 안에서 서로 맞은편에 서 있기만 하면 되고요.”  

“결혼 생활과 춤추기를 그렇게 정의하시는군요. 그런 각도에서 보자면 별로 닮은 데가 없어 보이는군요, 확실히. 그러나 이런 식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음, 이런 점은 인정하실 겁니다. 춤이나 결혼이나 선택권은 남자에게 있고, 여자에겐 거절권만 있어요. 춤이나 결혼이나 남자와 여자가 쌍방의 이익을 위해 맺은 약속이지요. 또 일단 맺어지면 깨질 때까지는 서로에게만 속하고요. 두 사람은 각기 상대방이 한눈을 팔지 않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더 완벽하지 않을까, 다른 누구하고 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펴지 못하게 막는 것이 최상의 이익이지요. 모두 인정하십니까?”   (P97-98)  

   

“제가 ‘가르침’을 ‘고문’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절 바보 취급하시는군요. 그러나 만약 당신이 불쌍한 아이들이 처음에 문자를 배우고 그다음에 철자를 배우는 소리를 저만큼 자주 들어 보신다면, 그 아이들이 아침나절 내내 얼마나 집단으로 멍청해질 수 있고 저의 가엾은 어머니가 마지막에는 얼마나 진이 빠지시는지 본 적이 있다면, 당신도 ‘고문하다’와 ‘가르치다’가 가끔은 동의어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실 거예요. 전 거의 매일 집에만 있다 보니 그런 모습을 늘 보거든요.”

“그렇다고 해 두죠. 그러나 읽기를 배우는 어려움을 역사가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지요. 그리고 당신 자신부터가 평생 동안 책을 읽는 능력을 얻기 위해서 이삼 년 정도는 고문을 당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할지도 모르잖아요. 보아하니 아주 심하게 빡빡한 공부에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것 같지만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읽기를 가르치지 않았다면, 래드클리프 부인이 소설을 써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겠죠. 아니면 아예 쓰지 않았을 수도 있고.”

캐서린은 그 말에 동의했다.        (P142-143)     


노생거 사원! 전율을 느끼게 하는 이 단어는 캐서린의 감정을 최고의 황홀경으로 몰아넣었다. 감사하고 흡족한 마음이 벅차올라 적당히 차분한 말로는 표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렇게 기분 좋은 말로 초대를 받다니! 이렇듯 간곡하게 청하다니! 모든 영예와 위안이, 모든 현재의 즐거움과 미래의 희망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P180)     

그녀는 틸니 양에게 부지런히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속에서 온갖 생각이 들끓다 보니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도 전보다 확연히 알게 된 것은 없는 느낌이었다. 즉 노생거는 종교 개혁 시기에 기금이 풍부한 사원이었다는 것. 사원을 허물게 되었을 때 틸니 가문 조상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 나머지는 무너졌지만 고대 건물의 상당 부분이 여전히 현재의 거주지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것. 그리고 계곡 아래쪽에 서 있으며 북동쪽으로 울창한 참나무 숲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P183)     

그렇지만 처음으로 잔디밭에서 노생거 사원을 보았을 때 그 장엄한 광경에 그녀는 기대 이상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전체 건물은 넓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 사각형 저택의 양 측면은 풍부한 고딕 장식물로 위용을 드러내고 있어 감탄을 자아냈다. 나머지 두 면은 오래된 나무들이 서 있는 낮은 둔덕이나 울창한 식물들로 가려져 있었다. 그 뒤에 가파르게 솟아 저택을 아늑하게 만들어 주는 숲 언덕들은 아직 잎이 나오지 않은 3월인데도 아름다웠다. 캐서린은 이만한 광경을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P233)    

 

“방은 옛날 모습 그대로겠지요. 그렇죠?” 좀 흥분된 어조로 그녀가 물었다.

“네, 완전히 그대로에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되었나요?”

“구 년이 지났답니다.” 구 년이라면 그리 길지는 않다고 캐서린은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아픈 부인이 죽은 후 방을 정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에 비하면 말이다.

“임종을 지키셨겠지요?”

“아니요.” 한숨을 내쉬면서 틸니 양이 말했다. “불운하게도 저는 집에 없었어요. 어머니의 병은 갑작스럽게 와서 짧게 끝났어요. 제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모든 것이 끝나 버렸어요.”   (P245)   

  

힘들게 보낸 밤이었다. 잠이나 아니면 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휴식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처음 도착한 날 뒤숭숭한 상상력으로 자신을 괴롭혔던 그 방에서 그녀는 다시 한 번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잠을 설쳤다. 그러나 불안의 근원은 그 당시와 얼마나 다른가……. 현실이자 실체가 있기로는 통곡할 정도로 우세했던 것이다! 그녀의 불안은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었고, 그녀의 두려움에는 상당한 개연성이 있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악의를 생각하는 데 몰두하다 보니, 자신의 고독한 상황이나 침실의 어두움이나 건물의 고풍스러움 따위가 느껴져도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람이 높이 불면서 종종 집 곳곳에서 이상하고 갑작스러운 소음이 났지만, 그녀는 뜬눈으로 누워 몇 시간이고 그 모두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호기심이나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P301)     

방에 돌아온 그녀의 눈에 전에 본 적 없는 청년이 들어왔다. 그가 공손한 표정으로 바로 일어났고, 딸은 좀 어색해하며 “헨리 틸니 씨예요.”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그는 주뼛거리면서도 진심을 담은 어조로 불쑥 찾아뵙게 된 것을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서 지난 일로 보면 자기가 풀러턴에서 환영받을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몰런드 양이 무사히 집에 도착하셨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이렇게 불쑥 찾아오게 되었노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을 듣는 상대는 솔직하지 못한 판관도 아니고 심정이 비뚤어진 사람도 아니었다.    (P320)     


헨리가 지금은 그녀를 진지하게 사랑하고 있고, 또 그녀의 성품이 탁월하다는 것을 느끼고 기뻐하며 그녀와 사귀는 것을 참으로 좋아하지만, 나로서는 그의 애정이 처음에는 감사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는 점, 혹은 달리 말해서 그녀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상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유일한 이유였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이는 소설에서는 새로운 상황으로, 여주인공의 품위를 끔찍할 정도로 깎아내리는 셈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바다. 그러나 이런 일이 통상의 삶에서도 새로운 것이라면, 적어도 과감한 상상을 펼친 공은 고스란히 내 차지가 될 터이다. (P32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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