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개선문>

영화 <개선문> 1948년

by 노용헌

영화 <개선문>은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 샤르르 보아이에,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이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망명 작가로서 스위스에서 거주하다가 2차 대전 직전 미국으로 건너갔다. 할리우드에서 각본을 쓰고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데 관여하기도 하면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 <개선문>,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등 대표작을 꾸준히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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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들은 에투알 광장까지 걸어갔다. 광장은 보슬비 내리는 잿빛 어둠 속에서 거대하고 무한한 모습으로 그들 앞에 누워 있었다. 안개가 짙게 깔려, 광장을 중심으로 갈라져 나간 길들은 더 이상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드넓은 광장엔 여기저기 흩어져 희끄무레하게 빛나는 가로등 불빛들, 그리고 개선문의 석조 아치만 눈에 띄었다. 거인처럼 치솟은 개선문은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며, 위로는 우울증에 빠진 하늘을 떠받들고, 밑으로는 무명용사의 묘지에서 고독하고 창백하게 타오르는 불길을 지켜 주는 듯했다. 무명용사의 묘지는 밤의 황량함 속에서 인류 최후의 모지처럼 보였다. (P16-17)


흰 수술대 위에는 두서너 시간 전만 해도 희망하고 숨쉬고, 고통 받고 경련하던 몸뚱이가 누워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아무 감각도 없는 시체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음을 자랑하는 외제니라고 불리는 간호사, 자동인형이 그것에 천을 덮어씌우곤 수레에 싣고 가 버렸다. ‘이런 자들은 영원히 살아남는 인간들이야,’ 하고 라비크는 생각했다. 빛은 이런 자들을, 이런 나무토막 같은 인간들을 사랑하지 않아. 그래서 빛은 이런 자들을 깜박 잊어버리고, 오래 살도록 내버려 두는 거야.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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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은 어디 있지요?”

“밑에.......” 하고 여자는 망설이며 말했다. “배개 밑에 넣어 두곤 했어요.”

라비크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죽은 자의 머리가 얹힌 베개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려 그 아래에서 검은색 가죽 지갑을 꺼냈고, 그것을 여자에게 주었다. “돈과 당신에게 중요한 것을 모두 꺼내요. 감상에 젖을 여유가 없어요. 당신은 살아야 해요. 그밖에 어디에 소용이 있겠소? 경찰서에서 곰팡이가 슬게 내버려 둘 작정이오?” (P55)


라비크는 거리로 나섰다. 축축하고 부드러운 바람을 들이마셨다. 자동차들, 인간들, 벌써부터 모퉁에에 서서 영업을 시작한 외국인 창녀 두서넛, 비어홀, 선술집, 담배와 식욕 촉진제와 휘발유 냄새...... 흔들거리며 신속하게 지나가는 생활, 그는 호텔 정면을 쳐다보았다. 몇몇 창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그중 한 방에서 여자는 앉은 채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는 주머니에서 여자 이름을 적은 쪽지를 꺼내 찢어 버렸다. 망각. 그 얼마나 멋진 말인가. 공포와 위안과 망령으로 가득 찬 말! 망각 없이 어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어느 누가 충분히 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 마음을 찢어 놓은 기억의 찌꺼기들. 살아가야 할 구실이 더 이상 없어졌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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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앙테르나쇼날의 식당은 지하에 있었다. 투숙객들은 그곳을 ‘지하묘지’라고 불렀다. 낮 동안에는 안뜰로 난 두꺼운 우윳빛 창문 몇 개로부터 흐릿하게 햇살이 비쳐 들어왔지만, 겨울 동안에는 하루 종일 전등을 밝혀야 했다. 그 공간은 흡연실이었고, 사무실이었으며, 홀이기도 했고, 회의실로도 쓰였으며, 증명서 없는 피난민들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경찰의 불시검문이라도 있을 때면, 그곳을 나가서 안뜰 차고로 들어가 건너편 거리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라비크는 여주인이 종려나무 방이라고 부르는 지하묘지 한쪽 구석에, 셰에라자드 나이트클럽 문지기인 보리스 모로소프와 함께 앉아 있었다. 보기에도 애처로운 한 그루 종려나무가 가냘픈 다리의 작은 탁자 위에서 마졸리카 산 화분에 담긴채 간신히 생명을 지탱하고 있었다. 모로소프는 십오 년째 파리에 살고 있었고, 1차 대전 당시의 러시아 피난민이었다. 자기가 황제근위대에서 근무했다거나 귀족 집안이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 소수의 러시아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P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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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크는 잠시 말문을 닫았다. “우리는 그런 것에 익숙해져야 해요.” 이윽고 그가 말했다. “이전에 우리를 붙들어 매고 있던 것이 지금은 파괴되고 말았소. 우리는 이제 줄 끊어진 유리알처럼 산산이 흩어져 있어요. 단단하게 고정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요.” 그는 다시 잔을 가득 채웠다. “어렸을 때 나는 풀밭에서 밤을 지낸 일이 있었죠. 여름이었고, 하늘은 아주 맑았어요. 잠들기 전에 보니 오리온자리가 지평선 숲 위에 걸려 있었지요. 그러다가 한밤중에 깨어 보니 오리온자리가 갑자기 바로 내 머리 위에 와 있었어요. 그때 일을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 지구는 별이고, 자전한다는 것을 배워서 알고 있긴 했지만, 그저 책에 있는 것을 배울 때처럼 배웠을 뿐이고, 거기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거지요.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정말 그렇구나 하고 느꼈던 겁니다. 지구가 소리도 없이 무한한 공간을 날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거지요. 느낌이 너무 강렬해 내동댕이쳐지지 않으려면 무엇이든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잠시 기억과 습관에서 벗어나, 엄청나게 이동해 버린 하늘을 바라보게 된 때문이었겠지요. 지구는 갑자기 더 이상 고정된 곳이 아니었어요. 이후로 지구는 내게 다시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지요.” (P120-121)


"잊어요. 후회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짓이에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고, 아무것도 만회할 수 없어요.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성인(성인)일 거예요. 삶은 우리를 완벽한 존재로 만들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소. 완전한 인간이 있다면 그런 건 박물관에나 맞을 거요.“ (P1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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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1933년 어느 여름밤. 게슈타포의 건물. 피. 창문도 없는 썰렁한 방. 벌거숭이 전구들의 눈부신 광선. 죔쇠 달린 혁대가 있는 붉게 얼룩진 테이블. 양동이 물에 반쯤 질식되었다가 열 번이나 스무 번이나 실신 상태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나 밤새도록 잠들지 못했던 정신. 죽도록 두들겨 맞아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도 못했던 나의 콩팥. 일그러지고 정신이 나간 시빌의 얼굴. 제복 입은 형리 몇 놈이 나의 여자를 붙들고 있었지. 자백하지 않으면 여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친절하게 설명하며 미소 짓던 얼굴과 목소리. 시빌은 그러고 나서 사흘 후 목매어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다고 했었지.

웨이터가 나타나 잔을 탁자 위에 놓았다. “이건 다른 종류입니다. 손님, 캉의 디디에죠. 오래 묵은 겁니다.”

“좋아, 좋아, 고맙네.”

라비크는 잔을 비웠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고, 한 개비를 뽑아 불을 붙였다. 두 손은 여전히 떨렸다. 성냥을 바닥에 내던지고, 다시 칼바도스를 한 잔 주문했다.

그 얼굴, 방금 다시 보았다고 믿었던, 그 미소 짓던 얼굴. 내가 잘못 보았음에 틀림없어! 하케가 파리에 있을 리는 없어. 불가능해! 그는 기억을 떨쳐 버렸다. 아무 대책도 없는데 그런 일로 전전긍긍한다는 것은 웃기는 짓이다. 독일이 망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그때 어떻게든 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P1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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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몸을 뒤로 쭉 뻗었다. 탁자 유리 밑에서 비치는 부드러운 빛이 여자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왜 그럴까요, 라비크? 밤이면 모든 게 알록달록해져요. 아무것도 어렵게 보이지 않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그리고 이룰 수 없는 건 꿈이 채워주고, 도대체 왜 이런 거죠?”

그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꿈을 꾸는 건, 꿈 없이는 진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지.”

오케스트라가 악기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바이올린의 제5현(弦) 소리가 급한 연속음이 떨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꿈을 꾸면서 자신을 기만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하고 케이트가 말했다.

“사람들은 진실을 가지고 자신을 속일 수도 있어요. 그편이 더 위험한 꿈일지도 모르지.” (P151-152)

그날 밤 후부터 사정은 나아졌다. 그와 함께 나가서 최초의 교훈을 배웠다. 가능할 때는 도와주어라. 그럴 땐 무엇이든 해라. 하지만 더 이상 도리가 없게 되면, 잊어버려라! 그리고 돌아서라!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동정이란 평온한 시대에나 필요한 것이다. 목숨이 위태로울 땐 할 짓이 아니다. 죽은 자는 묻어주고, 삶은 실컷 즐겨라! 너의 삶은 아직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 슬퍼하는 것과 눈앞 현실은 별개다. 현실을 보고 인정했다고 해서 덜 슬퍼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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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팔이 애들이 가판을 들고 다가왔다. 모로소프는 <파리수아르>와 <엥트랑시앙>을 샀다. 그리고 대충 제목만 훑어보고는 옆으로 치워 놓았다. “화폐_ 위조범이 날뛰는 세상이야.” 하고 그는 투덜댔다. “우리가 화폐 위조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걸 자넨 생각한 적 있나?”

“그런 적 없어. 난 통조림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

“통조림이라고? 어째서?”

라비크는 신문을 가리켰다. “우린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어. 만사가 미리 짜 놓은 거고, 미리 씹어 놓은 거고, 미리 느낀 것뿐이야. 통조림이야. 열기만 하면 되는 거지. 하루에 세 번씩 집으로 배달되니까. 자기가 재배하고 길러서, 질문과 의심과 그리움의 불에 올려놓고 끓이는 일은 이제 없어졌어. 그러니 통조림이지.” 그는 씩 웃었다. “우리는 편하게 사는 게 아니야. 보리스, 값싸게 살고 있을 뿐이야.”

“우린 화폐 위조범으로 살고 있어.” 모로소프는 신문을 치켜들었다. “이것 좀 보라고, 놈들은 무기 공장을 세우면서 평화를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고, 강제수용소를 만드는 건,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해. 정의는 모든 당파적인 미친 지랄을 덮어 주는 가면이 되어 버렸어. 정치 깡패들은 구세주가 되었고, 자유는 모든 권력 욕구를 변호하는 큰소리가 되고 말았어. 위조지폐! 정신의 위조지폐란 말이야! 사기 선전이고, 조잡한 마키아벨리즘이야. 암흑 세계의 손아귀에서 노는 관념주의란 말이야! 최소한 정직하기라도 했으면.......” 그는 신문을 꾸깃꾸깃 뭉쳐서 내던졌다.

“아마도 우리는 방 안에서 신문을 너무 많이 읽는 모양이야.” 하고 라비크는 말했다.

모로소프는 큰소리로 웃었다. “그건 그래. 밖에서라면 저런건 불을 지피는 데 필요할.......” (P25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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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앙은 아무 뜻 없이 말했지만, 그녀의 어떤 행동도 그 말 이상으로 그의 심장을 때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밤마다 무슨 소리를 지껄이거나 속삭여도 그는 대부분 기억하지 못했다. 창밖에서 아침이 잿빛으로 동 트기 시작하면 거의 다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녀가 자기 옆에 쪼그리고 있거나 누워 있을 때의 황홀감은 그녀 자체에 대한 황홀감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순간의 도취 그리고 빛을 발하는 고백이라 생각했고, 그 이상으로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빛이 숨바꼭질하고 있는 눈부신 구름들 사이로 갑자기 초록과 갈색으로 빛나는 대지를 내려다본 비행사처럼, 그는 그 이상의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황홀속에서 헌신을, 도취 속에서 감정을, 요란한 말 속에서 소박한 신뢰를 보았다. 그는 불신과 의문과 몰이해를 예상했으며, 이런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은 언제나 작은 것들이며, 결코 커다란 것들이 아니다. 커다란 것들은 연극적인 몸짓과 거짓에 대한 유혹과 너무도 가까운 법이다. (P260)


그는 1933년 8월에 체포되었다. 그는 게슈타포에 쫓기는 두 친구를 자기 집에 두 주간 숨겨 주었고, 이어서 그들의 탈출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중 한 친구는 1917년 플랑드르의 빅스코터에서 라비크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쓰러져 서서히 피를 흘리며 죽어 가던 그를, 기관총 엄호 사격을 받아 업어 왔던 것이다. 두 번째 친구는 여러 해 동안 사귀었던 유대인 작가였다. 라비크는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두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도망쳤는지, 어떤 증명서를 가지고 있었는지, 도중에 누가 그들을 도울 것인지를 알아 내려 했다. 하케가 그를 심문했다.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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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개선문 위에 은빛으로 걸려 있었다. 샹젤리제의 가로등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가로등의 강렬한 불빛이 탁자 위 유리잔들에 비쳤다. 이 잔도, 저 달도, 거리도, 오늘 밤도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또 다른 삶, 또 다른 별에서 언젠가 한번 지나갔기라도 한 것처럼 낯설면서도 친숙해 보이는 이 순간도 마찬가지로 꿈이었다. 이제 사라졌고, 가라앉았으며,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버린, 하지만 내 머릿속에만은 지금도 인광을 발하며, 말이라는 것으로 석화되어 버린, 지난 여러 해 동안의 기억도 꿈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혈관의 어둠 속을 통해, 쉬지도 않고 37.6도를 유지하며, 약간의 소금 맛을 내며 흐르고 또 흐르는 액체, 비밀스러운 피 4리터, 이것도 꿈인 것이다. 기억이라고 불리는 중추신경의 반사작용, 눈에 보이지 않는 허무의 저장고, 연년세세 떠오르는 별과 별, 어떤 것은 밝게 빛나고 어떤 것은 베리 거리 위의 화성처럼 핏빛이다. 어떤 것들은 어슴푸레하게 빛나며 얼룩으로 가득하다. 기억의 하늘, 그 아래에서 현재는 혼돈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P263)


그가 여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여자가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조앙.” 하고 그가 불렀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아무것도 묻지 마. 저기 가로등 불빛하고, 요란한 네온사인들 보이지? 우리는 죽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어. 이 도시는 생활 때문에 벌벌 떨고 있어.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절연당했고, 가진 거라고는 우리 마음뿐이야. 난 다른 세상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어. 그런데 당신은 그대로 있어. 당신은 생명이야. 아무것도 묻지 마. 천 가지 질문보다도 당신 머리카락 속에 더 많은 비밀이 들어 있어. 여기, 우리 앞에 밤이 있어. 아침이 창문을 쿵쿵 두드릴 때까지 단 몇 시간만이라도 그것이 영원이야.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것, 그게 전부야. 기적이면서 또한 이 세상에 있는 가장 자명한 것이지. 그 사실을 나는 꽃피는 덤불 속에서 밤이 녹아들고, 바람이 딸기 냄새를 풍기는 오늘 느꼈어. 사랑이 없으면 인간은 휴가 중에 죽은 사람에 불과하고, 몇 가지 약속 날짜와 우연한 이름일 뿐이야. 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아........” (P268-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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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미소를 짓고는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제가 가볍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맙소사, 우리들의 저주받은 인생에서는 가벼운 일이 너무도 적었어요! 전쟁이나 굶주림이나 뒤집히는 일은 끔찍하게 많았지만요. 혁명이니 인플레이션이니 하면서 말이에요. 하지만 약간의 안정이나 가벼움, 평화라든지 여유는 결코 없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말하잖아요. 정말이지 우미 부모님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소박하게 산 것 같아요. 라비크.”

“맞는 말이야.”

“인생은 짧고 단 한 번뿐이에요. 그런데 그게 그냥 지나가버리잖아요......” 여자는 두 손을 따뜻한 바위 위에 놓았다. “저는 하잘것없는 여자예요. 라비크, 제가 역사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고 으스대고 싶지도 않아요. 그냥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그리고 세상만사가 이렇게 무겁고 어렵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것뿐이에요.”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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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난 가야겠네. 문화의 중심지 몽마르트에서 문을 열어야지. 도대체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 걸까?”

“그걸 생각하기 위해서겠지. 다른 질문은 없나?”

“있어. 인간이 그런 걸 생각해서 좀 철이 들자마자, 곧 죽어버리는 건 또 무슨 일인가?”

“철들어 보지도 못하고 죽어 버리는 인간도 수두룩하네.”

“얼버무리지 말게. 혹시나 영혼의 윤회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우선 자네에게 다른 걸 물어보고 싶어. 사자는 영양을 죽이고, 거미는 파리를 죽이고, 여우는 닭을 죽여. 그런데 자기들끼리 전쟁하고 싸우고 죽이는 유일한 종이 누구겠나?”

“그런 건 애들한테나 묻게.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인간들에게 물어보라고. 사랑이니 호의니 자비라는 말을 만들어 낸 자들한테 말이야.”

“좋아. 그럼 이 자연계에서 자살할 수 있고, 또 자살을 하는 유일한 존재는 무엇이겠나?”

“그것도 인간이 아닌가. 영원이라든가 신이라든가, 부활 같은 걸 만들어 낸 인간이지.”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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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해. 병원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

“의사한텐 언제나 좋은 핑계가 있군요.” 여자는 천천히 말하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자들처럼 말이야. 조앙. 우리는 죽음을 조종하고, 당신들은 사랑을 조종하지. 거기에 세상 모든 이유와 모든 권리가 있어.”

여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에겐 튼튼한 위장이 있어.” 하고 라비크가 말했다. “우리에겐 그게 필요해. 그게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 해. 우리는 다른 사람이 기절을 해야, 그때부터 기운을 내기 시작하는 거야. 안녕, 조앙.”

“다시 올 거죠, 라비크?”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여유를 가져, 저절로 알게 될 테니.” (P87)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홀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학생들과 베데커 여행 안내서를 손에 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간다고? 그러나 잠시 동안 다른 사람의 가슴속에 폭풍우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는 것 외에는 가진 게 없는 인간에게 도대체 어떤 집이 있단 말인가? 사랑이 고향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 충격을 가할 때, 그들을 뿌리째 뒤흔들며 완전히 사로잡아 버리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그들은 그것밖에는 가진 것이 없지 않은가? 내가 사랑을 피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래도 사랑은 나를 뒤따라오고 사로잡아 굴복시키지 않았던가? 익숙하고 정든 땅에서보다, 낯선 곳의 미끄러운 빙판에서 다시 몸을 일으키기는 더 어려웠다. (P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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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 말로 얼마나 많은 것을 표현해야 했던가? 더없이 부드러운 살결의 애무로부터 정신의 아득한 격동에 이르기까지, 단순하기 그지없는 집안 소원으로부터 죽음의 감동에 이르기까지, 제정신이 아닌 적나라한 욕정에서부터 야곱과 천사의 격투에 이르기까지, 라비크는 이제 마흔을 넘겼고, 많은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두들겨 맞고 쓰러졌다가 경험과 지식으로 다시 일어섰다. 세월이라는 필터에 걸러지고 더욱 단단해지고, 비판적이 되고 더욱 냉정해졌다. 나는 그것을 원치 않았고, 믿지 않았으며, 그것이 다시 한 번 찾아오리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눈앞에 있다. 그 모든 경험도 소용없고, 그 모든 지식도 그것을 더욱 불타오르게 할 뿐이다. 메마른 냉소주의와 위기의 세월에 쌓아올렸던 장작보다 감정의 불길 위에서 더 타오르기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P130)


그게 이제 와서 나와 무슨 상관인가? 한 인간이 더 늘거나 더 줄어들 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악질이거나 아니면 더 악질일 수도 있는 수십만 악한들 중 하나가 더 늘거나 더 줄어들 뿐이다. 하나라도 줄이자. 그는 불쑥 걸음을 멈췄다. 바로 그거다! 갑자기 그는 깨달았다. 바로 그거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하고 생각하며 피곤해하고 잊어버리려 하는 것. 그것이 놈들을 더 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바로 그거다! 한 놈이라도 더 줄이는 거다! 그래, 한 놈이라도 더 줄인다.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지라도, 또 전부이기도 하다! 전부다! 그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그러자 갑자기, 성냥의 노란 불빛이 골짜기처럼 금이 죽죽 간 동굴 속 같은 손바닥을 비추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케를 죽일 것이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그 하나로 집중되었다. 갑자기 개인의 복수를 훨씬 넘어선 그 어떤 것이 되었다. 만일 그 일을 하지 못한다면,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죄를 저지르는 것 같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도 확실히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설명이나 논리 저 너머에서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는 희미한 목소리가 핏속에서 끓어올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도가 거기로부터 생겨나고, 이어서 보다 큰일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케는 공포 정치의 말단 관리에 불과하고, 그렇게 중요한 인간도 못된다는 사실은 그도 알았다. 하지만 하케를 죽인다는 것이 무한히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갑자기 깨달았다. (P24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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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이라고, 뭐 때문에? 민주주의자였기 때문이었어! 그리고 빌만을 기억할 테지? 그 친구는, 네놈이 두 시간 심문을 한 후 피오줌을 쌌고, 이는 다 없어지고, 눈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 그래, 그 친구는 왜 심문을 받은 건가? 그 친구는 가톨릭 신자였고, 네놈의 총통이 새로운 구세주라는 걸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어. 그래, 리젠펠트는 기억하는가? 머리와 등짝이 생고기 덩어리처럼 짓뭉개져, 우리한테 혈관을 물어뜯어 달라고 했지. 네놈한테서 심문을 받고 난 후 이가 다 빠져 자기는 물어뜯을 수 없었으니 말이야. 심문이라고, 뭐 때문에? 전쟁을 반대했고, 문화는 폭탄이나 화염방사기를 통해 가장 완벽하게 표현된다는 걸 믿지 않은 탓이지. 심문이라고! 몇천 명의 인간을 심문했다고 그랬지. 손을 가만둬. 이 돼지 새끼! 이제 마침내 네놈을 붙잡았다. 우리는 지금 두꺼운 담장으로 둘러싸인 집으로 달리고 있다. 우리는 단둘이 되는 거다. 내가 네놈을 심문해 주마. 천천히, 천천히 며칠이고 계속해서, 로젠베르크 식으로 막이다. 빌만 식으로, 리젠펠트 식으로 심문해주마. 네가 우리한테 해 준 그대로 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나면.......’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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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하케를 죽였고, 또 파리를 떠나지도 않았다. 이제는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도 합당한 것이다. 우연의 덕을 보았던 사람은 우연에 맡겨야 한다. 체념이 아니다. 결단으로부터 오는 평안함이며, 논리를 초월한 것이다. 마음의 흔들림은 이제 끝났다. 무언가가 정리되었다. 기다렸고 정신을 집중했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존재가 정지 앞에서, 자신을 내맡긴 신비로운 신뢰감 같은 것이었다. 이제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모든 흐름은 멈추었다. 호수는 밤을 향해 자신의 거울을 치켜들었다. 아침이 되면, 호수 물이 어디로 쏟아질지 알게 되리라. (P314)


모든 것이 무게도 없이 둥실 떠다녔다. 미래와 과거가 서로 만났으며, 그 둘은 소망도 고통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어느 것도 다른 어느 것보다 더 중요하지도 더 강력하지도 않았다. 지평선들은 균형을 이루고 있었고, 특별한 한순간에도 존재의 저울은 균형을 유지했다. 운명이란 것도 그것에 맞서는 태연자약한 용기보다 결코 더 강력하지는 않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면 인간은 자살할 수 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살아 있는 한 결코 잃을 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 또한 좋은 일이다.

라비크는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알았다. 그리고 내일은 또다시 저항하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오늘 저녁, 잃어버린 아라라트 해변으로부터 다가오는 파괴의 피비린내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지금, 모든 것은 갑자기 이름을 잃었다. 위험은 위험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운명은 희생물이면서, 또한 인간이 희생을 바치는 신성함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일은 미지의 세계였다. (P335-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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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새는 떠나 버렸어요.” 하고 이윽고 그가 말했다.

“마르쿠스 마이어는 어제 미국으로 갔고요.”

트럭이 흔들거렸다. 모두들 꼭 붙은 채로 서 있었다. 거의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트럭이 길모퉁이를 돌았다. 라비크는 운명론자인 자이덴바움을 보았다. 그는 한쪽 구석에 밀린 채로 서 있었다. “다시 한 번 부닥치게 됐군요.” 하고 그가 말했다.

라비크는 담배를 뒤졌다.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트렁크 속에 충분히 넣어 놓았던 게 생각이 났다. “그렇군요.” 하고 그가 말했다. “인간은 많은 것을 견딜 수 있나 봅니다.”

트럭은 와그람 거리를 달려가다 에투알 광장으로 꺾어 들었다. 사방에 불빛이라곤 없었다. 광장엔 어둠만 짙게 깔려 있었다. 너무 어두워, 개선문조차 보이지 않았다.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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